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1908-?, 함경북도 학성)
김기림(1908-?, 함경북도 학성)
김기림(金起林)이 태어난 곳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서북쪽으로 30리 가량 떨어진 학성군 학중면 임명(臨溟)이라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위도상으로 그곳은 북위 41도가 되었다. 백두산을 주봉으로 한 장백산맥이 동쪽으로 치달려 마천령을 이루었다. 그의 고향인 임명은 그 마천령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바닷가에 있었다 . 바닷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임명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 같다.
이 마을에서 김기림은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간 김기림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거멀못 구실을 하는 것이 그 집안의 생활 환경이다 .그의 아버지는 별로 넉넉하지 못한 집의 둘째로 태어난 듯하다. 그리하여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신분 인정의 기본 요건인 글, 곧 한문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이재(理財)에 상당한 능력을 지녔던 것 같다. 별 밑천도 없이 한 동안 중국의 동북쪽과 시베리아 등지를 드나들었다. 그리고 토목사업에 손을 댄 것이 성공해서 중년에 이르자 상당한 재산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 밑천으로 그는 고향 인근의 토지와 산을 사 모았다. 8.15에 이르기까지 인근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의 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김기림은 과수원집 대지주의 아들로 애지중지 떠받들려서 자란 것 같다. 그가 태어난 것은 부친인 김병연이 나이 30을 넘어서의 일이다. 그 무렵만 해도 사람들은 10대 후반에 아들을 본다. 그럼에도 김병연은 잇달아 딸만 여섯을 보았다. 거기다가 김기림의 어머니인 박씨 부인은 별로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아들이 없어서 애를 태운 것 같다. 그런 나머지 김병연 부부는 인근에서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무당을 불러서 굿판을 벌였다. 그러자 무당이 신들린 말로 일러 주었다. 그것이 정히 아들을 보려면 막내딸을 남에게 주도록 하라. 그리고 이후 절대 그 딸을 집안에 들여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김병연 부부는 무당의 말대로 막내딸을 성진에 사는 교회의 목사에게 양녀로 주었다. (그 집은 자식이 없었다.)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김기림이 잉태된 것이다. 부친은 해외를 들락거린 사람이어서 무당 같은 것은 미신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무당의 말을 따라서 푸닥거리를 한 결과 얻은 아들이 김기림이다. 이런 사실은 그의 탄생이 적어도 한 집안의 매우 간절한 소망과 함께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한편 이렇게 귀한 아들을 낳은 어머니 박씨는 그 아들이 장성하는 것을 지켜 주지 못했다. 김기림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셋째 딸인 신덕과 함께 불귀의 몸이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김기림이 크게 각박한 세상을 산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지주이며 재력가인 아버지라는 튼튼한 방품림이 있었다. 그리고 본 어머니가 아니지만 그 후 곧 계모를 맞이해 들였다. 그녀가 단천에서 자란 전주 이씨다. 계모는 아들도 낳고 집안일도 넉넉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이런 외재적 환경에 비해 김기림은 적지 않게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훗날 어느 글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그의 감정을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라고 적었다. 이런 감정 속에는 셋째 누이의 그림자도 곁들여진 듯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지만 그녀는 큰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시로 본 어머니 무덤가에 울음 우는 버릇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빌미로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들 일련의 사실은 소년 김기림을 매우 감상적인 쪽으로 내몬 것 같다.
"사실 나는 열다섯 살 때에 중학교의 작문 선생으로부터 '애가 이 뽄으로 글을 쓰다가는 필경 자살하겠다'하는 경고를 받은 일이 있다. 내가 오늘 감상주의를 극도로 배격하는 것은 나의 영혼의 죽자고나 하는 고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때의 공부하던 누이와 그리고 어머니, 내가 여덟 살이 채 차기도 전에 나의 어린 날을 회색을 물들여 놓고는 그만 상여를 타고 가 버렸다. 잔인한 분들이었다."
결국 김기림에게 고향은 이런 죽음들이 정신의 늪지대로 작용한 곳이다. 이것은 그가 지향한 예술 세계을 해석하는 데 하나의 시사가 될 수 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끝없이 새로운 것, 밖을 향해서 떠나려는 의지가 나타난다. 몇 개의 글에서 그는 한 발자국 앞서 서울 유학을 떠나는 누이를 부러워한 바 있다. 그 고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날아가고 싶어했다.
그 후 그 역시 서울로 유학을 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의 서울 체재 경험을 가진 다음 다시 그는 동경으로 떠났다. 동경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다음 그는 귀국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다. 그러나 이 안정된 직장과 생활도 그를 오래 묶어 두지는 못했다. 조선일보 기자 생활이 얼마되자 그는 다시 또 하나의 외계를 향한 날개짓으로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그의 문학, 곧 시와 비평도 이와 흡사하다. 귀국에서 문단에 등장하자마자 그는 곧 초현실주의를 소개하고 엘리엇 '황무지'에 비견될 장시 '기상도'를 썼다. 그리고 그 후에도 문학적 변신을 계속한다. 단적으로 김기림은 끊임없는 여행주의자다. 그 소인의 중요 부분을 그의 유년기 체험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14세가 되던 해 서울 유학길에 올라 김기림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성고보에서 그는 탁월한 성적이었다 거기에는 임화, 이헌구, 윤곤강, 김환태, 이상 등의 장래 시인, 작가 들도 있었다. 특히 이상과의 사이는 남달랐다. 김기림이 그의 시론에서 이상의 시를 호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후에 그가 재차 도일하자 이상이 시집 '기상도'의 교정을 맡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 이상도 현해탄을 건넜다.
이 보성고보를 김기림은 3학년 때 그만두었다. 표면적 이유는 병이 나서 요양차 고향에 내려갔기 때문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병이 나아서 건강이 회복되어도 보성에 복학은 하지 않았다 .대신 동경으로 건너가 명수중학 4학년에 편입학을 했다.
이 때는 누이 중 한 사람인 선덕과 함께 자취를 했다. 그 전에 선덕은 도일하여 경도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것이 김기림이 동경으로 건너가자 거기서 합치게 된 것이다. 김기림은 여기서 부지런한 공부꾼이었던 것 같다. 명교중학에서 한 해 남짓 공부하고는 문부성에서 실시하는 검정시험을 보았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리하여 1926년 열 아홉에 일본대학에 입학하였다.
일본대학에서 김기림이 적을 둔 학과는 문학예술과였다. 일본대학 시절 김기림을 이야기하는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 그와 일본 모더니즘 운동의 관계다. 일본 문단의 모더니즘 운동은 입체파, 표현파, 다다, 초현실주의 및 이미지즘, 아나키즘 운동을 두루 망라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출현은 서구의 전위 예술운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일본 동경 문단에 강한 충격이 된 듯하다. 이런 분위기가 모더니즘의 기수 구실을 한 김기림에게 자극이 되었다.
김기림의 동경 유학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른 문학인들과 달라서 그는 자신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대학의 학적부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어 버렸다. 그의 보성고보 학적부도 6.25때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다 .이런점으로 인하여 그는 학적 조회가 어려운 문학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