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1941-, 일본 오사까->순천)
김승옥(1941-, 일본 오사까->순천)
김승옥은 너무 젊은 나이에 신화가 돼버린 인물이다. 문학소년들이 까까머리 중·고교 시절 연필심에 침을 묻혀 그의 놀라운 단편소설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그는 서울대 불문과에 재학중이던 1962년 <생명연습>이라는 단편소설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무진기행>(1964)으로 대중적인 명성까지 움켜쥔다.
<무진기행>을 쓰던 무렵을 김승옥은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1964년은 나(김승옥)에게 퍽 우울한 해였다. 그해 2월에 대학을 졸업했어야 하는데 학점 미달로 졸업하지 못하고 한 학기 더 다녀야만 하게 됐었다… 무진기행의 착상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었다. 어느날 고향 거리를 우울하게 걷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객지에서 실패하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지는 것일까? 귀소본능이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데 뭔가 크게 작용하는 요소가 아닐까?'
또 한가지 우연히 얻은 소재는 어느 사사로운 모임에 갔더니 서울에 있는 모 음악대학을 나온 여선생님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유행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문득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을 다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서글픔에 잠시 잠긴 일이 있던 거였다. 당시는 대학을 나와도 취직 자리 하나 변변찮던 암울한 시대였다. 안개가 낀 듯이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대, 6.25전쟁으로 전통적인 재산도 가치도 다 파괴돼 버리고 너나없이 속물이 돼버린, 속물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것 같아 보이지 않던 불투명하던 시대가 바로 1960년대였고 내 젊은 날의 상황이었다.]
김승옥은 내쳐 <서울 1964년 겨울>(1965)로 약관 24살 나이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친구 내외의 단칸방에서 이 소설은 쓰여졌다고 한다.
김승옥, 이청준, 이문구 등에 있어서 60년대의 서울살이는 그것이 곧 그들의 작가적 체험이었다. '왜 나는 서울에서 실패하면 고향을 찾는가?' 하는 회의 속에서 64년 귀향하여 '무진기행'을 썼던 김승옥은 그 이듬해 다시 용기를 내서 서울로 올라와 신촌에 살고 있던 희곡작가 오태석 내외의 단칸방에 끼어 지내면서 그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1964년 겨울'을 써낸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허무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김승옥이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하여 가졌던 느낌 바로 그것일 수도 있었다. 김승옥이 서울의 허무를 되씹으면서 친구 내외의 단칸방에서 '서울 1964년 겨울'을 쓰고 있을 때, 이청준이 '사상계'를 통해 등단하면서 '서울 사수'에 대한 결의를 굳혀가고 있을 때, 박상륭, 이문구 등은 일부러 서울의 구석진 곳만 찾아다니며 싸움하듯 '서울'을 막걸리와 안주처럼 마시고 씹고 했다.
김승옥, 이청준 등이 체험한 60년대 서울살이의 단면들은 이들 60년대 등단한 당시 20대의 젊은 문인들로 하여금 동시대의 동류의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그것이 60년대의 한국문단에 이례적으로 많은 동인그룹을 만들어낸 요소였다고 볼 수도 있다.
김승옥은 김현이 말한 대로 최초의 한글세대 혹은 ‘4·19세대’의 대표작가로 ‘감수성의 혁명’이니 ‘전후문학의 기적’이니 ‘단편소설의 전범’이니 하는 찬사들을 수식어처럼 달고다니던 60년대 문단의 황태자였다. 그러나 이 문단의 젊은 황태자는 60년대 말에 이르러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김승옥이 문단을 떠나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바로 충무로였다.
그가 충무로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직까지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의 대표작 <무진기행>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본인의 각색을 거쳐 각각 <안개>와 <황홀>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는데, 두편 모두에서 여주인공에 해당하는 고향마을 무진의 음악선생 인숙 역을 맡은 배우는 윤정희였다. 특히 전자인 김수용의 <안개>는 안토니오니풍의 세련된 연출로 당시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김승옥은 아예 내친 김에 김동인의 걸작 <감자>를 직접 각색하여 감독으로도 데뷔하는데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나치게 드러낸 탓인지 흥행에서는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김승옥은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을 시작으로, ‘베스트셀러의 영화화’가 크게 유행했던 70년대 내내 최고의 각색자로 명성을 날린다. 김지연의 <내일은 진실>,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조해일의 <겨울여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방황하는 이혼녀를 다룬 <강변부인>은 자신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로는 파격적인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충녀>와 <야행>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승옥은 70년대 최고의 흥행작가였다. 그런데도 그의 70년대를 들여다보면서 문득 서글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주인석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단을 버리고 영화판으로 옮겨간 이유를 묻자 “먹고살아야 했으니까”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나 과연 그뿐일까? 언젠가 김승옥과 함께 그의 고향인 순천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한숨처럼 토해낸 음울한 고백이 있다.
“김지하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잖아. 더이상 문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의 80년대는 더욱 가슴아프다. 박정희가 죽자 이제 다시 문학을 해야지 하며 막 장편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즈음 광주에서의 대학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것이다. 이후 그가 거의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다가 기독교에 귀의해 열렬한 전도사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우리의 야만적이고 비루한 현대사가 한 천재의 재능을 참담하게 짓밟아버린 것이다.
다음은 주인석 기자의 인텨뷰 내용이다. 김승옥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법하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 짧은 지면에 특별히 의미를 두어 기록할 만한 뾰족한 이야기는 없었다. 의미라는 건 어차피 이야기의 틈 속에 애매한 모습으로 숨어있어서, 요약하여 보여주기가 참 힘들다. 그렇다고 그와의 다섯 시간을 일일이 묘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주 무미건조하게 줄이고 줄여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41년 일본 오사까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동경유학생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오사까에 이민와 있던 한의사의 딸이었다. 미군의 폭격이 극성을 부리던 1945년 6월쯤 그의 가족은 피난차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왔다가 종전이 되자 눌러앉는다. 그는 이 때까지 일본말밖에는 몰랐다. 국민학교를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한국말이 잘되지 않았다. 놀림감이 되기 싫어서 아예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순천은 그 당시 커다란 역사적 상처를 받은 곳입니다. 그 와중에 아버님을 잃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영향은 없었는지요? 말을 하지 않고 책 속으로 빠져들게 된 데에는.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김원일씨나 이문열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각별한 것 같은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가끔 들어오셔서 맛있는 것이나 사주는 분으로 알고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가 국민학교 일학년 땐데, 그때가 알고 보니 여순 반란이 끝나갈 무렵이었지요, 그날도 아버지는 불쑥 들어오셔서 내게 용돈을 주고 떠나셨습니다. 그게 내 기억에 남을 만큼 많은 액수였기 때문에 그걸 기억합니다. "
"아버지로 인한 피해의식은 없는지요?"
"없어요. 혼자 당해야 그런 게 있지, 그 당시 그 동네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다 우리 집 같았으니까."
"어려움이 많으셨을 텐데요?"
"전학을 몇 번 다녔지만, 뭐 특별한 탄압은 없었어요. 이승만씨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철저히 기독교적인 지도자였으니까요. "
원수를 사랑했다는 말인가? 그는 그런 식으로 주제를 벗어나가고는 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리고는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한다. 독립운동사와 6. 25와 4. 19와 5. 16,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까지도 그는 기독교적으로 해석해준다. 그는 확신에 차 있다. 그는 괴팍한 작가가 아니라 친절한 전도사 같다.
아무튼, 그는 독서광이 되었고, 그의 집안은 전쟁으로 잠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머니의 사업수완으로 꽤나 소문난 부자가 되었다. 그의 소년기는 유복했다.
"주로 어떤 책을 읽으셨는지요?"
"이광수에서부터 손창섭, 장용학까지. 그리고 일본어 중역이었겠지만 세계문학전집류들. 주로 소설들이었지요. 책방에 있는 건 다 봤어요. 고등학교 때는 현대문학과 사상계를 정기구독했을 정도였지요. 나는 맘대로 책을 빼다보고 어머니가 월말에 계산해주셨으니까 대단히 좋은 독서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지요. "
"선생님의 작품 [무진기행]이 일본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
"나중에 어떤 불란서사람이 [무진기행]과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을 비교하는 논문을 썼다는 말을 듣고서야 [설국]을 읽어보았지요. 비교할 만한 점이 있더군요. "
그는 소설을 많이 읽는다는 것만 빼고는 모범생이었다. 그는 순천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이었고 서울대학교 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하던 해에 4. 19가 터졌고 2학년 때 5. 16이 터졌다. 그리고 그 해에 [생명연습]이라는 단편을 써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소설가가 되리라는 생각은 언제 하셨는지요?"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생명연습]은 군대가기 전에 글솜씨나 한 번 테스트해보자고 한 번 써서 내 본 거였어요. 나는 원래 외교관이 돼서 세상을 돌아다녀보는 게 꿈이었고, 문학은 즐기고 싶었어요. 문학을 좋아했지만 작가가 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요. "
"그렇지만 소설가가 되셨잖습니까?"
"문학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걸 가르쳐준 책이 있었지요. 고등학교 때 읽은 까뮈와 릴케의 에세이였어요. 그리고 모파상의 단편들이 나의 소설기법에 깊은 영향을 주었지요. 아마 4. 19를 겪으면서 생각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나는 세상의 혼돈을 보았고 어떤 질서를 찾고 싶었어요. 그 질서는 전체주의적인 정치지도자가 강요하는 질서가 아니라 지성적인 문학이 질문의 형식으로 던져주는 질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당시 읽었던 소설들이 신구문화사에서 나왔던 전후세계문학전집이었는데 참 문제적이었어요. 소설이 당대의 정신적 폐허와 혼란을 치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
그는 소설을 썼다. 김현, 김치수, 최하림 등과 함께 '산문시대'라는 동인을 구성하기도 했다. [무진기행], [차나 한잔], [건], [역사] 그리고 [서울 1964년 겨울]같은 문학사에 기록될 작품들이 그 때 쏟아져 나왔다. 그는 20대 초반에 문학사적인 작가가 되었고 그의 작품은 이미 문학청년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자신의 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별로 애정이 없어요. 나는 너무 머리로 짜내는 소설을 썼지요. 내 체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소설은 왠지 내 것 같질 않거든요. "
"맘에 드시는 작품은?"
"특히 [무진기행]은 맘에 들지 않아요. 쓸 때부터 그랬지요. 좀 진부했거든요. '산문시대' 동인인 김현과 최하림도 원고를 읽어보더니 이게 무슨 소설이냐, 차라리 찢어버려라, 라고 했고 나도 그런 생각이었어요. 진부한 멜로같았으니까. 그런데 그 작품이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는 건 그 전통적인 구조 때문인 것도 같고. 아무튼 그 당시 같이 글을 쓰던 친구들과 나의 소설에 대한 기대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나 한 잔]이나 [역사]같은 소설에 가까웠어요. 개인적으로 [차나 한 잔]을 가장 좋아합니다. [무진기행]과 동시에 쓴 소설인데 대조적이지요. 낮에는 [차나 한잔]을 밤에는 [무진기행]을 쓰는 식으로 함께 쓴 소설이에요. "
벌써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나는 과감하게 묻는다.
"왜 소설쓰기를 중단하셨습니까? 그것도 한참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셔야 할 시점에서."
아마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할 지점이 여기였으리라.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그 당시 첫 작품집을 냈는데 꽤나 팔려나갔어요. 그런데 그만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면서 인세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야했지요. 그게 아직 어린 내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지요. "
그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기로 하겠다. 불미스러운 일이므로. 어쨌든 우리가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신비화시키지 않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이지 글을 펜에다가 잉크를 묻혀 쓰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난 정말 글쓰는 게 힘들어요. 피로 쓴다면 웃겠지만. 단편 하나 쓰는데도 두 달 정도 아무 것도 못하고 매달려야 할 정도지요. 그런데 인세 한푼 받지 못하게 되자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요. 그땐 이미 집안도 몰락해 있었고, 결혼도 했으니까. "
그는 영화를 시작했다. 그는 유명했고,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무진기행]을 [안개]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로 각색하기도 했고, 김동인의 [감자]를 감독하기도 했다.
"그때 받은 돈으로 아파트를 한 채 샀을 정도니까 많이 받기는 많이 받았지요. "
"그 뒤로는 주로 영화일만 하셨지요?"
"영화가 매력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꼭 필요했어요. 특히 문학작품을 영화로 만들 때 제대로 해석해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
"재미있으셨나요?"
"별로. "
충무로 제작자들의 시달림을 받느라 그는 인생을 탕진한 것 같다. 이승만씨나 박정희씨 혹은 전두환씨같은 당대의 거물이 아니라, 출판업자와 영화제작자가 그의 예술을 망가뜨렸다. 그게 그의 예술이 침묵했던 진짜 이유라니.
나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다시 쓰실 생각은?"
"나는 내 인생을 너무 많이 낭비한 느낌입니다. 써야지요. "
"종교적인 겁니까?"
"물론. 내 생애를 건 종교적인 저술을 할 생각입니다. "
"소설도 쓰실 건가요?"
"쓸 생각입니다. "
"종교소설인가요?"
"종교소설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톨스토이의 [부활]같은 거지요. 그러나 그들은 답을 내리려고 하고 있어서 덜 재미있어요. 나는 기본적으로 소설은 질문의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직도 질문하실 게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처음에는 질문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그랬어요. 고백하고 증언할 것밖에는 없었지요. 그 일을 하느라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남을 나의 일을 생각해보니까 그게 소설 쓰는 일 같아요. 소설은 시간이 흘러도 소설로 남으니까요. "
심연이 보인다. 나는 아직 건너지 않은, 건너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