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1912-1957, 황해도 장연)
노천명(1912-1957, 황해도 장연)
노천명은 1912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다. 소지주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인천 등지에서 무역업에 손을 대어 성공을 거둔 덕분에 어린 천명은 한 동안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다.
위로 아들이 하나 있음에도 잇달아 딸이 태어나자 부모는 아들 낳기를 바란 나머지 어린 천명에게 사내아이의 옷을 입혀 키운다. 그의 아명은 기선인데, 여섯 살 되던 해 홍역을 심하게 앓고 난 뒤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이것이 호적에 오른다. 서울의 양반 집안에서 장연으로 시집 온 어머니는 병약한 천명을 편애한다. 천명은 자신이 살았던 산골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눈이 오면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가신다고 곧장 산으로 가셨다. 우리들은 곡간에서 땅콩을 꺼내다가 먹으며 늦도록 사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쉬엄텁석부리 영감에게 나는 으레 옛날 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램프 불밑에서 듣는 얘기는 달밤의 호박꽃처럼 희한했다. 이런 밤이면 어머니는 엿을 녹이고 광에서 연시를 꺼내다가 사랑으로 내보내 주셨다. 고향과 함께 그리운 여인이다. 내 어머니처럼 고운 이를 나는 오늘까지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늘 옥루몽을 즐겨 읽으셨다. 읽고는 또 읽으시고 읽을수록 맛이 난다고 하셨다. 백지로 책둑게비를 한 이 다섯길의 책을 나는 어머니의 기념으로 두어왔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장장이 어머니의 손때가 묻었을 이 책을 내서 본다. 어머니의 책보는 음성이 어찌 좋던지 어려서 나는 어머니의 이 책 보시는 소리를 들으며 늘상 잠이 들었다."
1918년 아버지가 숨지자 그의 가족은 고향인 황해도 장연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다. 천명은 진명여고보에 진학하였는데, 거기서 육상선수로 활약하면서 전국 대회 우승도 했다. 동창인 이영희 여사는 진명여고보 시절의 노천명을 이렇게 기억한다.
"4년 동안 내내 기연(奇緣)처럼 같은 반의 같은 책상에 앉았다. 천명은 두뇌가 명민해서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으나 수학은 떨어졌다. 몸이 건강하다 할 수는 없었는데도 1백미터 달리기 선수였고 그때부터 시를 잘 써서 곧잘 학생들 앞에서 낭독을 하곤 했다. 당시는 창신동에서 학교를 다녔다. 성격은 괴팍해서 신경을 건드리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이 그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이뤄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1930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할 즈음, 천명은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다. 그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외롭고 쓸쓸한 학창시절을 보낸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천명은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서울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8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동인지 <<시원>>에 <내 청춘의 배는>을 게재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그는 첫번째 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으로 작가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천명은 일제 말기에 다른 많은 문인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대륙침략 정책에 동조, 문학과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1939년 '황군위문 작가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다수의 친일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6.25가 터지면서 노천명은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는다. 서울에 남아있던 그는 북에서 온 임화, 김사량 등과 만나게 되었는데, 좌익 성향의 조선문학가 동맹 가입 사실과 얽히면서 죄가 가중되어 2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부역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던 천명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시인 김광섭에게 "3월 2일까지 나를 구하라"는 명령투의 편지를 보낸다. 김광섭이 누하동 천명의 집에 방 두 칸을 얻어서 살 때의 친분이 이런 결례조차 서슴지 않게 만든 것이다. 천명은 문인들이 진정서와 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의 노력으로 6개월 만에 출감한다.
사슴과 산딸기와 고독을 시로 노래하던 천명(天命)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사랑. 대상자는 당시 보성 전문 교수였던 김광진이었다. 처음 천명시인을 만난 것은 영도사 였다 한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어떤 분의 소개를 받게 되어 첫 인사에 서로가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주 만나고 하는 사이에 그들의 젊은 꿈은 더욱 깊어만 가서 이미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결혼 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미리 마음속으로 축복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람들의 기대는 어그러지고 말았다. 불과 같이 열렬히 사랑하던 김광진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나중에 김광진은 본처와 헤어지기로 하고 천명과 약혼까지 하지만, 그 결혼은 끝내 성사되지 않는다. 본처와의 이혼이 지연되면서 천명과 헤어진 김광진은 나중에 기생 왕수복과 월북한다.
이후 천명은 고아인 '인자'를 데려다가 친딸처럼 키우며 독신으로 산다.
자존심이 센 이상으로 몸이 약하던 노천명은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지고 만다.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한 노천명의 병명은 재생 불능성 빈혈이었다. 입원비 때문에 궁지에 몰려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우들이 돈이라도 쥐어줄라치면 천명은 "내가 거진 줄 아니?"하고 싸늘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곤 한다. 문우 모윤숙의 부축을 방아 코로나 승용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온 것이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외출이었다.
1957년 6월 16일 새벽 천명은 서울 종로구 누하동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마흔 여섯 살이었다.
일년 후 유고시집 <<사슴의 노래>>가 발간되었고, 1960년 유족들에 의하여 <<노천명 전집>>이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