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ㄱ-ㅁ)

김용택(1948∼, 전북 임실)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3:58

김용택(1948∼, 전북 임실)

 

 이 글은 최재봉, 이종원 기자의 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씨의 둥지다. 시집 <섬진강>, <꽃산 가는 길>, <그 여자네 집> 등을 비롯해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섬진강 이야기 1·2> 등을 키워낸 ‘태반’이 바로 이곳 섬진강 마을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하루도 섬진강을 보지 않은 날이 없다. 눈만 뜨고 방문을 열면 언제나 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마루에 앉아도 누워도 강물은 보였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까지 가는 길도 강 길이고, 학교에서도 눈만 주면 언제나 거기 강이 있었다.

 나는 그 강 길에서 내 새파란 청춘을 다 보냈다. 누구나 그렇듯 청춘시절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과 고독을 나는 혼자 문학에 기대어 지냈다. 내 젊은 청춘시절은 온통 책과 외로움뿐이었다. 내 주위에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단에 나가기까지 나는 혼자 절망하고 혼자 일어섰다.

 그것은 캄캄한 절망과 눈부신 비상이었다. 나는 캄캄한 그 작은 마을 작은 방에서 부활을 꿈꾸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려는 나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떨었었다. 거기 강이 있었다. 강은 내 유일한 삶의 위안이었고, 세상을 향한 길이었다. 나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늘 강물을 따라 걷고 강가에 나가 헤매었다. 사랑을 잃었을 때도, 사랑을 얻었을 때도, 기쁘고 슬플 때도, 강물은 내 진정한 동무였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준다”(`섬진강 1' 앞부분).

 전주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50㎞를 짚어 내려가면 갈담이라고도 부르는 임실군 강진면 소재지에 이르고, 거기서 같은 길을 10리 가량 더 가면 나오는 곳이 덕치면이다. 앞산이 좌우로 길다랗다 해서 `긴뫼(長山)'라 이름붙여졌으나 우리네 이름이 항용 그러하듯 '진메'로 통용되고 있는 섬진강변의 작은 마을이 시인의 고향이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서발원해 경남 하동 포구로 몸을 푸는 섬진강 5백리 물길을 두고 보자면 진메는 강의 중상류쯤에 해당한다. 그 조금 위쪽 강진면 옥정리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섬진댐이 물을 막고 있어 댐 아래로는 수량이 매우 적다.

 김용택에서 이 곳에서 덕치초등학교를 졸업했는 데, 교정에서 바라보면 그의 시「그 여자네 집」에 등장했던 '그 여자네 집’이 보인다고 한다. 그 여자네 집은 아직 감나무에 감이 '겁나게’많이 열리고, 시인의 아내에게는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김용택은 1969년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교사가 모자라던 시절 고졸학력으로 시험을 치른 뒤 4개월 강습을 거쳐 초등교사가 되었다.

  김용택이 시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82년이었다. 82년이라면 5월 광주의 충격과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무렵이다. 미증유의 학살극은 사회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고, 복 없는 백성들은 애꿎은 소주병이나 작살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바닷가 가파른 벼랑 위에도 원추리꽃 한 송이가 피어 있듯이 숨막히는 역사의 격랑 속에도 서정의 몫은 엄연히 있었음인가. 김용택의 섬진강 시편들은 시대의 불인두에 데인 화인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며 삶이란, 그리고 역사란 한 판 승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낮은 목소리로.

“이 세상/우리 사는 일이/저물 일 하나 없이/팍팍할 때/저무는 강변으로 가/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팍팍한 마음 한끝을/저무는 강물에 적셔/풀어 보낼 일이다.”(`섬진강 5―삶')

 김용택의 서정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방관적인 여느 `순수서정'과는 구분된다. 김용택은 그가 몸담고 있는 농촌의 현실,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적 상황, 그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라는 큰 흐름에 두루 주목하면서 서정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감싸려 한다. 그의 시에서 서정과 역사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농촌의 현실에 발붙이고 농민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농민시의 계보에 속한다. 1985년에 초판이 나온 그의 첫 시집 <섬진강>은 그보다 10여년 전에 출간된 선배 시인 신경림의 <농무>를 잇는 농민시의 80년대적 적자라 할 만하다. <섬진강>에 실린 시 `눈길'은 신경림의 같은 제목의 시를 연상시키며 두 시인 사이의 영향관계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전답들을/어떻게 갚아갈 것인가, 겁도 안 나는 이 많은 빚을/걸을수록 발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들판 끝 자욱한 동네 감빛 같은/불빛을 따라/팍팍한 눈길을 걷는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의 수량이 갈수록 주는 것처럼 진메마을의 인구도 감소일로에 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버린 마을엔 노인들만 남아 생의 저물녘을 지키고 있다. 20여 가호가 사는 마을엔 서너 채가 빈집으로 버려져 있고,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만도 여덟에 이른다. 시인의 기억에 따르면 70년대 중반부터 이농 물결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그가 처음 부임했던 70년대 초 덕치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7백명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은 불과 53명의 학생이 교사 6명과 함께 생활하는 미니 학교로 바뀌었다. 2학년 8명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은 20년 저쪽의 일들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같다”고 말했다.

 "제 교육방침은 최대한 자유스럽고 개방적인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겁니다. 한 반 정원이 3,40명인 도시 학교처럼 획일적인 지식만을 주입시키는 건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볼 수 없어요. 아이들에게 자연을 접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무척 중요한 교육"이라고 김용택은 말한다.

 사람들은 떠나고 물은 줄었어도 마을 앞 강에는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름이면 별을 보며 잠을 청하곤 했던 벼락바위에는 말리려고 널어놓은 흰 호박 쪼가리들이 얹혀져 있고, 각각 쏘가리와 다슬기가 많이 잡힌다고 해서 이름붙은 쏘가리방죽과 다슬기방죽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강물에는 돌고기, 납자루, 쉬리, 꺽지, 피라미, 버들치, 모래무지, 자가사리 따위의 민물고기들이 추억처럼 오고 또 간다.

 그러나 자연적 아름다움과 효용을 겸하고 있던 마을 앞 징검다리는 경운기 한 대가 다닐 만한 넓이의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징검돌이 치워지고 시멘트가 퍼부어지던 무렵 시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극도로 야위는 통에 두달 가량 고향 마을을 찾지 못하다가 상황이 끝난 뒤에야 와서 보고는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고 보면 의사들이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인의 병은 어쩌면 섬진강의 병이 아니었을까.

  김용택 시인은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대신에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다.

 "술은 원래 못마시고 담배는 10년 전에 딱 끊었어요. 그 대신 전 영화보는 걸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지금도 개봉 영화는 거의 다 보는 편이죠. 작년엔 그렇게 한편 두편 모아놓은 영화평들을 엮어 <촌놈 김용택, 극장에 가다>라는 책을 냈을 정도니까요. 아내 역시 영화보는 걸 무척 좋아해서 어떤 날은 둘이서 하루 종일 영화관에서 사는 날도 있어요. 좋아하는 배우는 이영애씨와 전도연씨. 연기도 잘하지만 따뜻하고 순수한 느낌이 좋아요. 물론 제 이상형은 우리집에 있습니다(웃음). 최근에 본 영화중에선 <공공의 적>이 좋았어요. 연기, 시나리오, 연출 모두 흠잡을 데가 없더라구요. 물론 너무 폭력적인 몇몇 장면은 눈에 거슬렸지만 영화적인 표현이니 어느 정도는 감안해 줘야겠죠."

 김용택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라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나는 한 산골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태어나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이 느닷없는 삶의 전환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싱그러운 스물한 살의 팽팽한 젊음은 그러나 산골 아이들 앞에서 너무나 심심했다. 까만 머리통의 아이들과 작은 들과 산은 내게 무료했고, 너무나 적막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심심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 먼 산골까지 책을 월부로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낮에는 동무들과 산에 나무 가고, 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매달려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 해는 눈도 많이 왔다. 세상 가득 눈이 온 날 아침 나는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징검다리 위의 눈을 밟으며 강을 건너갔다 왔다.

 겨울방학이 그렇게 끝나자 나는 전집 여섯 권을 거의 다 읽고 있었다. 학교로 가기 위해 차를 타러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그러나 내게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산과 들과 나무와 길과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내 걸음걸이가 방학 전의 것들이 아니었다. 뒷산에 있는 느티나무가 그렇게 큰 줄 나는 그때야 알았다.

 앞산 산등성이를 비껴오는 아침 햇살은 눈부셨고, 산굽이를 돌아가는 아침 강물 소리는 새로웠다. 세상은 내게 그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신비롭던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눈부시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목월 전집',‘이어령 전집',‘니체 전집’ 그리고 한국문학 50권짜리 전집도 그때 읽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전혀 낯선, 그러나 그 어디에선가 보았던 것 같은 그 샛길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났다. 나는 날마다 나를 응시하고, 나를 신기해했다. 늘 버리고, 무엇인가 설레는 그 무엇을 새로 얻었다.

 그리고 나는 평생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그분들의 아침과 그분들의 일과 놀이를 나는 보았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 그 동네에서 살다 죽어 그 동네 산에 묻히는 농부들의 삶은 내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을과 내가 사는 이 나라와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늘 새날이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고, 그런 생각들이 쌓였다. 늘 죽고 늘 태어났다. 사사로운 나의 가치들이 폐기되고 아름다운 공통의 가치가 내 속에 찾아와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5, 6년 지난 어느날 아침 나는 마루에서 뚤방으로 내려섰다. 뚤방 시멘트 바닥에 무엇이 떨어졌다. 코피였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던 달짝지근한 것, 그것, 그랬다. 내 것이 나의 목마름을 적셔주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방에 누워 멀거니 여기저기 쌓인 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그렇구나. 저 책을 사람들이 쓴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나도 글을 써 보아야지. 그리고 나는 글을 써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내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스승도 문학을 이야기할 그 누구도 내겐 없었다. 오직 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면서 나를 키워갔다. 그렇게 13년이 흘러갔다. 그 길고 긴 세월, 내가 제일 못 견뎌한 것은 저 봄날의 저묾이었다. 산그늘에 덮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 팽팽한 긴장 때문에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긴장을 뚫고 나는 나무 사이를 지나다녔다. 어둠이 내려오는 뒷산을 오르며, 흰 산꽃들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또 못 견뎌했던 것은 창호지 문에 새어든 달빛이었다. 달이 뜬 봄밤이면 나는 툇마루에 나가 달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달빛이 수시로 나를 불러내면 나는 징검다리 돌들을 세며 강물을 건너갔다. 달빛에 빛나는 검은 바위들과 밤이슬에 반짝이는 풀잎들. 달은 나를 두고 그렇게 갔다.

 그 긴장된 푸른 어둠 속 풀꽃들의 서늘한 아름다움을 견딜 수 있고, 빈 방을 찾아온 달빛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힘이 들었다. 절망은 예고도 없이 수시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어두운 저 절망의 나락 속에서 한 줄기 불빛을 살려내곤 했는데, 그것이 시였다.

 어두운 땅 속에 묻힌 무가 빛을 찾아 노란 싹을 키우듯이 나도 그렇게 시의 빛을 찾아 어둠 속에서 내 생명의 싹을 길렀다. 해가 저물면 나는 강변을 헤매거나, 들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밤이 되면 일어서는 막막한 산. 산을 감고 돌아가는, 달빛 받은 강물.

 그렇게 내가 산과 강에 내 몸을 모두 기대고 살기를 13년, 어느날 시가 내게로 왔다. 어두운 산에서였는지 아니면 흐르는 강물 그 어느 굽이에서였는지, 내게로 시가 왔던 것이다. 내 몸이 환해지는 시, 암울한 내 청춘의 어둠 속을 뚫고 달려왔던 한 줄기 불빛 같은 시, 세상을 알아낸 것 같은 시, 시가 내게로 왔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서른 다섯 살이었다.(략)

  나는 지금도 내 의지와 열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로댕의 말이다.

 문학을 왜 하는가? 살아야지. 죽어도 괜찮다는 하루를 나는 그냥 살 뿐이다. 문학은 최고의 삶을 사는 일이다.]

 김용택 시인의 다른 글에서 말하기를,

[나는 내 인생을 21살 때 시작했다. 21살 먹을 때 나는 우연히 선생을 시작한 것이다. 선생을 시작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 내가 처음 발령 받은 곳은 작은 분교였다. 어느 날 그 먼 곳까지 월부 책 외판원이 찾아왔는데, 그 때 월부 책을 산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책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책을 가까이 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내가 시인이 된다거나,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이 그냥 좋았다.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인생을 깨달아 갔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나는 책을 통해서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인생의 가장 기본 자세를 터득한 것이다. 나는 지식을 통해 얻어지는 새로움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세계 질서를 내 삶으로 구체화했던 셈이다. 글을 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순간들이 중요했고, 나는 그 순간을 확실한 내 삶의 ‘현실’로 현실화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그 나중의 일이었다.(략)

 한번도 선생을 위해서 시를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시를 위해서 선생을 한 적도 없다. 다만 오늘을 사는 순간 순간이 내 현실이고, 내게 주어진 그 현실이 확실한 내 인생인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종합해 내는 일을 시인은 한다. 시인은 또 죽어 가는 것들을 살려내는 일을 한다. 선생도 마찬가지다. 선생님들도 세상을 종합하는 위대한 일을 한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은 ‘인간’을 ‘교육’하는 ‘전인적인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선생만큼 위대한 시인은 세상에 없다. 세상을 종합하고, 해석하고, 판단 비판하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답은 다양한 독서와 사색에서 나온다. 독서를 하지 않는 교사를 나는 한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