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식(1934- 1970 , 충남 논산)
김관식(1934-1970 , 충남 논산)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강경상고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최남선의 수제자가 되고, 서정주의 동서가 되었던 그는, 어려서는 천재로서 이웃에 이름을 떨쳤고 성년이 되어서는 시와 술과 병고와 기이한 행적으로 천재 못지 않은 화제를 뿌렸다. 그가 가는 곳엔 화제가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느릿느릿 강경 사투리로 "이놈들아! 이놈들아!" 하고 소리치면서, 거리를 휘젓고 다니다가, 다방에 들어가 문단 선배들의 얼굴을 대할라치면, 그가 노대가인 박종화이든 김동리,황순원,조연현이든 박 군, 김 군, 황 군, 조 군으로 불렀다. "동리 군, 자네 내 술값 좀 대게." "조 군, 자네는 왜 그리 비비 꼬였나." 그러면 그들은 고개를 돌려 못 들은 체하든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를 떠 버렸다.
어느날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인 장기영이 축사를 하고 있는 출판 기념회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나타났다. 그는 곧장 장기영 곁으로 나아가 "에또, 자네는 그만 하고… 내가 말을 좀 해야겠네." 하고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의 동서이자 존경하는 선배인 서정주가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모임에서도 김관식은 "의장!" 하고 일어서서 횡설수설, 회의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서정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동서 하나 둔 것이 이래서, 여러분 미안하오." 하고 민망해했다.
이 같은 김관식의 삶의 행태는 문인 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육다 최남선의 주선으로 육당주의장인 김도태가 교장으로 있는 서울 상고에 국어선생으로 들어간 그는 자기 의자 뒤에 '如蓮華不着手'라고 [법화경]의 한 구절을 하얀 페인트로 써 놓고는 교장도 교감도 선생들도 보이지 않는 듯 유아독존격으로 지냈다. 그는 일단의 학생들을 이끌고 술추렴을 다녔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김관식을 어느 날 아침, 김도태가 교장이 불렀다. 김관식을 술냄새를 지우기 위해 은단을 마구 씹고 교장실로 갔다.
"김 선생?"
"넷네에."
"나는 술 냄새를 좋아합니다."
"…."
"나는 은단 냄새도 좋아합니다."
"…."
"그러나 술 냄새와 은단 냄새가 섞인 냄새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관식은 그만 황소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교장선생님! 대김관식의 대실책입니다. 앞으로는 은단 같은 것은 결단코 먹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의 그같은 은근한 사랑과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김관식은 그 직장을 머잖아 그만두게 된다. 스승으로서는 너무나 파천황격인 그의 행적에 동료 교사들과 학부형들이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학교를 그만둔 뒤 그는 상한 자존심을 보강이라도 하려는 듯 4.19 직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시 민주당 신파의 우두머리인 장면과 용산구에서 대결하게 되고, 그 결과로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인 과수원을 몽땅 날려 버리게 된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에게는 술과 시만이 남게 된다.
그 무렵 김관식은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지게꾼의 지게를 타고 "이놈들아! 이놈들아!" 소리치면서 비탈길을 올라갔다. 그날도 지게 위에서 "이놈들아! 이놈들아!" 외치면서 가고 있는데, 문득 꿈결처럼 무한한 어둠 속에 펼쳐진 대지가 보였다. 그가 살고 있는 홍은동 일대의 국유지였다. 그는 그곳에 집을 지을 꿈을 꾸었다.
한 채, 두 채가 아니었다. 열 채, 스무 채, 백 채, 2백 채… 집을 지어서 김관식 마을을 건설할 생각이었다. 다음 날로 그는 토수와 목수를 불렀다. 경찰이 달려와 부수면 다시 짓고 부수면 다시 짓고 하여, 드디어 그는 지친 경찰관들을 무찌르고 무허가 판잣집이기는 하지만 10여 채의 그의 마을을 건설했다. 이규헌, 황명걸, 백시걸, 조태일 등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장독대도 만들고 담장도 세웠다. 바깥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것없고 누추한 것이나, 진실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마을이 김관식의 비상식적인 행위 속에서 홍은동 언덕배기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