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함민복
호박 / 함민복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했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 장 찍어 본 적 없어
호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물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자, 出世다
- 『말랑말랑한 힘』수록
- 대구에 제법 알려진 진골목 식당에 가면 펑퍼짐한 엉덩이를 연상케 하는 호박이 벽 한 면을 꽉 채우고 앉아 있다. 비 오는 날, 호박전을 시켜서 막걸리 안주로 하면 좋을 것이다. 손님 자리까지 줄여가면서 호박을 떡하니 내놓은 것은 상술이기도 하겠지만 호박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주인의 속내도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호박은 참하게 생겼다. 넉넉한 모양새에 훤한 때깔이 아주 사랑스럽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따습고 든든한 느낌이다.
위 시의 화자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비가 와서 일을 못 나가는 날, 혼자 집을 보고 있자니 적당히 편안하면서도 꽤나 외로웠겠다. 이때 뒤에서 같이 엉덩이 대고 있는 호박이 눈에 들어온다. 옆집에서 슬쩍 밀어준 것이든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것이든 인연이 있는 사이어서 그 친밀함이 더했을 것이다. 호박이 가족이라도 되는 양 가까이 품고 잠깐 졸았을지 모른다. 가족사진 한 장 갖지 못한 화자는 가족이 살갑게 북적북적하는 행복한 꿈을 꿨다. 아마 호박에 든 씨앗이 그런 꿈을 꾸게 했을 것이다.
올봄에 씨를 퍼뜨려야 저들끼리 살집을 키워서 밭이든 밥상머리든 어디든 둘러앉을 가족이 생기는 거다. 제대로 썩은 다음 다시 환하게 빚어지는 생명은 본능이고 자연이다. 호박이 출세한다. 세상으로 나가니 곧 ‘출세’요, 혼자 나가서 더불어 오는 것이니 또 ‘출세’인 셈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