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영랑(1903-1950,전남 강진)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58

김영랑(1903-1950,전남 강진)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은 대를 이은 지주였던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1903년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탑동에서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랑의 출생 당시 남성리 일대는 '탑골'로 불려졌다고 한다. 농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농촌으로 이 시인이 나서 자란 집은 대나무 숲이 둘러싸여 있고, 멀리 남쪽으로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며, 가까이는 읍내를 굽어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다복한 환경에서 티없이 자라난 영랑, 그는 한 생애를 거의 고향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다복하고 여유 있는 생활환경에서 자란 그는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면서 13세에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 연상인 김씨와 결혼했으나 다음해에 상처했다.

 1917년 휘문의숙(지금의 휘문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5년제였던 그 학교에는 윗반에 박종화가 있었고 그 윗반에 홍사용, 안석주가 있었으며 바로 아랫반에 정지용, 이선근, 그 아랫반에 이태준이 있었으니 그 좋은 교우관계가 그의 시심을 발아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고 보인다.

 휘문의숙 3학년때 일어난 3ㆍ1운동에 가담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구두 속에 독립선언문을 깔아 감추고 강진으로 내려가 독립만세를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의 도일(渡日)목적이 성악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인데 1920년 동경 청산학원에 입학하면서, 평생의 지우였던 용아 박용철과는 동창생이 되었다.  박용철과 사귀면서 시작을 권유받았다.

 1921년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영랑이 성악을 공부하려다 부친의 적극적인 만류로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꾸게 된다.

 1923년 여름방학으로 귀국해 있던 영랑은 일본 관동대지진의 재해로 인해 도일하지 못했다.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에 머무른 그는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신흥 사회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문학운동에 전력하였다. 이무렵 그는 젊은 문사 최승일과 교류하면서 그의 동생인 발레리나 최승희와 한 해 동안 열애에 빠져 있었으며, 1925년 5월에는 교사인 20세의 김귀련과 재혼하였다.

 재혼한 영랑은 고향에 머물면서 정원에 모란을 가꾸고 현금과 북을 벗삼아 시심을 가꾸고 건강관리를 위해 정구를 치기도 했다.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영랑이었다. 임방울과 아화중선의 가락을 좋아했던 영랑의 사랑채엔 명창들이 자주 모여들었다. 얼마나 그가 가야금이나 북의 명수였는가는, 그의 북소리를 듣고 한 기생이, 이런 소리는 만나기 어렵다고 상을 쓸고 새 상을 들여와 창을 하였다는 일화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심심하면 서울의 문인들을 불러다 집 뒤에 있는 정자에서 술잔치를 벌이곤 했다. 창과 북소리가 따랐다. 정지용도 그 자리에 자주 참석하였다고 한다.

 고향에 은거하며 살면서 가장 위안을 삼게 된 것은 용아 박용철과 시언를 주고 받은 일이었다. 이 시언의 교환으로 그들의 우정은 더욱 심화되었고 드디어는 <시문학>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한번은 폐병3기로 병석에 누워있는 임화에게 김영랑,정지용,박용철 셋이서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임화의 집을 나오면서 영랑이 한마디했다. 시인은 모두 폐를 앓는 모양이니 지용도 그럴 생각이 없느냐고. 지용이 응대했다. 아직 시집 한 권 못 내놓고 황천행을 하면 어이하느냐고. 그 말에 그들 셋은 시잡지만 할 것이 아니라 흩어진 시들을 모아 시집을 한 권씩 내자고 다짐하였고, 그 첫 번째로 나온 것이 정지용 시집이었으며 두 번째로 나온 것이 영랑 시집이었다.

 1925년 이후 1945년까지의 20년, 23세에서 43세에 이르는 동안 그는 시우ㆍ친지들을 만나거나 소일 삼아 나들이하는 이외에는 강진을 떠나지 않았다. 이 20년간이 영랑에게는 기나긴 휴가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시대적 상황의 영향이었을 지도 모를 이 20년 동안 영랑에게는 '관조와 취미의 삶'이 계속됨으로써 영랑시를 이루에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는 해방 직후 고향에서 대한독립촉성회 단장으로 활약했고, 1948년 초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후 가산을 정리하여 상경한 뒤 6개월 정도 공보처 출판 국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다 6ㆍ25전란 중 영랑은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가 갑자기 날아든 비행기 폭격에 중상을 입고 9월 29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