문인 일화(ㅂ-ㅇ)

박인환(1926-1956,강원도 인제)

톰소여와허크 2010. 8. 28. 04:01

 

박인환(1926-1956,강원도 인제)

 

  박인환은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 아버지의 돈 3만원과 이모의 돈 2만원을 얻어 서점을 차리고 거기에 '마리서사'란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시집 <군함말리>에서 따 왔다고도 하고, 프랑스의 여류 시인이자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에게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6·25 이후 박인환의 행보는 명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전화나 그밖의 통신수단이 변변치 않던 당시로서는 문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 명동의 카페나 술집 이외엔 없었던 것이다.  전후의 명동은 예전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부분의 문인들은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박인환 역시 부쩍 폭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마리서사의 주인답게 꽤나 멋쟁이로 통한 것 같다.  

 그는 얼굴이 서글서글했고 키가 컸고 어떤 옷을 입어도, 루바시카를 어깨에 걸쳐도 멋이 철철 흘러 넘쳤다. 두발의 형까지도 상고머리로 깎아 태연자약 명동거리를 돌아다녔다. 험프리 보가트를 본딴 머리라고 기분을 내면서, "머리가 길어야 예술가답다는 견해는 이미 낡은 세대의 유물이야. 구역질나서 볼 수가 없어…" 큰 소리로 남의 머리까지 시비하려 들었다.

 스탠드 바아에서 봄이면 진피즈, 가을이면 하이 볼, 그리고 조니 워커, 인환은 이런 식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렇지 못하고 그 값싼 대포술도 마음대로 안 되니 이거 부끄러워 살 맛이 없다고 비통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장 콕토가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을 적에도 박인환은 그 자신이 아카데미 회원이 된 듯이 감격하여 술좌석마다에서 잔을 높이 들고 "축배, 축배"를 외쳤으며, 장 콕토 같은 영화 예술인이 우리나라에 있다면 자기도 기꺼이 서슴없이 배우가 되겠노라고 기명을 토했다.

 "어서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여름은 이게 뭐냐. 通俗이고 거지지. 겨울이 빨리 와야 두툼한 홈스펀의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어느 여름날 술집에서의 말이었다. 이런 동료 문인들의 회상을 보면 그의 별명이 왜 '명동 백작'이 되었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은 모두 박인환을 사랑했고 그의 외상술을 거절하지 못했다. 박인환이 한 무리의 사나이들을 이끌고 술집 문을 들어서면 "또 외상술이야"하고 마담들은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 눈살 찌푸림이 거절하기 위한 찌푸림이 아니라 일종의 애정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기미를 꿰뚫은 박인환은 "걱정마. 꽃피기 전에 청산해 줄 테니까."라고 서슴없이 응대하고는 몇 잔의 술이 들어가 가슴이 뜨거워지면 "이렇게 우울한 날엔 샹송이라도 들어야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기 아닌 남의 것에, 바다 건너 아메리카라든지 프랑스를 바라고 살았던 예술가들, 직장도 없고 돈도 없이 부서진 폐허에 고딕 성당만이 우뚝 선 명동을 걸어다니며 설움에 겨워하던 예술가들은 그런 식의 허세로라도 그날 그날이 마음의 빈 구석을 메우며 살았다.

   그러나 이런 일화들이 그의 매력을 보여준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인환은 겉멋만 든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수영, <박인환> 중)  

 김수영과 박인환은 가깝게 알고 지내긴 했지만 서로의 성격상 친해지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박인환의 장례식 때에도 김수영은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진지하고 치열하게 사고하는 김수영에게 박인환의 가벼움은 경박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최하림은 이 둘이 서로에 대한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김수영이 더 했다고 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1956년 3월 13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만 그날도 경상도집이었을 것이다. 후반기 동인이었던 김규동과 이진섭, 임만섭 등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느정도 취기가 오르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노래를 청했다. 그 순간 인환은 메모지에 무슨 글을 끄적거리더니 잠시 후에야 일이 다 끝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 쪽지는 작곡을 하던 이진섭에게 전달되었고, 거기에서 또 즉홍곡으로 작곡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직도 세상에 바람처럼 흐르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이자 노래였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지은 지 4일이 지난 후, 이상 추모의 밤 행사를 준비한다. 당시만 해도 모더니스트들의 우상이자 텍스트였던 이상에 대한 그의 경외심은 남달랐다. 박인환은 그런 이상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 행사를 기획했던 것이다. 행사당일, 행사가 끝나고 일행은 이상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술자리를 벌였다. 동방문화 회관 앞 왕관주점이 회식 장소였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박인환, 이봉구, 원규홍, 이진섭 등이었으며 다들 취하도록 마셨다. 박인환은 이날 이상 추모시인 <죽은 아포롱>을 지었다. 죽던 날인 3월 20일까지, 박인환은 술만 마셨다. 그리고 그날 오후 8시 30분경에 집에 돌아와 누운 채로 그는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혹은 폐렴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