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1941- , 서울 홍제동)
김광규(1941- , 서울 홍제동)
아래는 김성오의 글입니다.
[김광규 시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표현하자면, 가뭄이나 홍수의 흔적이나, 해일의 흔적이라든가 폭풍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인도 자신은 지극히 평범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이 걸어온 길과 남긴 업적들 그리고 지금까지 펴낸 일곱 권의 시집의 내용을 살펴보면 보이지 않게 온갖 풍파에 시달려 왔음을 알 수 있다. 그 하나의 예로 4·19며 5·16, 5·18 등을 한 지식인으로 거쳐왔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시들이 시집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매미가 없는 여름>, <가을 하늘>, <물신 소곡>, <아니다 그렇지 않다>, <1981년 겨울> 등등이 다 그런 시들이다.
김광규 시인은 1941년 1월 7일 일제말기의 경성부 통인정 74번지(현 종로구 통인동 74번지)에서 엄격한 유교 집안의 후손인 김형찬(金炯璨)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시인이 처음 글을 쓴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인 듯싶다. 느닷없이 교무실로 불려간 몇몇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문예작품 제출 공문이 내려왔으니 뒷동산에 올라가 작문을 하나씩 써서 내라는 통에, 어떨결에 글을 써 본 것이 시인의 기억에 남아 있다. 시인이 글에 눈을 뜨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3학년, 당시 작문 교사였던 조병화 시인과 김광식 선생을 만난 때인 것 같다. 이전까지에는 글이란 특별한 것을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던 시인은 비로소 이 세상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시인의 집에 세들어 살던 여순경이 국화 화분을 깨뜨린 평범한 이야기를 쓴 <국화와 여순경>, 시골에서 기르던 묏새와의 추억을 쓴 <묏새의 추억> 등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널리 읽혀지던 《학원》지에 실렸는가 하면, 학교신문에 고무신을 소재로 한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시인은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이 집 저 집을 몰려다니며 이른 바 문예수업을 했던 모양이다. 《여명》이라는 등사판 문집을 만들 정도였다 하니 열의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신문과 교지를 만드느라 학교 수업도 빼먹고 출판사와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다른 학교 문예반 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때 어울렸던 친구들이 지금 현역 문인으로 다수 활동하고 있다.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다. 이전까지는 주로 산문을 써왔는데, 문예작품 낭독회 같은 학교 행사에 출품하기는 산문보다는 시가 적절했고, 시가 아무래도 산문보다 한 수 위인 것만 같은 엉뚱한 생각이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시인은 그의 산문에 적고 있다. 그 무렵, 하이틴의 연정을 노래한 <한시에>가 서울 고등학교에서 주는 경희문학상을 받았고, <청자 앞에서>라는 시는 전국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신문예》 문학 작품 공모에 당선작으로 뽑혔다. 그때부터 시인은 조숙하게도 《현대문학》이나 《사상계》를 읽었으며, 고전음악을 들으며 음악실에 앉아 인생과 문학을 논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자신을 시인은, 문학적 허영심을 과시한 건방진 청소년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에 시인은 진학하게 된다. 본격적인 시인의 문학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곳에서 시인은 이청준, 김주연, 염무웅, 박태순, 정규웅, 홍기창, 김현, 김치수, 김승옥 등의 문학 분야의 인재들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연이은 4·19와 5·16으로 인해 시인의 대학 1∼2학년은 만신창이가 된다. 3학년이 되어 시인이 독문학의 원시림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 동료들은 하나 둘 신춘문예와 문예지로 등단을 하고 더러는 동인지를 만들어 문단에 나가 문필 활동을 한다. 그러나 시인은 독문학의 일가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우리 글을 쓰기보다는 세계문학과 독일문학에 전념하며 대학 후반기를 보낸다.
“독립된 인간으로 사회에 발을 딛고 서서 문학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수신제가 후에 치국평천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의 나에게는 시인이나 작가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은 전혀 없었다. 시민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직업과 문학이란 카프카의 생애가 보여주듯 원래 양립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어차피 삶이란 현실과 이상의 긴장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마련이었다”─산문 〈배울 수 없는, 그리고 끝낼 수 없는 편력〉 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시인은 군대에 들어간다. 사병으로 들어가 대한민국의 남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평범한 경력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의는 군대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병영의 체험들을 쓴 글들을 신춘문예에 몇 차례 투고했다. 그때마다 예심을 통과하는데 그치곤 했는데 그 결과, 고등학교 시절의 시인의 문예 경력이 주는 우월감이나, 대학에서의 동료들이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내가 글을 안 써서 그렇지 쓰기만 하면… ’ 하던 자신감이 허물어지며, 자신의 문학에 대하여 반성하는 기회로 삼는다. 기실 문학을 하는 이가 자신의 글에 대하여 객관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문학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를 올곧게 쓰는 이는 누구나 자신의 시에 대해 객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이란 예를 들자면, 높은 산을 오르다 보면 눈 앞에 있는 봉우리가 정상인 듯 싶지만 기를 쓰고 올라 보면 한 작은 고개에 지나지 않음을 금방 알게 된다. 그리고 앞에는 그보다 더 높고 험한 봉우리가 턱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의 봉우리는 한둘이 아니어서 마침내 지치고 탈진해서 ‘이제 안 속는다’ 정작 정상까지도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런 경우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객관화의 과정이 아닐는지… 막연하고 우매한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시인은 제대 후 정혜영(鄭蕙英) 씨와 결혼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아울러 중앙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등 직업 생활을 하며 딸 진혜(鎭蕙)와 아들 진우(鎭雨)를 낳는다. 당시를 회고한 시인의 다음과 같은 산문이 있다.
“삶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달콤한 위안이 아니라 쓰디쓴 환멸 같은 것이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수신제가를 하기에 앞서 치국평천하하는 능력 있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도 이때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나다. 나답게 살자’는 결단을 내리고 제대 후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아무런 미래의 비젼도 없이 직장과 대학원과 가정의 세 군데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30대 초년으로 접어들었다. 직장을 세 번 바꾸고, 결혼하여 남매를 낳고, 집을 장만하고, 석사과정을 끝냈을 때, 직업과 문학, 현실과 이상 사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독일 유학생 선발시험을 본 것이 겨우 나의 진로를 가다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 문학이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총체적인 조감이 부족했던 나에게 독일 문학은 하나의 모형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독일이라는 특정한 역사와 사회 속에 이룩된 특수한 민족 문학인 동시에 일반적인 세계문학의 한 부분이었다. 독일 문학이든 한국 문학이든 그 본질이나 발전 과정을 크게 보면 좌우를 왕래하는 진자운동 같은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삶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오래된 진리지만 그것을 자기가 직접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산문 〈배울 수 없는, 그리고 끝낼 수 없는 편력〉 중에서
독일로 향한 김광규 시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의와 인간으로서의 용기를 엿볼 수 있다. 가부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견 교사로서의 안정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인은 오직 향학의 일념으로 홀연히 타국으로 가 손수 장을 보고, 밥을 짓고, 빨래도 하고, 새로 배우는 입장이 되어 20대 안팎의 학생들과 교통해야 했다. 그때의 심사를 시인은 후에 이렇게 술회했다.
“새로운 출발이란 곧 떠나가는 것이고, 그것은 낯익은 사람들과의 이별이며 익숙한 삶과의 헤어짐이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모든 사물과 친숙해지는 순응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변의 사물과 친숙해지고 주위의 상황에 순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편안해지고 때로는 자신감까지도 맛본다. 그러나 여기서 오래 머물게 되면 그것은 지속이 아니라 정체이며 퇴보다.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부정하고, 거기에서 탈출하여 변화를 시도할 때 삶은 그 역동성을 견지하고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진실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오기 위하여 우리는 거듭 헤어지고 떠나야 한다.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새로운 곳에 도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산문 〈되돌아오기 위한 출발〉 중에서
바이에른의 알프스 지역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촌에서 시작된 시인의 독일 생활은 고독과 향수의 연속이었다. 시인의 외톨이 성격은 그것의 깊이를 더해 감상적이고 추상적인 고독이나 향수라는 말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었다고 하니, 그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겠다. 시인은 그런 생활을 하면서 많은 단어들을 새롭게 배웠다. 물론 독일어 단어들만이 아니라 한글 단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어의 올바른 의미를 시인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체험으로 얻어낸 듯 싶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인의 시작법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사물을 명명한 것이 바로 언어라는 가장 기초적 상식을 떠나 언어 자체에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무의미한 짓을 해 왔음을 깨달았다.” “문학이나 예술의 모든 장르가 그렇듯 시도 한마디로 규정될 수 있는 완성된 이상형을 가질 수는 없다. 시는 결코 아름다운 꽃만도 아니고, 이미지의 세련된 나열만도 아니고, 사라진 민요의 부활만도 아니며, 현실 개혁의 구호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중의 어느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이것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는 시인의 말은 시를 쓰는 나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내 생애의 30대 후반기를 저 기적 소리가 항상 되돌아보게 만든다”시인의 부산에서의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말이다. 시인이 1974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부산대학교였다. 이곳에서 시인은 6년 동안 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는데, 3대가 함께 살았던 서울의 가정 형편으로 인해 시인은 부득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기형의 출퇴근을 하게 된다. 일주일 중에 평일 나흘이나 닷새는 부산에서, 주말은 서울에서 보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시인은 여관이나 하숙방을 전전하는 신세로, 요즈음 흔히 말하는 주말 부부인 셈이었다. 그런 사정을 시인은 자신의 ‘역맛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부산에서 시인은 계간지 《문학과 지성》에 <시론>, <유무有無>, <영산靈山>을 75년에 발표하여 문단 데뷔를 한다. 이곳에서 시인은 많은 시를 썼고 여러 편의 저서와 번역서를 썼다. <부산釜山>, <물의 모습1·2>, <물의 소리>, <도다리를 먹으며>, <어린 게의 죽음>, <소야곡小夜曲> 등이 직접 부산에서 씌어진 시들이며 <19세기 독일시>를 비롯하여 200여 편의 근대 및 현대 독일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도 이때였다. 남들이 단란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동안에 시인은 하숙방이나 여관방에서 시를 쓰고 책과 글과 씨름하며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때의 외로움의 흔적이라 여겨지는, 시인의 산문 <나의 삶 나의 생각>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누군가 이 종이조각을 발견하고 거기에 씌어진 절박한 SOS를 수신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다. 1975년부터 나는 아직도 내가 물에 떠 있음을 알리는 단편적 메시지들을 시라는 이름으로 발신하기 시작했다. 많은 익명의 독자들이 나의 젖은 종이조각들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태평양과 대서양 건너에서도 나의 발신에 대한 응답이 왔다. 삶의 바다에서 자맥질하며 내가 이렇게 한 손으로 시를 쓴다면, 또 한 손으로는 내 몸을 지탱하기 위해 부지런히 물갈퀴질을 하면서 독일 문학 텍스트를 읽고 젊은이들을 가르친다.”
첫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펴낸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런데 이 첫시집은 인쇄일과 실재의 발행일은 몇 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사정인 즉, 인쇄일인 1979년 10월 20일은 박정희대통령의 유고일인 10월 26일의 일주일 전이다. 이 10·26 사태로 인해 인쇄와 제본이 끝난 상태의 시집이 검열에 걸려 나오지 못한 것이다. 당시의 서슬 푸른 계엄 하에서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어 시인은 술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다행히 몇 개월 후 우여곡절 끝에 검역필 도장을 맡아서 시집은 햇빛을 본다. 그러한 시인의 첫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은 지금까지 꾸준히 20판을 찍었다. 별똥별처럼 반짝했다가 사라지고 마는 대다수의 베스트 셀러에 비해 비록 희미하지만 영원히 빛나는 무릇 작은 별 같은, 명실공히 스태디 셀러인 것이다.
어쨌든 부산에서의 6년 동안, 그 어려운 생활을 충실히 이겨낸 결과, 시인이 이룬 문학적 성과도 성과려니와 제자들 중에는 부산 일대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사람들과, 문학 언론 출판 사업 등 각계의 중견으로 활약하는 사람들, 또 대학 교수가 된 사람들도 있다. 이렇듯 시인이 한양대학교 독문과로 직장을 옮기기까지의 부산에서 보낸 30대 후반의 6년은 외롭고 힘들었던 만큼 실로 보람찬 날들이었다. 시인이 부산을 들어 자신의 30대의 고향이라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양대로 직장을 옮긴 이후 지금까지 시인은 독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사이 제1회 녹원문학상과, 제5회 오늘의작가상, 제4회 김수영문학상, 그리고 제4회 편운(片雲)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 샌프란시스코 세계작가회의에 참석 작품을 낭송했으며, 1991년에는 독일 지겐 대학에 객원교수로 있었으며, 지겐에서 작품 낭독회를 가졌고, 1992년에는 동경 개최 한일작가회의에 참석했고, 베를린 문학교류회(LCB) 초청 (한국문학의 주간)에 참가했고, 1993년 서울 개최 (독일문학의 주간)에 참가, 1994년 본·베를린 개최 (한국작가초청 작품 발표회)에 참가했다.
시인이 펴낸 시집으로는 1979년 첫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1983년 두번째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 1986년 세번째 시집 《크낙산의 마음》, 1988년 네번째 시집 《좀팽이처럼》, 1990년 다섯번째 시집 《아니리》, 1994년 여섯번째 시집 《물길》, 1998년 일곱번째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이 있다. 그리고 시선집으로 1981년 《반달곰에게》, 1991년 《대장간의 유혹》, 1995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있으며 역서로서 《미라보 다리 밑에 세느강은 흐르고》, 《귄터 아이히 연구》, 《19세기 독일시》, 《카프카》, 《현대문학의 이해》 등 다수가 있다.
한식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사진기자와 윤기자는 사무실로 향하고 김광규 시인과 나는 할 얘기들이 많았으므로 시인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일대의 단수 관계로 시인과 나는 근처의 호텔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내심 시인의 집을 스케치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좋았었는데, 이렇게 해서 그 기대는 무너졌다.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동네는 처음에 이사왔을 때의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변했다. 마을 이름이 홍제원(弘濟院)이었던 옛날에는 근처에 화장터가 있었고 마을 곁을 흐르는 홍제천은 맑아서 토종 물고기들이 많았다. 홍제천은 맑고 깨끗해서 몸이 더럽혀진 여인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그 욕이 씻어진다는 일설이 있어서, 먼 길을 상처 입은 여인네들이 걸어오곤 했던 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한 구석도 그 옛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산과 계곡을 모두 연립주택이며 아파트들이 차지해 버린 것이다. 나무들이 베어져 나가고, 무참히 산이 깎이고, 여기저기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들어서서 시야를 막고, 그런 광경을 시인은 안타깝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시인의 어느 날의 일기에는, 결혼기념일날 아침에 아들 진우군이 마당에서 족제비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는 내용과 함께, 진혜와 진우가 엄마 아빠를 위해 선물한 내의와 구두표와 케익보다도 족제비의 출현이 더 커다란 위안이었다고 적혀 있다. 시인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 내용이다. 다행히도 풍치 지구라는 개발이 금지되어 있는 제도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시인의 표정에는 사라져 버린 자연에 대한 아쉬움이 역력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작문을 시작하여 중·고등학교의 화려한 문학소년 시절을 지나 대학에 진학, 도전의 독일 유학, 그리고 교수로 이어지는 시인의 인생 항로에 ‘키’역할을 해온 시, 그 시는 독자적인 시의 일가를 이루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묵묵히 주어진 길을 오직 외길로 걸어온 시인은, 치국평천하의 올바른 의미를 알았기에 수신제가에 열중하느라 서른 다섯 나이에 데뷔하였다. 함께 문학에 열을 올렸던 또래들에 비해 턱없이 늦은 데뷔이기는 하나 기반과 기초가 튼튼하다는 측면에서 늦깎이란 항상 안정된 내실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산문에서 읽어지듯이 시인은 평범한 한국인의 경력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쌓아 왔다. 더불어 한 문인으로서의 경력 역시도 위 내용에서 보았듯이 눈부시고, 시에 관한 내용 역시 옹골차다. 시인의 산문과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시인이 남몰래 느꼈을 고독과 외로움의 흔적들을 도처에서 발견했다. “삶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달콤한 위안이 아니라 쓰디쓴 환멸 같은 것이었다”라든지 “누구나 20대 후반부터는 이처럼 숨막히게 발버둥치며 살게 마련일 것이다. 인생은 흔히 고해(苦海)라고 하지 않는가. 이 고통의 바다에 그대로 빠져 죽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지를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나무토막이라도 한 개 붙들 수 있다면, 암초 위에라도 잠깐 발끝을 대고 쉴 수 있다면 하는 심정은 그때부터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익사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내 손에 잡힌 것은 연필과 종이다.” 등과 이 글에 인용한 시인의 산문 속에도 그런 대목들은 많이 있다.
시인의 산문이 개인의 외로움과 고독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시인의 시는 사회의 고독과 외로움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예컨대 존재의 외로움이 물씬 풍기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중략…)//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 지를 ─〈도다리를 먹으며〉
이 시는 시인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출퇴근을 할 때 씌어진 시다. 시인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갈 때 침대칸을 이용하곤 했었는데, 부산에 도착하면 새벽인지라 3시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때 시인이 시간을 메우기 위해 거닐었던 곳이 자갈치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시인은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의 스냅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배경이 자갈치 시장이었을 법한 게를 소재로 쓴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로 갔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어린 게의 죽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 시와 비슷한 상황들이 우리 인간 사이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대권력 하에서 민중의 한 가정, 한 집단이 위 시의 게의 신세가 되어진 상황들이 있었다. 게가 그물에 잡혀 새끼줄에 묶여지는 것은 게가 어떤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부의 생리적인 삶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시적 장치의 하나인 은유나 상징으로 사회에 대입시키면 심각해진다. 어부란 독재권력을 표상하게 되고, 게는 힘없고 나약한 민중의 입장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보면 독재의 권력 횡포에 양식 있는 시민의 가장들이 줄줄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고, 남겨진 아이들은 황폐한 생활에 처해진, 그런 처참한 상황이 한 장의 사진으로 오버랩 된다. 위 시가 씌어진 때는 유신시대 말기였다. 그리고 시인은 4·19를 몸소 체험했다. 데모대의 앞장을 섰다가 경찰 곤봉세레를 받았고, 적선동 근처에서 몇몇 친구들은 경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위 시의 모티프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물었다. “크낙산이 어디에 있는 산이죠?”(크낙산은 시인의 시 여기저기에 나오는 시인만의 산이다.) 시인이 대답한다 “실제 있는 산이 아닙니다.” 내가 말한다. “그래요? 저는 교수님 집 뒷산이나 앞산이거니 했는데요!?” 성민엽씨는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의 해설에서 “김광규의 크낙산은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표상 한다”고 하면서 크낙산은 빨리 달려갈 수록 멀어지는 곳이며 오히려 “덤불로 뻗어 기어가”야 닿을 수 있다고 시인의 시를 인용해서 말했다.
나는 시인이 “아 크낙산이요?---” 시인의 그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무슨 열차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서 무슨 버스를 타고 어데로 가서 얼마쯤 어떻게 걸어가면 바로 그곳에 크낙산이 있다고 말해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김광규 시인의 아내인 정혜영 교수는 99년 시인의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독일어로 번역·출간했다. 이 책은 2년만에 재판을 찍을 정도로 독일 현지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표제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4.19 학생 혁명을 노래한 작품으로 얼핏보아 연애시같지만 사회현실을 노래한 정치시라고 할 수 있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주제나 모티브를 찾아 깊은 내면적 성찰을 거친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중견 문학평론가 성민엽 교수(서울대 중문과)는 김 시인의 시세계를 '단순한 소리, 깊은 울림'이라고 평한바 있다.
남편의 작품을 번역하게된 동기에 대해 정 교수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수십년 동안 함께 살아온 김광규 시인의 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작품이 해외에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번역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광규 시인이 자신의 문학관을 밝힌 내용의 일부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숫자와 결부된다.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생년월일이 결정되고, 뒤따라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된다.
주소의 번지와 우편번호, 아파트 동 수와 호 수, 학교에 가면 학번, 군대에 가면 군번, 외국에 나가면 여권번호, 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 은행구좌번호와 신용카드번호, 각종 비밀번호와 자동차 등록번호, 전산 입력 번호와 납세자 번호….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과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봉 얼마라는 액수에 얽매여 노예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흘러가면 다시 못 올 시간을 이처럼 숫자놀이로 소진하는 인생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아이덴티티와 화폐와 시간이 모두 숫자로 표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숫자의 교육이 문자의 습득보다 앞서야 한다고 흔히 믿는다.
그러나 내 자신은 목적으로서의 자본 축적을 이해할 수 없고, 시간을 돈과 함께 계량적으로만 파악하는 경영 마인드에 동의할 수 없다. 숫자의 정확성보다 문자의 상징성에 이끌리는 것은 문학인의 숙명적 체질인 것 같다.
그러나 문자를 도구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소설을 써서 전업작가로 입신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시를 써서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같은 동양의 고전 시성으로부터, 서양의 현대시인 T. S. 엘리엇이나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대개 시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했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생업을 찾기 위해서 많은 방황을 했다.
만 36개월의 군 복무를 끝낸 후 곧장 생업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한때는 외환 금융업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당시의 경제 상황으로 보아 대우가 좋고 선망받는 직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업무가 숫자와 돈으로 귀결되는 일을 나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직으로 직장을 옮겨, 대학원 과정을 끝낸 뒤 장학금을 얻어서 독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후 삼십여 년을 독문학도로 생활하며 시를 써왔다.
생업과 시업이 똑같이 문학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 것은 남들이 보기에 부러울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삶의 진폭이 좁아진 느낌도 든다.
하지만 문자보다 숫자가 중요한 분야를 감내하지 못한 체질로 보건대, 이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나 자신의 숙명이기도 하다. 어차피 인생은 단선의 궤적을 그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