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이국(攝耳國)/ 나병춘
섭이국(攝耳國)/ 나병춘
해남 땅끝마을에서 통통배를 타고
보길도를 거쳐 남동으로 남동으로 삼백 리쯤 가다 보면
큰 말 귀때기를 닮은 섭이국이 있다네
그곳에서 자라난 나무들은 모두 다
짐승의 귀때기를 닮았는데
호랑이 자사 염소 살쾡이 고라니 여우뿐만 아니라
저 호주에 사는 코알라 캥거루 귀때기를 닮은
코알라 캥거루 나무도 있다네
그 섬 한가운데는 토란 밭이 있는데
그 잎사귀들은 모두 한결같이
코끼리나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면서
새벽을 알리고 저녁을 알린다네
이 소리에 하루 종일 배를 몰고 나갔던 어부들이
포구로 돌아오는데
배에는 온갖 색깔과 모양의 짐승 귀를 닮은 물고기들이
번쩍번쩍 파도소리를 내면서 춤을 춘다네
어부들은 그 물고기들과 풍어제 축제를 벌이는데
그들의 귀 또한 어찌나 큰지
그 귀에 술을 따라 마시고
떡과 약밥을 귀 바퀴에다 덜어먹고
밤새도록 노닐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내도 아이들도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데
토란잎 귀로 된 파도 이불 속에서 꿈을 꾼다네
섭이국에는
하늘의 소식들이 하도나 잘 들려와
싸울 일도 다툴 일도 하나 없이
모두 다 신선처럼 토란잎 연잎 파도소리로 노래하며 춤추며
수평선 그늘 아래 아득한 눈의 나라 꿈을 꾼다네
*攝耳國 : 산해경에 나오는 귀가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이름
- 『 어린왕자의 기억들』 수록
- 낯선 곳에 대한 모험심으로 인해 먼 바다로 나서기를 좋아했던 신드바드나 걸리버도 귀 큰 나라에 들렀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시적 화자는 풍랑을 만나서 난파당하는 일도 겪지 않고 귀 큰 나라, 섭이국에 무사 안착하는 행운을 지녔다. 어린 왕자의 후예답다.
그 나라는 귀 큰 나무와 귀 큰 사람이 한데 어울려 짐승처럼 순하게 살아가는 나라처럼 보인다. 귀 큰 사람이 생계를 위해 잡는 물고기도 귀가 크니 온통 귀 큰 존재만 살판나는 세상이다.
큰 귀는 야외에서 밥과 술을 푸거나 보관하는 데도 쓰이고, 잠자리에서 이불 대신에 쓰이기도 한다. 나머지 쓰임새도 하나 둘 떠오르긴 하나 여기서는 밝히지 않겠다. 어쨌든 상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섭이국의 또 다른 특징은 하늘의 말씀이 그대로 내려와 “싸울 일도 다툴 일도 하나 없이” 평화롭다는 것인데 이는 귀 큰 종족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언제부터 귀가 커졌는지 모르겠지만, 하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열심히 썼기 때문에 용불용설에 따라 귀가 커진 것이 아닐까. 상대방의 이야기도 하늘처럼 여기며 서로 열중해서 듣다 보니 나무도 물고기도 어느새 귀가 쑥쑥 커졌다. 반면에 현대인은 귀가 점점 작아지고 있을 게 틀림없다. 자기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입으로 주절대는 데 익숙하고 상대의 말을 듣는 데엔 인색하기 때문이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이 나라 사람들도 자신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고 시인은 덧붙였다. 존재하는 한, 꿈꾸게 된다는 명제는 언제든 어디서든 유효하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