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그 겨울의 다람쥐/ 김계반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09:47

그 겨울의 다람쥐/ 김계반


쳇바퀴 돌릴 때의 다람쥐

그 불난 듯 파닥거리는 물레질에

한 성깔 하겠구나, 짐작이사 했습니다만


겨울 어느 아침

신발 신으려던 산골 소녀

기겁할 뻔했지요

모르긴 해도

댓돌에 머릴 박고 일을 낸 듯한

다람쥐 일가의 주검 때문이었지요


지난 가을

뒷산 도토리 줍다가 다람쥐 굴에서

말가웃이나 되는 도토리 횡재에, 산골 소녀

입 벙글었던

그 해의 일이었습니다

           - 『대숲에 들면』 수록


* 뉴질랜드 이민 가족(모녀)과 이들을 뒷바라지하던 기러기 아빠가 생활고로 인해 차례로 세상을 버렸다는 쓸쓸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봤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갑자기 닥친 가난을 너무 크게, 너무 비극적으로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조금 더 견디면 상황이 바뀌기도 하고,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고, 이전에 무겁게만 느껴지던 사실이 가볍게 인식되기도 하겠지만 항상 그 순간이 문제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가족의 죽음을 개인의 책임으로 내모는 것도 석연치 않다. 피의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사회의 공기에 막연하나마 혐의를 두고 싶다. 

  위 시의 산골 소녀는 본의 아니게 다람쥐 일가의 죽음을 야기한 피의자가 되었다. 소녀는 그냥 운수 좋게 도토리 한 무더기를 챙겼을 뿐이다. 살림에 그다지 보탬이 될 것 같지 않은 작은 횡재를 만난 것이다. 그렇지만 다람쥐 일가에겐 겨울나기를 위해 꼭 필요한 양식이었다. 땀 흘려 일하고 그만큼의 대가나 휴식을 기대하는 게 보통 사람의 성정인데 다람쥐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노동의 대가를 누가 깡그리 앗아간다면 그 쓰라림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참아야겠지만 다람쥐 일가는 ‘한 성깔’ 덕에 자폭해버렸다.

  도토리를 채어 간 소녀는 다람쥐 일가의 죽음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이다. 이번 사건이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시를 쓴 시인의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사소한 행위가 남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상기하고, 상처 입은 약자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

  다람쥐 일가의 죽음이나, 이민자 가족의 죽음이나 죽은 자만 탓하는 건 가장 몹쓸 짓이다. 죽음에 대한 연민을 지나서 자신과 주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결국, 죽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