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1905-1977, 함북 경성)
김광섭(1905-1977, 함북 경성)
김광섭(호는 이산)은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났다. 1924년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귀국하여 모교인 중동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하면서 1933년, <극예술 연구회>에 참여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분을 갖는다. 이때부터 신문, 잡지에 시와 평론을 발표했고 1938년에 첫시집 {동경}을 냈다.
1941년에는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고취한다고 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 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민족 진영의 문인들과 <중앙 문화 협회>를 결성했다. 1946년 식구들과 함께 경성을 떠나 서울 운니동으로 이사온 김광섭은 이후 산림동, 주교동, 동소문동, 돈암동, 성북동, 미아동, 중화동 등 서울의 중심지와 변두리를 전전하며 굴곡진 서울에서의 삶을 보낸다. 미군정청 공무국장, 초대대통령 공보비서관, 대한신문 사장, 경희대교수 등 화려한 사회활동과는 달리 온전한 거처를 확보하지 못한채 서울 곳곳을 거쳐간 김광섭의 자취는 그가 떠난 지 20년이 된 오늘에는 거의 찾을 길이 없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의 34. 60년대 5년여 동안 살았던 이곳은 김광섭이 거쳐간 많은 주소지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2남2녀를 둔 김광섭은 커가는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말년생활을 위해 1961년 성북동 산기슭에 집터를 사들이고 새집을 올린다. 당대의 유명건축가 김중업의 설계에 따라 3m가량의 축대를 쌓고 60여평의 대지에 지은 2층 기와집은 지금도 단아한 건축미를 간직하고 있다.
1964년 「자유문학」지가 재정적 운영난으로 하여 휴간되자, 김광섭은 심적인 타격을 받았다. 다음 해 김광섭은 야구장에서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서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경험을 계기로 인생관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나 <생의 감각>이 모두 이 사건 이후에 창작되었다. 이전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의 시를 즐겨썼는데 이후에는 시어도 일상적인 언어를 많이 쓰게 되었다. 관념적인 지적 추구보다는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사물을 따뜻이 포옹하는 인간애가 나타나고 있다. <怡山과의 대화 중에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란 특수한 것이어서 고요하고 안정되고 사고가 맑아야 된다. 결국 병이 내게 시를 쓰게 한 것이다. 시만 생각한다면 병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될지도 모른다. 이 8년이 시의 진경(進境)을 불러오게 했다."
그의 이런 죽음에의 경험으로 쓰여진 시가 <생의 감각>이라고 알려져 있다.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 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이후 시선집 {겨울날}, 자전 문집 {나의 옥중기}를 냈으며, 1977년 숙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했다.
김영무는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 대해 이렇게 쓴다.
[자연의 파괴로 정들었던 고향을 잃어버린 한 마리 힘없는 평화의 새의 딱한 처지를 담담히 노래하고 있는 이 시에는 어떤 추상적인 관념이나 피상적이고 값싼 철학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면서도 목숨과도 같은 삶의 보금자리를 빼앗긴 비둘기가, 곧 탐욕스런 개발의 발길에 밀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난 민중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다. 또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와 같은 구절은 평범한 듯하면서도 울림의 폭이 넓고 깊이 사무치는 아픔을 새겨주고 있다. 아무리 금방 따낸 것이라고는 하지만 채석장에서 잘라낸 돌에 온기가 있으면 얼마나 온기가 있다고 거기에 그래도 부리를 닦고 있는 무력한 비둘기의 모습은 얼마나 생생한가, 비둘기처럼 착한 평화의 사람들이 돈과 힘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하는 황폐한 현실의 어둠과 폭력이 이웃을 성자처럼 대접할 줄 아는 진짜 인간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순하고 착한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무척 감동적이다.]
김유선은 <김광섭 시인에게>란 시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60년대 초 당신이 살던 성북동에서는/ 비둘기들이 채석장으로 쫓겨 돌부리를 쪼았다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성북동에 비둘기는 없는 걸요/ 채석장도 없어요/ 요즈음은 비둘기를 보려면/ 도심으로 들어와 시청광장쯤에서/ 팝콘을 뿌리지요/ 순식간에 몰려드는 비둘기떼/ 겁없이 손등까지 올라와/ 만져도 도망가지 않고/ 소리쳐도 그냥 얌전히 팝콘을 먹지만/ 나머지 부스러기 하나마저 먹으면/ 올 때처럼 어디론지 사라져버리는/ 비둘기를 만날 수 있어요, 그 때에는/ 눈으로 손으로 애원해도/ 다시 오지 않아요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란 시는 김기환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으로 형상화되기도 하였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과 동일한 제목의 유행가로 만들어져 젊은이들 사이에서 애창되기도 하였다.
1996년 5월 11일, 중동고등학교 교정에 김광섭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에 새겨진 시는 [마음]으로 김광섭 시인의 제1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다음은 <일관성에 관하여>라는 시인의 수필 전문이다.
[내 나이 이제 일흔이니, 이른바 기성 세대다. 아니, 기성 세대에서 구세대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세대는 구세대임으로 겪어야 했던 과거가 있으니, 이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삶을 영위하는데 혹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70을 살고도 한 시간의 생각거리가 못 되는 인생이나마 여기 적는 것은 다만 '참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나는 1905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집안에는 자녀가 드물었기 때문에,나의 조부모께서는 나를 백 날 동안 사람에게도 해에도 달에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들의 방 안에서 무릎에다 놓고 키우셨다 한다.
나는 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나쁜 일이나 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평범한 한 아기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신 그분들께 최소한으로나마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까닭을 생각할 수도 있다. 내(우리 세대)가 다른 사람의 가해를 너무 많이 받았다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 이웃에 서당이 있었다. 나는 거기 놀러 갔다가, 칼을 찬 누런 복색의 일본 헌병을 보았다. 그는 성당 아이들을 내쫓고 그 방을 썼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길에 버티고 서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한 어린이의 감시자가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이미지를 본 것이다.
네 사상의 씨도 그 때 뿌려진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독립군, 의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간밤에 다녀갔다는 귓속 이야기가 들렸다. 소년은 무슨 장한 것을 남몰래 속에 품은 듯이 자랑스러웠다. 그 후, 삼일 운동을 보았다. 이것을 본 것이 나의 인생길의 방향을 고정시켰다. 소년은 이 때부터 이순신이니 김옥균이니 하는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얼마 후, 나는 서울에 가서 중등 교육을 받고 ,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망국민이기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 그 수모는 형언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당시 도쿄는 공산주의의 아성이었다. 나는 우리의 독립에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한동안 그들을 넘겨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조용한 한 인간으로 살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힘이 없어 일제에 항거할 수도 없고, 이 땅의 아들이라 순종할 수도 없는 그 가운데, 미칠 듯이 달려드는 고민과 몸부림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항일 운동에 가담하고 만 것이다. 참으로 뼈저린, 일본의 8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극예술 연구회'에 들어갔다. 나는 물론 연극인이 아니다. 그러나 민족극을 수립해 보고 싶었다. 민족극을 통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참절비절한 현실이었으므로, 이 소극적인 저항마저 쉬운 일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또 한편으로 교편을 잡았다. 영어 교과서는 나의 큰 위안이 되었다. 바이런, 셸리, 키츠, 워즈워스 등의 시가 있었다. 나는 이 시들을 풀이하면서 민족을 이야기하고 자유를 말하고, 그리하여 간접적으로 나마 학생들에게 '한국인임'을 깨우쳐 줄 수가 있었다. 끊임없이 일경에게 불려다니면서도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궁성 요배라는 것도 할 수 없었고,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것도 읽을 수강 없었고, 창씨 개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그들의 형무소에 갇힌 바 되었다. 그 때 나를 담당했던 일인 검사가, 너 같은 자를 내놓는다면 대일본 제국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하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거기서 괴롭고 고독한 3년 8개월의 독방 신세를 졌다. 그 동안에 외국인이 될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은 점점 굳어만 갔다.
감옥에서 나오자 나는 곧 광복을 맞이했다. 비록 병사의 몸으로나마, 제국주의의 시체를 보면서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내가 부른 만세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 본 삼일 만세의 이미지 그대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 이미지를 눈앞에 그리며, 사회 활동도 하고 반공 운동도 벌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공무원 노릇도 했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린 나를 감시하던 그 일본 헌병, 소곤소곤 들리던 독립군 이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 삼일 운동, 이 일들은 모두 나의 어린 가슴 속에 민족사의 한 목표, 내가 향해서 걸어가야 할 목표를 설정해 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지만, 그런대로 이 한 목표를 향하여 일관하게 가는 길이라 별다른 후회가 없다.
오늘날, 세계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잖은 것 같다. 그들은 이 시대를 매우 어려운 때로 보고, 심각한 전환기니 상실의 시대니 하면서 고독해하고, 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난무를 즐긴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는 어느덧 우리 나라에도 상륙하여, 일부청소년들이 이에 쏠리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자기 방치다. 시대를 핑계삼지 말아야 한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들, 목적지가 있어도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 오직 그들만이 시대를 핑계삼아 불순하고 나약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족속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애급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복지를 향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어찌했는가? 좀더 참지 못하고 추악한 난무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4백 년의 노예 생활에서 구제되는 날에도 자기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전철을 되밟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명백한 목표가 있다.안으로는 통일을 이룩하며, 밖으로는 세계의 웅비해야 할 우리들이다. 그것이 또한 제군의 자기 실현이기도하다. 이렇듯 명명백백한 목표가 있는데도 방황해야 할 것인가? 작은 생활 하나하나에도 경건한 태로도 임하여 한 발씩 한 발씩 우리들의 목표에 접근해 가야 할 것이다.
인생, 나는 이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관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방황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남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은 우리의 인생은 이것이 첫째 자기구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