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1435- 1493, 서울)
김시습(1435- 1493, 서울)
김시습은 강릉 김씨인 김일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뿌리는 신라 김알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김시습 당대에는 이렇다할 부도, 권세도 없었다. 증조부인 김윤주(金允柱)가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냈고, 조부는 종6품 무관직인 오위부장(五衛部將)에서 끝났다. 부친은 그나마 제대로 된 관직조차 갖지 못했다.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8개월만에 글자를 터득했고, 세 살 때 맷돌로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다.
無雨雷聲何處動(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이웃에 먼 할아버지뻘 되는 최치운(세종때 이조참판을 지낸 명신)이라는 학자가 그의 재주를 보고 외할아버지에게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논어'의 첫 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다섯 살이 되면서 시를 능히 지어 그 소문이 장안에 자자했다. 당대의 노재상 허조(許稠)를 마주한 자리에서 재상을 가리키며, 老木開花心不老(노목에 꽃이 피었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도다)라고 읊었다. 재상 허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김시습은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주위에서 불리기 시작했고, 세종대왕이 그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데려와 친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세종대왕은 옆에 있는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가리키면서 시를 지으라고 했다. 김시습은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小亭舟宅何人在)"라고 칠언율시로 답하니 세종대왕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이 아이가 커서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크게 기용하겠다고 신하들에게 말하고 김시습을 칭찬하면서 비단 30필을 하사하였다.
세종대왕은 어린아이가 무거운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가 시험해보고자 스스로 가져가라고 하니,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매듭을 묶고 허리에 동여매어 끌면서 밖으로 나가니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 한 살 때인 1455년(단종 3)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고 있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면서 읽고 있는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미친 척 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뜻을 같이 한 아홉 사람과 함께 강원도 금화로 가 바람소리를 벗삼아 방외인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중이 된 그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중의 행색으로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묻어주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다가 때로는 절에 몸을 의지해 불경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송도를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여, 당시에 지은 글을 모아 24세인 1458년(세조 4)에 <탕유관서록>을 엮었는데, 그 글의 끝에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고 적었다.
계속하여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과 오대산,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에 <탕유관동록>을 엮었다.
그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 일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원각사의 낙성회에서 세조에게 바치는 찬시를 쓰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세조 개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노골적인 반감이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그는 방외인의 생활로 이내 돌아갔다.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이 바로 지금의 용장사이다. 절이 폐허가 된 데다 골짜기가 깊어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닿지 않았다. 여기에 매화를 심었다. 그래서 그 집의 당호가 <매월당(梅月堂)>이다. 이곳에서 31살 때부터 37살에 이르는 황금기를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에 남겼다.
그는 노상 술을 퍼마시고 시를 지었다. 화전민의 고통을 노래하기도 하고, 백성들이 수탈에 시달리는 모습을 시에 담아내기도 했다. 간혹 서울에 오면 신숙주, 서거정 같은 고관이자 친구들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오산실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세조와 예종이 연이어 죽고 성종이 왕이 되어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다. 이에 그는 금오산실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여전히 정치에서 밀려난 옛 친구들과 더불어 폭천정사를 지어 기거하였다. 그에게 고관의 권신들은 꺼릴 것이 없었다. 한명회가 한강가에 화려한 압구정을 짓고, 서강가에 별장을 두고 이를 감탄하는 현판들을 걸어놓았다. 어느날 김시습은 한명회 별장의 현판에 쓰여져 있는 시를 바꿔놓았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이러한 한명회의 시에서 ‘扶’자 대신 ‘亡’자를, ‘臥’자 대신 ‘汚’자를 넣어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는 뜻으로 완전히 바꿔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으며 이 시를 읊었다는 일화가 있다.
1481년 47살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아내는 죽고 원하는 아이는 얻지 못했다. 다음 시 한수에서 50세 되던 해 그의 슬픔과 회한 그리고 말년의 불우함을 읽을 수 있다.
나이 오십에도 자식이 없으니(五十已無子)
여생이 진실로 가련하다(餘生眞可憐).
어찌 앞으로의 편안함을 말할 수 있으랴(何須占泰否)
그렇다고 결코 사람과 하늘을 원망해서는 안되지(不必怨人天).
고운 해가 창호지를 훤히 비추니(麗日烘窓紙)
맑은 티끌이 자리에 깔려 있구나(淸塵狐坐氈).
남은 해 동안 원하는 것 없으니(殘年無可願)
먹고 마시는 것 편한 대로 하자꾸나(飮啄任吾便).
이듬해 폐비윤씨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한때 양주군의 수락산 밑에 수락정사를 지어 머물기도 했다. 그가 이곳에 머물 때 술과 지필묵을 가지고 물살이 빠른 곳에 자리를 잡아 종이를 찢어 일백장을 만들어 시를 쓴 뒤 물에 떠내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산에서 이렇게 소일하면서 종이 쪽지가 떨어져야 하산했다.
이후 춘천 청평사, 설악 오세암 등지를 돌아다녔다. 김시습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절 옆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다.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
결국,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나와 무량사에 부도를 만들어 안치하였다. 현재,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선조는 그의 충절을 기려 생육신으로 떠받들게 하고 이이로 하여금 '김시습전'을 짓게 하였다. 이이는〈김시습전>에서 김시습은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방외(方外)에 놀았으나 그의 중심은 언제나 유자(儒者)의 위치에 머물렀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김시습은 단종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방외인 생활을 하면서 냉철하게 현실을 보고 비뚤어진 세상을 비판했다. 또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몸소 노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지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에 뛰어들어 개혁사상을 실천하려 하지 못하고 비켜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소설가 이문구 씨가 <매월당 김시습>이란 소설을 쓰기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