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1937-2007, 도쿄)
권정생(1937-2007, 도쿄)
아래는 동화작가 서정오의 글입니다.
[ 5월 17일, 이 시대의 뛰어난 아동 문학가이자 성자처럼 거룩한 삶을 살았던 권정생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70년의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었지만, 우리 모두는 큰 스승 한 분을 잃었습니다. 욕심이 미움을 낳고 미움이 폭력을 낳는 이 시대에 선생의 깨끗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합니다.권정생 선생은 ‘강아지 똥’과 ‘몽실언니’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동화 못지않게 그 삶에 향기를 품은 초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은 비록 겉보기에 작고 초라했으나 속내는 한없이 크고 장엄하였습니다. 그는 진정 우리 시대의 작은 거인입니다.
선생의 한평생은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낯선 땅에서 남루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선생은 그 때를 일생에서 가장 따뜻한 나날로 기억합니다.
‘193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혼마치의 헌옷 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톨이로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삯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광복을 맞아 우리나라로 건너온 뒤 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신문배달원`서점 점원`재봉틀 수리공으로 떠돌던 선생은 열여덟 살 때 전신결핵이라는 큰 병을 얻습니다. 그 병은 평생을 두고 선생을 괴롭혔지만, 그는 그 아픔조차 받아들이고 어루만지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길 가다가도 퍼질러 앉으면/ 앉은 채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 차라리 그대로 쑥쑥 빠져 들어가/ 천 길 만 길 지옥 속에라도 빠져들고 싶어라.’(결핵`1)하고 노래했을까요.
선생은 서른 살 무렵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한 뒤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글쓰기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 정성은 곧 ‘강아지 똥’ ‘몽실언니’ ‘무명저고리와 엄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과 같은 100편이 넘는 동화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보석 같은 이야기들은 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 지금 나이 서른 안쪽의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어릴 때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명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선생은 천성이 인정 많고 눈물 많은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깊은 정성과 애정을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따뜻한 눈은 언제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타계하기 달포 전에 병상에 누운 선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불편한 몸으로 끊임없이 고향 마을 사람들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개는 요새 어머니가 없어서 고생하고 있고 아무개는 공부를 못 해서 기가 죽었다는 식으로, 아이들 이름을 하나 하나 들어 가며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듯 말했습니다.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한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 선생은 슬픔에 겨워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했습니다.
선생의 사랑이 미친 곳은 비단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생물, 이를테면 생쥐`벌레`절름발이 강아지 같은 것이 다 선생의 따뜻한 품안에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새마을 운동’으로 몸담고 있던 교회의 나무들이 마구 베어질 때, 선생이 어린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톱질을 멈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다음과 같은 글을 읽다 보면 가슴이 저려 옵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이러한 생각이 ‘강아지똥’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낳았나 봅니다. 이 아름다운 동화는 하찮은 강아지똥도 쓸모가 있다는 걸 보여 줍니다. 못생기고 더러워서 버림받은 강아지똥은 깊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봅니다.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다.’라는 흙의 말을 듣고 희망을 얻은 강아지똥은 스스로 잘게 부서져 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별처럼 고운 민들레꽃을 피웁니다.선생의 대표작 ‘몽실언니’에 나오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입니다. 모진 운명 속에서 절름발이가 되어 고통 받는 몽실, 가난에 찌든 아버지와 뒤틀린 새아버지,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는 밀양댁, 병약한 난남이와 꼽추 남편까지, 이들의 삶은 형벌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대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삶의 의지를 다지는 길로 이끕니다. 진정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이 분단시대 한국문학의 가장 위대한 성과로 평가받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권정생 선생은 살아생전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마흔 해 전 터를 잡은 조탑동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고, 시냇가에 자리 잡은 다섯 평 오두막은 언제나 그대로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돈과 품을 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선생은, 오랫동안 집안에 그 흔한 냉장고 하나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이오덕 선생이 조그마한 헌 냉장고 하나를 구해다 반강제로 들여놓기 전까지 그는 해마다 매미소리와 산바람을 벗삼아 여름을 났습니다.
몇 해 전 한 방송사의 책읽기 프로그램에서 선생의 책 ‘우리들의 하느님’을 뽑아 크게 선전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은 한 마디로 사양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책 고르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선생이 ‘한국아동문학상’을 타게 됐을 때는 시상식에도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천성이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보다 앞서 당선된 신춘문예 시상식에도 가지 않은 터였으니 이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이오덕 선생이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검정고무신을 신고 식장에 간 선생은 진심에서 우러난 연설로 모인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때 선생의 옷차림이 오죽했으면 한 양복점 주인이 그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하려고 했을까요. 선생이 그 제안을 사절하였음은 물론입니다.
선생은 말년에 자신의 글이 세상을 바꾸는 데 이바지하지 못했다며 괴로워한 적이 있습니다. 미움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을 보며 선생의 절망감을 뼛속 깊이 이해합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마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아이들은 선생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 마음 속에는 조금씩, 정말 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리는 슬기가 싹트고 있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틀림없이 이 세상은 더 나아져, 모든 이들이 함께 어울려 행복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요.
선생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마음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책 판매로 생기는 모든 인세는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고,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기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25년 동안 살았던 다섯 평 오두막조차 깨끗이 헐어서 자연으로 돌려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던 우리에게 권정생 선생은 그 갈 곳을 밝히는 등불이 돼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든든하던 스승 한 분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곁에는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권정생 선생이 뿌려 놓은 씨앗을, 이제 우리가 정성 들여 가꾸어야 합니다. 그 씨앗은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씨앗입니다.]
아래는 권정생 선생님이 직접 쓰신 글입니다.
[1937년 9월에 나는 일본 도쿄 혼마치(本町)의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늘 외톨일 골목길에서 지내야 했다. 삯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주면서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키도 작고 손도 조그만 히데코 누나는 항상 말이 없고 외로워 보였다. 함께 극장에 가면 고구마튀김을 수건에다 겹겹이 싸서 식지 않도록 품속에 넣어뒀다가 영화가 중간쯤 진행될 때 꺼내어 내 손을 더듬어 쥐어주던 그 따뜻한 촉감은 평생을 잊을 수 없다.
아무렇게나 흘러들어와 모여사는 빈민가 사람들의 가족구성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골목길 끄트머리 노리코네 아버지는 조선사람, 어머니는 일본여자, 노리코는 고아원에서 데려온 딸이었다. 건너편 집의 미치코는 주워다 키운 아이고 동생 기미코는 조선아버지와 일본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고 우리 앞집 일본인 부부도 양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집 건너 경순이는 관동지진 때 부모를 잃고 거기서 식모살이처럼 얹혀살고 있었다.
경순이는 가끔 얻어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우리집으로 쫓겨왔다. 어머니는 어루만져 달래주고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경순이에 대한 추억은 이따금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스무살이 넘었을 것이라 했지만 경순이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몰랐다. 오테다마(팥주머니)를 만들자면 보통 팥알을 넣는데 경순이는 그럴 수 없어 우리집 추녀밑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자잘한 돌멩이를골라 만들곤 했다.
소설 《몽실언니》는 혼마치에 살았던 히데코 누나이기도 하고 경순이 누나이기도 하고 그외의 가엾은 아이들의 모습이다.
1946년 해방 이듬해 우리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때, 조선인연맹에 가입했던 형님 두분은 다음에 돌아오기로 했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울타리의 동백꽃이 피던 3월에 후지오카의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차에 오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떼밀려 태워졌고 차는 떠나고 말았다. 만 8년 6개월 동안 어렵지만 정들어 자라온 땅을 떠난다는 것은 가슴이 쓰리고 서러운 일이었다.
1946년 4월은 보릿고개가 심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먹고있었다. 그것도 하루 세끼 먹는 집은 드물었다. 만주와 일본에 갔던 동포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는 우리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외가가 있는 청송으로 갔고 아버지와 누나는 안동으로 갔다. 함께 모인 것은 47년 12월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를 네군데 다녔다. 도쿄의 혼마치에서 8개월, 군마켕에서 8개월, 조선에 와서 청송에서 5개월, 그리고 나머지는 안동에서 졸업을 했다. 그것도 잇따라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달씩 몇 년씩 쉬었다가 다니는 바람에 1956년 3월에야 겨우 졸업을 했다.
아버지의 소작농사만으로는 월사금을 못내어 어머니가 행상을 하셨다. 한달에 여섯 번씩 가시는데 장날 갔다가 다음 장날 돌아왔다. 그러니 자연히 밥짓는 일은 내가 맡아야 했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설거지하고 학교 가자면 바쁘게 달려가야 했다. 그때 열살 때부터 밥을 짓는 것을 배웠으니 훗날 혼자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나무장수였고 다음이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그리고점원노릇.
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 살때부터였다. 처음엔 숨이 차고 몹시 피곤했지만 그런대로 두해를 더 버티다가 결숫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나 말고도 10여명이나 되었다. 식모살이갔던 성애와 철도기관사 조수로 일하던 태호, 산판에서 일하던 청수, 기덕이, 옥이, 성란이. 우리는 이따금 나오는 항생제를 배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약이 필요한 만큼 공급되지 않아서였다.
하나 둘씩 차례로 죽어갔다. 열일곱살의 기덕이는 빨간 피를 토하다 죽고, 열다섯살의 옥이는 주일학교 동무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 죽고 마지막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갔다. 병을 앓는 나도 고통스럽지만 식구들의 고통은 더 심했을 게다. 어머니는 내가 아니었으면 좀더 오래 사셨을 텐데 자식 병구완하시느라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사산(死産)하시고 셋째는 열일곱살 때 잃고, 둘째와 넷째는 해방 이듬해 헤어진 뒤 결국 다시 만나보지 못하셨다. 그런 어머니는 1964년 가을에 세상을 뜨셨다. 몸져 누우시기 전날까지 병든 자식 걱정하며, 헤어진 자식 기다리며 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나는 세상이 싫어졌다. 그래서 이 무렵 나는 동생을 결혼시켜야 하니 어디 좀 나갔다 오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무작정 집을 나왔다.
1965년 4월에 나갔다가 8월에 돌아왔다. 그때 대구에서는 이윤복군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영화화되어 거리마다 극장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나는 대구에서 김천으로, 상주로, 점촌, 문경, 예천으로 3개월을 떠돌아다녔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걸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병 한가지를 더 얻었다. 그때부터 앓기 시작한 부고환결핵으로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열이 올랐다. 산길에 쓰러져 누워있다보면 누군가가 지나다 보고 간첩으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서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한평생 당신들의 집이없었다. 가엾은 분들이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지면 창호지문에 빗발이 쳐서 구멍이 뚫리고 개구리들이 그 구멍으로 뛰어들어와 꽥꽥 울었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집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심성이 착해서 좋다. 이름을 '뺑덕이' 라 지었더니 아이들이 왜 하필이면 뺑덕이라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미가 훨씬 인간적인 가엾은여인이어서 좋기 때문이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 살다가 지금은 이곳 산밑에 그 문간방과 비슷한 흙담집에서 산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굶주림,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앞서간다는 선진국은 한층 더 심하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살인을 한 대가로 얻은 풍요를 누리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일 따름이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선진과 후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분단도 하루속히 무너뜨려야 한다. 경제적 후진만으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가봤는가요?"
"예, 못가봤습니다."
"그럼, 연애도 못해밨나요?"
"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