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1902 - 1926, 서울)
나도향(1902 - 1926, 서울)
이 글은 차웅렬의 글을 주로 인용 편집한 것입니다.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이다. 호적상에서 경손으로 불리었던 그는 자신의 이름에 항시 불만을 품었다.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맏손자를 보고 기쁨에 넘친 나머지 경사스런 손자란 뜻에서 경손이라고 불렀다. 경손은 자신의 이름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도향이라고 작명을 해준 월탄 박종화의 해명을 들으면 <홍루몽> 속의 도향촌을 생각해서 "벼란 우리 인생에게 여간 유익한 게 아니다. 더구나 아리따움을 시새는 백화난향보다 계절을 떠나 전원에 물결치는 도향화(벼의 향기)가 어떤가"하였더니 그는 파안일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네가 글을 잘하랴 뜻 두니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빈(彬)자를 쓰소"했다고 한다. 이래서 오늘까지 문단에서는 그를 도향 나 빈이라 애칭하고 있다.
나도향은 1902년 3월 30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1가 56번지에서 태어났다. 도향의 가문은 대대로 의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의 조부는 한방의 명의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그의 부친도 양의로 가업을 계승했다. 조부와 부친 등 집안어른들이 모두 술을 좋아해서 자식에게는 항상 부친처럼 술을 마시지 말라고 훈시를 했다. 모친 김씨는 현모양처로 이웃과 가족 사이에 칭찬이 자자했으며 아주 인자한 어머니였다. 형제는 7남매이며 도향은 장남이었다.
부친 나성연(羅聖淵)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와 남대문 근처 골목 안 게딱지만한 집에 약방을 차렸는데 도저히 집안은 좁고 동거할 수가 없어서 도향은 밖으로 나도는 것을 좋아했고 여인숙을 전전하기도 했다. 부친은 가게 운영보다 독서에만 열중하여 생계를 돌보지 않았다고 하니 생활은 자연히 어려웠고 조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향은 어려서부터 부친과 조부 사이가 원만치 못하여 늘 갈등 속에서 지내는 것을 마음 한 구석에 지닌 채 생활해 왔다.
도향은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단단한 체구에다 눈이 약간 패인 편이었고 넓은 이마에 큰 귀가 특징이었다. 시커멓고 험상궂게 생긴 얼굴로 평소에 자신의 용모에 열등의식을 가졌으며 성격은 참한 편이었다. 너털웃음을 잘 짓고 친구들과는 대범하게 어울리면서도 내성적인 면이 강했다고 한다.
나도향은 1914년 기독교계통의 서울 고옥보통학교를 마치고 1918년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배재고보 시절, 성악에 소질이 있어 이광수 작사, 안기영 작곡인 ‘낙화암’이라는 노래, 즉 ‘사자수 나리는 물에 석양이 비칠 때 버들꽃 나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마음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라는 노래와 윤극영 작사 작곡인 ‘반달’을 잘 불렀다. 그의 친구에게도 문학가보다도 음악가가 더 되고 싶다고 말 할 정도였다. 배재고보의 친우는 카프문학의 선도자 박영희가 있었고, 선배로는 조선문단의 발행자인 방인근, 후배로는 카프문학의 김팔봉, 신봉조(전 이화여고 교장) 등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한창 신문화운동이 활기를 띨 때였다.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의 신문화운동에 대한 열정이 도향의 온 몸을 뒤흔들어 놓았고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결정적으로 문학의 길로 향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경성의전 입학 후에도 의사가 되는데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시와 소설류의 책을 주야로 탐독하며 여러 곳에 투고를 했다. 1919년 2학년 재학 중에 조부 몰래 여비를 훔쳐 일본으로 도망쳤으며 일본의 대학에서 문학공부를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졌을 때라 학비 조달이 어려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몇 달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1920년 경북 안동보통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나 문학방면의 열기가 온 몸에 배인 탓에 1년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1922년 1월 9일 창간호를 낸 동인지‘백조’에 참가했으며 동인은 홍사용, 박종화, 이상화, 이광수, 박영희, 현진건 등이다. 문학적인 첫 출발이었다. 그는‘백조’ 1호(1922)에 단편 <젊은이의 시절>을, 2호(1922. 5)에 단편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 것>을 발표하고, 19세 때 장편 <환희(幻戱)>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고 나서 낭만주의 조류를 내세운 백조파의 선두주자로서 일약 천재작가로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 해 차상찬의 추천으로 ‘개벽’ 12월호에 <옛날 꿈은 창백하더라>를 발표하였다. 이 무렵 '백조’의 문인들과 만나 문학이야기 또는 세상살이의 현황을 담소하였으며 매일같이 술을 벗삼아 지새웠다. 1924년 최남선이 창간한‘시대일보’사의 기자로 현진건과 같이 지냈으나 재정난으로 1년 만에 신문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사직하고 나왔다.
도향은 모양을 낼 줄 모르고 옷도 잘 갈아입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쓰러져 자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량은 약주 두어 되가 보통이었고 마시면 마실수록 한이 없었으며 주로 차상찬, 권덕규, 진학문, 현진건 등과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마셨다. 김소월과도 서울에서 4개월 머무는 동안 연일 술만 마시고 지냈다. 담배는 하루 한 갑 정도 피웠고 영어와 독일어 일어에 능했으며 항상 영문 소설책을 들고 다녔다.
1925년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났다. 가기 전에 마산 이은상의 집에 3개월 머물면서 큰 신세를 졌다. 꼭 성공을 다짐하면서 도일했으나 병의 악화로 거지 신세가 되어 1년 만에 돌아왔다. 동경에서의 생활은 핏기 없는 얼굴에 퇴색한 양복, 찢어진 양말과 구두, 두 눈은 더 움푹 패어 있고 얼굴색은 초췌함을 더하여 생활정도를 보니 너무나 참담한 모습이었다고 유학 중이던 친구 염상섭은 회고하였다. 동경에서는 염상섭, 이태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무렵 나도향은 낭만주의 경향에서 벗어나 자연주의적 경향인 사실주의로의 변모를 보여주었다. <벙어리 삼룡>(예명 1925. 7), <물레방아>(조선문단 1925. 8), <뽕>(개벽 1925. 12) 등의 문제작들은 모두 그의 작품 중 후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도향은 결혼을 하지 않은 작가였고 따라서 자녀도 없다. 병석에 있을 때 침모(針母)가 “어서 병이 나아서 장가가야지” 하면 언제나 “장가는 저승에 가서 들기로 했어요”라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러나 생애에 있어 교제했던 세 여성이 있었다. 첫 번째는 안동 보통학교 교사시절에 교제했던 일본인 여교사‘마쓰모도’, 두 번째는 <환희>를 동아일보에 발표할 무렵에 만난 기생 '단심(丹心)'이었고 , 그리고 세 번째는 동경에서 만난 최 모양이었다.
안동 보통학교에 근무하던 일본인 여교사 '마쓰모도’는 문학적 소질과 감상적이고 앳된 곱상한 여성으로 문학 청년인 도향의 문학적 소질과 인간미에 도취되어 사랑을 고백하자 실의에 젖어있던 도향에게는 둘도 없는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 여교사와의 결혼은 모든 면에서 도저히 불가능하여 한탄과 동시에 단식으로 몸부림쳤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1926년 단행본으로 나온 <청춘>이라는 장편소설은 일본녀와의 열애를 그린 작품이다.
단심이는 가냘픈 몸매에 뭇사람을 사로 잡을만한, 누가 보아도 홀딱 반할만한 미인이었다. 첫눈에 반하여 마음을 주고받았으나 기생인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형편이 안 되었다. 돈 없고 가난한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처지일 뿐이었다. 돈이 없으니 부자에게 시집가는 그녀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향이 폐결핵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복단장을 하고 머리채를 잘라 대문 안에 던져놓고 자취를 감추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최 모 여인은 개벽사 여기자로 있다가 동아일보로 간 여인인데, 동경여자사범학교를 나온 수재이며 미모에다 글재주가 있어 유학생들의 연모의 대상이었다. 그 여인 역시 색동회 창립자의 한 분인 진 모씨에게 출가하였으니 역시 비련(悲戀)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도향은 일본에서 갖은 고생과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연민, 그리고 탄식으로 폐병과 싸우면서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따금 돈이 생기면 케이크를 사 가지고 최 양의 하숙으로 찾아가서 그녀가 지은 밥을 대접받기도 하였는데 갔다온 날에는 제법 흥에 겨워서 술타령과 정다웠던 이야기를 이태준이나 염상섭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최 양은 친구로서 교제한 것뿐이지 더 이상의 접근은 금하였다고 나중에 술회하였다고 한다.
나도향의 병은 점점 깊어갔으며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비련의 절망을 안은 채 거지 신세가 되어 귀국하였다. 단편 <피묻은 편지 몇 장>은 최 모양을 모델로 쓴 것이고 시조 <버들>도 그녀를 사모하는 애끓는 정을 호소하듯이 쓴 글이다.
“보다가 말 하다가 내 맘 매어두고 왔소. 바람에 창 두드리거든 내 맘으로 알듯한데 길길이 늘어져 못에 시쳐 끊어져도, 나의 맘 그의 맘을 얽어 놀 줄 왜 모르니”
나도향은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돈 없이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 죽음을 재촉하였고 동경에서 감기가 악화되어 폐결핵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폐결핵과 생활고를 못이겨 동경으로 간 지 1년도 못돼 서울로 돌아와 1926년 8월 26일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환희>를 발표한 것이 그가 19세 때요 24세에 요절한 것을 따져보면 그는 불과 5, 6년 밖에는 창작활동을 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 5, 6년의 기간 사이에 그는 두 편의 장편과 20편의 단편을 남겼다. 그가 남겨놓은 작품의 전부가 24세 이전의 작품임을 생각할 때 그가 천재 소년의 명성을 얻었던 것은 1920년대의 문학적 수준에서 볼 때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