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1954- , 충북 청주)
도종환(1954- , 충북 청주)
아래는 도종환 시인의 인생 고백입니다.
[(략) '어떻게 하다가 글쓰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하다가 시인이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곰곰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런 기억들과 만나게 됩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부모님은 학비를 보내줄 형편이 못 되었고, 친척집에 얹혀 살다 보니 그렇지 않은데도 공연히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참고서 한번 제대로 사 보지 못하고, 수학여행도 한번 못 가보고, 외가 어른들께 내일 소풍간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던 나머지 도시락도 없이 덜렁덜렁 소풍가는 데 쫓아갔다가 오곤 했습니다. 그런 쓸쓸한 기억들이 싫어서, 고등학교 진학 때에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고 무작정 강원도로 갔습니다. 거기서 1년 정도 가족들끼리 오붓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정착을 하지 못한 아버님이 먼저 경기도로 떠나는 통에 짧은 행복도 아쉽게 깨졌습니다. 어머님도 아버님을 찾아서 가시고, 거기서도 어머님은 멸치 장사를 하셨습니다. 양식이 떨어지고 수제비를 몇 달씩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연명을 하던 부모님들마저 다른 곳으로 가시면서, 객지에 혼자 남아서 배를 곯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대학 진학을 거의 포기하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부터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막상 대학 시험을 볼 무렵 친척들이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아까우니까 대학 시험을 한번 쳐봐라. 어떻게 될지 모르니 돈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 곳이 있으면 시험을 쳐봐라." 하고 권해서 사범대학을 선택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은 미술 계통의 학과였지만 전혀 엄두를 못 내고 돈이 거의 안 들어가는 학과일 거라고 선택한 곳이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였습니다. 실제로 들어가 보니 돈은 전혀 안 들어가고 도서관에 왔다갔다 하면서 책만 읽으면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과였습니다. 그 대신 교수님들이 사라고 말씀하시는 전공 서적도 못 산 채 공부하느라 한동안은 학점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다 보니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방황도 많이 하고 겉돌았습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내 분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방황하고 겉돌고 하는 걸 본 선배들이 끼가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 문학서클 활동을 하자고 해서 들어갔습니다. 문학 서클에 들어가면 시 창작 방법론을 가르쳐주는 줄 알았는데, 몇 해 동안 내내 술만 먹이고 시나 소설 창작 방법론은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환경이나 성격, 여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뭉쳐져서 퇴폐적 낭만주의자로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아주 페시미스트한 절망이 나의 유일한 재산인 것처럼 생활을 했습니다. 문학 청년 시절 내내 선배들이 매일 끌고 다니면서 술만 마시게 했지만, 남에게 보이기 위한 문학을 하거나, 이름을 얻기 위한 문학을 하지 말라고 일러주던 것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삶의 길을 찾아가는 문학을 해라. 네 삶의 길이 되는 문학을 해라." 하고 가르쳐 주었던 것은 오랫동안 고맙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선배들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선배들이 모여서 문학 토론을 할 때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거의 전집을 다 읽다시피 하고 와서 토론을 했습니다. 굉장히 깊이 있는 토론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주눅이 들기도 했고 내 자신을 변명하는 어색한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쑥스러워서 술을 더 많이 마시기도 했었습니다. 어쨌든 선배들이 문학 토론을 하는 것, 특히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논쟁들을 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주눅이 들어서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에는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전교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적도 있습니다. 읽는 것이 좋아서 열차 통학을 하면서 남아 있는 차시간 동안 도서실에 박혀 지냈습니다. 제일 먼저 달려가 도서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맨 앞줄에 서 있는 것이 자랑인 것처럼 서 있었습니다. 도서실 안에 들어가면 나의 문학적 호기심이라든가 지적 호기심을 채워 주는 수많은 책들을 내 마음대로 골라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잡지에서부터 추리소설, 애정소설, 세계 문학 전집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대회에 내보낸다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자유 교양 경시대회에 내보내기 위해서 도서관에 오후에 잡아 앉혀놓고 중국의 {십팔사략(十八史略)}이라든가 우리 나라의 고전 따위를 거의 달달 외우게 하였습니다. 단지 대회에 내보내기 위해 강제로 독서 훈련을 시키는 데 싫증이 나서, 일부러 학교에서 읽으라는 것은 안 읽고 솔제니친의 책이라든가 아니면 까뮈의 소설 같은 것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대학에 와서 선배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깊이 있는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들이 논쟁 때문에, 예를 들어 종교에 관한 논쟁을 한다고 하면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관해서, 니체에 관해 얘기하면 니체 때문에, 하이데거 다음에 사르트르, 까뮈 순으로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철학자와 문학자들의 계보를 그려가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니체를 읽었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를 읽어야 한다고 해서 야스퍼스로 내려오는 계보로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관한 책을 찾아 읽는 등 실존주의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였습니다. 성경에 관한 것을 꼼꼼히 따져가면서 읽고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반야심경}이나 {법구경} 등의 불경도 함께 읽었습니다. 또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을 읽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1950년대나 60년대의 실존주의 소설들을 읽게 되었고, 나중에는 최인훈의 소설이라든가 고은의 시들을 다 구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나서 선배들이 하는 문학이나 철학 논쟁에 끼어들어서 몇 년을 같이 뒤섞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마치 그때 책 좀 읽은 것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 그 사람이 문학을 하는 사람이든 안하는 사람이든 시비를 걸고 논쟁을 하고 나 혼자 실컷 떠들고 나야지만 대화가 잘 된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지적인 오만함이 생겨서, 마치 어설픈 중국 영화에 보면 산에서 도사 한 사람을 만나서 칼 쓰는 법을 배운 다음 저자에 내려와서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싸우는 검객처럼 문학 논쟁, 철학 논쟁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문학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논쟁의 끝에는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서 인사불성으로 지내다가, 선생으로 발령을 받아서 나가니까 사회 생활에 적응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하면 잘할수록 소시민적 생활에 때가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생활에 대해서는 모르고 또 거리를 두어야만 내 문학적 지수나 시적 순수함이 지켜질 거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만 되면 음악실에 가서 머리를 푹 파묻은 채 클래식 음악을 듣곤 했습니다. 또 수업이 끝나면 하루의 묻은 일상의 때를 씻어낸다고 소주 한 병을 들고 강가로 나가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신다거나, 혼자 술집을 찾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음악실에 가서 고개를 파묻은 채 클래식을 듣고 있는데, 음악 선생님이 오시더니 이런 말을 건넨 적도 있습니다. "새로 온 국어선생님이 음악선생님을 무척 좋아해서 음악실에 자주 간다는 소문이 학교 안에 파다한데, 정말 저를 좋아하는 거예요? 나는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좋아하면 안 되는데…."
또 수업 시간에는 시를 가르치다가 아이들이 지루해 하면, 재미있는 시들을 읽어 주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 박두진 선생님의 시가 나온다면 그분의 다른 시를 읽어줄 테니 한번 들어보라고 하면서 아이들한테 시를 읽어 주었습니다. 박두진의 산문시 [바다의 연가] 맨 뒷부분에 가면 '바다가 죽으면 가슴도 죽는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산문시를 감정을 넣어서 읽다가 마치 '내 가슴속에 출렁이는 시심의 바다가 죽으면 나도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나서, 시를 읽다가 말고 눈물을 닦느라고 한참 동안 창밖을 쳐다보고 있느라 수업도 제대로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 술집에 가서 혼자 술을 마시다 보면 동료 선생님들 몇몇이 들어왔습니다. "아, 먼저 와 계셨군요." 하면서 합석하자고 하면, 저는 "괜찮습니다. 저 혼자 마시겠습니다." 하고 사양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마시고 있으면, 선생님들이 또 합석을 하자고 권합니다. "왜 맨날 혼자만 겉돌고 그러느냐. 아니면 당신은 가슴속에 뼈 하나가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언쟁이 붙어 괜히 술김에 말싸움도 하다가 술집 바깥으로 걸어 나오곤 했습니다. 그날 일기장에 '괜찮아,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이보다도 더 외로웠어.' 하고 적어 넣곤 하였습니다.
울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온다는 좁은 산골 고등학교에서 훈장 노릇을 하면서, 여고생들 앞에서 시를 읽어주면서 울기도 하다 보니 금새 눈에 띄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단에 섰으니까 23, 24세의 약관에 선생이 된 셈입니다. 여고생 제자들과 나이 차이가 다섯 살에서 일곱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총각 국어선생이 와서 행동하는 게 희한하니까 그 좁은 지역에 이상한 선생이 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 인생이 달라지는 어떤 분하고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학교 밑에 조그만 시골 성당에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술을 안 마실 수가 있느냐는 핑계를 대고 술을 마셨는데, 어느 날 아침 술을 마시고 덜 깨어나 하숙집 방문을 여니까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가을 석 달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매일 마시고 있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걸어내려 오는데 한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 신부님이 스쳐 지나가는데 나는 그 신부님을 모르지요. 나는 내려오고 신부님은 올라가시는데 말을 던지는 겁니다. "잠깐만요, 저 좀 봅시다." 이런 말이 아니고, 짤막하게 "절망하지 맙시다." 그러면서 가시는 겁니다.
그 신부님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왠지 마음이 끌리는 걸 느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골에 와서 대화 상대가 없어 항상 지적인 허기에 빠져 있던 차에 그날 저녁부터 신부님에게 소주 됫병을 사들고 찾아갔습니다. 미사 집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사제관에서 신부님과 소주를 마시면서 담론을 주고받았습니다. 특히 종교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 내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라도 신부님을 이겨 보려고 밤새도록 떠들면 신부님은 말없이 웃으면서 들어주셨습니다.
신부님과 담론을 끝내고 일어설 때면 집에 가서 보라며 책을 한 권 주십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고은 시인에 대해서 주워섬기면 묵묵히 다 들어주십니다. "내가 고은을 좋아하는가 하면, 서 ,내가 고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면서 얘기를 합니다. 고은 선생님의 시는 다 찾아 읽었다고 말씀드렸듯이 고은이 어떤 점이 좋은가 하면 약력이 세 줄밖에 안 된다는 점입니다. '첫째 줄은 이름 고은, 둘째 줄은 저서 20여 권' 이렇게만 쓰여져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있는 대로 편저나 공저, 번역서까지 다 쓰잖아요. 그런데 저서 20여 권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남들은 드러내 보이려고 안달인데 이분은 안 그러는구나. 셋째 줄에는 소주 1천 병 돌파. 그 뒤에 '이 계산은 소설가 이문구가 해준 것임.' 이렇게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런 거침없는 태도, 한편으로는 당당한, 자신 있는 모습, 그리고 허무주의 이런 게 좋았습니다. 툭 하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다가 살아나고, 이번에는 반드시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해서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저녁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지막으로 술이나 실컷 먹고 죽자고 해서 술을 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해서 곯아떨어졌다가 깨어 일어나 보니 제주여서 못 죽고, 이번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약을 잔뜩 사들고 깊은 산속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 약을 먹고 쓰러지면 나는 당연히 여기서 죽을 것이 아닌가 하고 산속에 들어가 약을 먹고 누웠는데, 마침 그 산에 예비군 훈련이 있어서 또 살아났습니다. 자꾸 죽으려고 하다가 살아나면서 그 허무주의에서 건져 올린 반짝이는 언어들, 누님도 없으면서 폐결핵이 걸린 누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것들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신부님한테 하면, 신부님은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 최근에 쓴 고은의 시인데 한번 봐라 하면서 주십니다. 사진을 보면 공장의 여공들이 속칭 구사대들에게 맞거나 똥물을 뒤집어쓰거나 끌려가거나 하면서 울고 있는 사진들 옆에 [사랑하는 딸들에게]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는 시였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폐결핵에 걸린 누님한테 쓴 아름답고 황홀한 시가 아니라,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구호성의 시들만 실려 있는데 신부님은 읽어보라고 주셨습니다.
또 어떤 날은 문학 얘기가 나와, 최근에 투옥되어 있는 문인의 글이라며 읽어보라고 주시는데 김지하의 [옥중 양심 선언문]이었습니다. 술이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성당 문을 나서다 보면, 성당 앞에 검은 짚차가 서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 술 생각이 나 신부님을 찾아가면 단식 중이라 못 마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신부님을 만나서 지금껏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문학과는 많이 다른 형태의 문학 세계에 관한 자료들을 새롭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은 선생님이 변하기 시작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고은 선생님의 책을 계속 읽다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삶은 비실천적 소극주의였고, 그런 비실천적 소극주의에서 벗어나 역사의 한복판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문학, 그런 사회와 정치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런 문학을 하겠다는 내용들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교 용어로 이야기한다면 소승적(小乘的)인 문학에서 벗어나 대승적(大乘的)인 문학을 하겠다는 글들을 읽으면서, 고은이 쓴 모든 글, 모든 생각들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무겁고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기에는 벅차고 무거운 주제라는 생각에 여기서 고은을 버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직 나의 절망을 다 주체하지 못하고 이렇게 허덕이고 있는 처지에 무슨 세상과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말인가, 세상과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문학은 때가 묻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번민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 삶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신부님과의 만남이 있은 다음 전혀 엉뚱한 곳에서였습니다.(략) [전남매일신문] 1면에 김준태 시인의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의 십자가여]라는 제목의 시가 아주 작은 활자로 실린 것을 군복을 입고 봤습니다. 그 오월에 광주항쟁이 끝나면서 그걸 봤습니다. 그걸 보면서도 굉장히 처절하게 부끄러웠습니다. '창비시선'들을 우연히 구해서 읽으면서도 많은 부끄러움이 들었습니다. 나 하나만 착하게 물들지 않고 나 하나만 젖지 않고 살면 된다고 생각해왔던 걸 뼈저리게 반성하였습니다. 비유를 한다면 흙탕물이 휘몰아쳐 내려가는 골짜기 바위 위에 혼자 앉아 있는 개구리가 흙탕물이 휘몰아쳐 가는 속에서 나 하나만 젖지 않으면 된다고 오불관언하던 모습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좀더 폭넓게 공부하고 문학에 대해서도 폭넓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제대를 하고 나와서 다시 공부하고 다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때까지 썼던 많은 시들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문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두미 마을에서}라는 시집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다. 대학 때부터 썼던 100여 편에 가까운 시들을 버리고 다시 공부해서 우리 식민지 시대에 빼앗기며 살았던 할아버지의 삶, 큰아버지와 아버지와 삼촌과 이 중의 누구 한 명은 징병에 끌려가야 하는데 누가 갈까 고민하다가 일본 군복을 입고 끌려가서 남태평양 전선에서 미군기의 폭격을 맞아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삶을 담았습니다. 또 5년 뒤에 큰아버지와 맞서 싸웠던 미군의 군복을 입고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국방군의 감찰이 되었다가 미군에 배속되어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아버지의 삶, 그리고 광주항쟁 때 군복을 입고 총을 들어야 했던 제 삶으로 이어지는 삼대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어떤 정신대 할머니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보면서, 배옥수 할머니의 이야기를 연작시로 쓰고 분단 현실이라든가 우리 민족에 관한 이야기들을 포함한 시들을 모아 창작과비평사에서 30대 초반에 시집을 한 권 냈었습니다. 이 시집의 상재를 전후하여 새로 공부하고 새로 문학 활동을 하고 동인 활동도 하면서 굉장히 바쁘게 지내다가, 결혼 생활을 2년 정도 되었을 갑자기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서른 두 살이었으니까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나와는 관계가 없고 지금 그것과 맞닥뜨려서 고민해야 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척에서 죽음의 문제와 맞닥뜨려서 그것이 누구한테나 올 수 있고 언제든지 올 수 있으며,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시에서 표현한 대로 무너지는 담벼락을, 갑자기 지나가는데 담벼락이 무너지는 바람에 기울어지는 담벼락을 두 손으로 받치고서 이걸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는 심정인 상황에 맞닥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누가 뭘 좋다고 하면 그걸 찾아서 먼데까지도 가서 약을 구해오는 등 백방으로 뛰어 다니다가 어떤 한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환자 본인이 자기 병명을 알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얘기를 못했다고 했더니 얘기를 해주라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얘기를 하느냐고 가족들 모두가 숨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자기의 병을 알아야만 살아나려고 더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사람이 부인하면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물건도 번쩍 들어서 옮기는 힘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에게 얘기를 해주는 것이 투병에 훨씬 좋다면서 얘기를 해주라고 강권했습니다. 알겠다고 하면서 계속 미루다가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되겠고 얘기를 해줘야겠다고 가까스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무슨 얘기부터 꺼낼 것인지 고민하다가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나마 바르게 살려고 생각을 하고 노력을 하는데, 그렇게 바르게 살려고 하는 날이 짧아지는 것, 이것이 가장 가슴아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병마와 있는 힘을 다해 맞서 싸우되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살의 어느 부분이라도 떼어주고 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병마와 싸우자는 얘기를 해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생각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간호를 하다가 병원을 나와 집으로 뭔가를 가지러 가는 길에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밤새도록 고민을 하였습니다. 다음 날 학교로 가다가 시골 담벼락 옆에 피어 있는 하얀 접시꽃과 몸 속에서 계속 피가 빠져나가서 창백해진 얼굴이 겹쳐서 떠오르면서, 교실에는 못 들어가고 혼자 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책상 위에 있는 종이 위에 내가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적어 나가다가 울면서 종이를 적시면서 아내에게 해줄 이야기를 정리를 해나갔습니다. 그게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입니다. 그걸 병상 머리맡에서 당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귀띔해 주면서 읽어 주었습니다.
울면서 그 시를 썼는데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시는 남도 울면서 읽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처절하게 아파하며 쓴 시라야만 남들도 함께 아파하면서 읽고 함께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울면서 쓴 시, 내가 정말 처절하게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면서 쓴 시라야만 읽는 사람도 섬세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닫고 배우고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원자력 병원에 입원을 하러 왔는데, 그곳은 암환자들만 찾는 병원이기 때문에 저는 암병동으로 아내를 데리고 가는 과정에서부터 주눅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절망의 거대한 성곽이다, 여기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절망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와서 환자들 또는 간호하는 사람들, 투병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다 절망이 아니라 사람은 절망에 처할수록 일어나려고 본능적으로 몸부림치게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게 되어 있는 사람이 모이면 살려고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는 게 사람이구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웃으면서 휠체어를 타고 치료를 받으러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희망이 없는데도 저렇게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게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는 동안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생각했습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한다면 얼마나 그 싸움은 해볼 만한 싸움이겠는가, 희망이 없어도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 더 적극적으로 살려고 몸부림치게 되어 있는 거라면, 살면서 이거는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고 믿는 그런 싸움을 한다면 그런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더구나 이건 정의다 진실이다라고 믿는 싸움은 한평생을 바쳐서 해도 얼마나 해볼 만한 싸움이겠는가. 암환자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다는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삶의 자세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웃의 할머니, 아주머니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저희를 아는 그분들이 또 친척들을 통해서 알게 된 그분들이 오셔서 날바닥에 무릎을 끓고서 환자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기도를 해주는 모습에서 느낀 게 많았습니다. 광주 민중항쟁 때 남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던질 때 나는 군복을 입고 총을 들었던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움을 참담하게 느낀 그 뒤에 새롭게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이른바 민족, 이웃, 사회를 위한 문학을 해야겠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나는 내 이웃의 구체적인 아픔을 향해서 무릎을 끓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로 시를 써 본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저 할머니가 자기 동네 사람 누가 아프다고 해서 무릎을 끓고 간절히 쾌유를 빌며 기도하는 것처럼 나도 내 이웃의 아픔을 향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로 시를 써본 적이 있었던가. 나도 날바닥에 무릎을 끓는 마음으로 문학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정말 진정으로 내 이웃을 위한 문학을 했던가. 말로만 이웃을 위한 문학이라고 했던 것은 아닌가. 이른바 80년대 민중문학이라는 거대한 흐름과 함께 새로운 문학을 하겠다고 하면서, 나는 정말 구체적인 아픔을 향해서 어떤 일을 하는 문학을 했던가. 이런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나는 무릎을 끓는 것은 비굴한 거라고 좁게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실존주의 문학을 했기 때문에 사람이 다른 어떤 존재 앞에서 무릎을 끓는다는 그 자체는 비굴한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는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고, 무릎을 끓었기 때문에 나약한 것이 아니라, 나약하지 않으면서도 온유한 이런 삶의 모습이 있는데 내가 너무 협소한 생각을 갖고 문학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들로부터 배웠습니다. 좀더 겸손한 낮은 자세로 문학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이 유한한 존재, 불안전한 존재인걸 긍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간이 유한하고 불안전하고 부조리하고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더 겸손해져야 하고 더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나만을 위해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을 크고 아프게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당신 뒷모습만 보고 살았어요'라는 말이 있지요. 아침에는 나가는 뒷모습, 돌아와서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뒷모습, 이런 뒷모습만 보고 살았다는, 짧게 살았지만 그동안 뒷모습만 보고 살게 했던 것에 대한 가슴 아픈 뉘우침이 [섬]이라는 시를 쓰게 했습니다. 많이 뉘우치고 나 중심으로 사는 생활에 대한 뉘우침들이 많이 시가 되었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당신의 무덤가에], [인차리] 연작시 같은 것들을 쓰게 되었습니다. 인차리는 아내의 산소가 있는 동네 이름인데, 자주 가면서 연작시들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중의 다섯 편의 시를 제가 활동하던 동인지에 발표를 했습니다. '분단시대'라는 동인지에 발표를 했는데, 다섯 편의 시를 동인지에 발표하고 난 그해 가을 장학사 한 분이 호출을 해서 불려 나갔습니다. 제가 발표한 다섯 편의 시를 빨간 사인펜으로 죽죽 그어 놓았더군요. [접시꽃 당신]의 여러 군데에 밑줄을 그어서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데' 이런 구절입니다. 여기서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뭐냐, 누구냐는 질문들을 하고,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싸움은 뭐냐고 질문, 조사를 받았습니다. 전두환 정권하였습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항의를 했고 대들었습니다.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고 조사가 끝난 다음에 시골 학교로 쫓겨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와 동인 활동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심지어는 동인지의 제 시 옆에 실린 판화가 문제가 되어서 쫓겨갔습니다.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심정적으로 제일 어려울 때였습니다. 큰애가 두 살, 동생이 태어난 지 넉달 만에 겪었기 때문에 아주 어린 엄마 없는 아이들을 두고 쫓겨가는 게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쫓겨가는 원인도 그렇지만 상황을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애들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작은 학교여서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밖에 오지 못하는 통에 대학에 강의 나가는 것도 끊어졌고 여러 가지로 힘들었습니다. 이 다섯 편의 시, [접시꽃 당신], [암병동], [병실에서], [당신의 무덤가에],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를 발표한 것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고, 쫓겨난 학교에서는 감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교무실에서 책을 읽다가 놓고 들어가면 교감선생님이 와서는 어느 출판사의 무슨 책인가를 적기도 했습니다. 매달 어딘가에 보고를 하고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한테 전화가 걸려오는지, 누가 찾아오는지, 찾아오면 만나는 것이 아니고 신원을 조사한 다음 돌려보내고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등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유일하게 하숙방에 혼자 앉아서 시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쫓겨간 시골의 하숙방에서 쓴 시들이 {접시꽃 당신}에 실려 있는 시들입니다.
이 시들의 원고를 실천문학사에서 근무하는 김사인이라는 친구가 이렇게 원고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시집을 내자고 해서 반대를 했습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이런 상황 속에 제 개인적인 넋두리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시집을 내려는 생각 없이 나 혼자를 지키기 위해 쓴 것들이니까 그냥 갖고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는데, 김사인의 대답인즉 "맨날 그런 시만 쓰고 있을 거냐. 어쨌든 그런 상황을 정리하고 가야 될 것 아니냐. 시집을 통해서 정리한다고 생각하자."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다른 말보다 '정리하자'는 말 때문에 시집 원고를 그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 시집을 나오면 그걸로 이 상황을 정리하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내는 동안에 인쇄소에서 교정본이 돌아갈 때 이걸 본 사람들이 교정지를 복사해서 나눠가지고 돌아다니다가 가지들한테까지 들어가서, 조선일보 기자가 이 시집이 나오기 전에 인쇄소의 교정본을 하나 들고 시골 학교로 찾아 내려왔습니다. 기자도 감시를 당하고 보내지 않고 신원 확인을 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난 뒤에 제 생각과는 다르게 신문 잡지를 통해서 알려지는 통에, 이정우 신부님의 시집 제목 {이 슬픔을 팔아서}처럼 나도 이 슬픔을 팔아서 장사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민망하기도 했었습니다. 슬픔 속에서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게 문학인데, 슬픔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 같아서 민망했었고 굉장히 견디기 곤혹스러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골 학교 선생 노릇을 할 수가 없어서 출판사에서 주간을 하는 선배한테 다른 일은 알아서 해달라는 위임장을 써서 주었더니, 도리어 영화도 만들고 하는 어려운 민망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랑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리고 아주 극진하게 잘한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들만 많아서 이 시집을 쓰게 된 것인데, 굉장히 아름다운 사랑을 한 것처럼 보여지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개인주의적인 사랑이 아닌 실천하는 사랑의 모습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천하는 사랑,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 땅의 곳곳에 스며드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내가 할 일은 실천하는 사랑으로서 만날 일은 아이들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아이들한테 이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 실천하는 사랑의 길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초임 교사 시절처럼 시를 읽어주다가 눈물이나 흘리는 선생이 아니라 정말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생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 편에 서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또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아붓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은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었고, 해직당한 끝에 10년 동안 거리의 교사로서 헤매 다녀야 하는 시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려다가 10년 동안 제자를 키웠다면 수천 명의 제자를 길러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았고, 그리 마침 감옥에 끌려가던 그해가 박사 과정을 수료하던 해였기 때문에, 조금만 더 견디었으면 공부도 다 마치고 했을 텐데 그렇지 못한 탓에 학자의 길로도 가지 못하고, 제대로 제자들을 길러내지도 못했습니다. 또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문학 독자들을 많이 잃기도 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은 평생에 한두 번 많은 독자들을 만나는 시기가 있는데, 잃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10년간 독자들을 잃는 시간을 선택해서 걸어왔습니다. 독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걸 방치할 수밖에 없었고, 제대로 된 문인도 운동가도 못 되었습니다.
나같이 시원찮은 사람도 앞에 나서서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시대인 80년대와 그리고 90년대 전반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집 {수평선 너머}에 제 심정을 꿰뚫은 듯 절창이 있더군요. '목사가 되려다 목사가 못 되고, 화가가 되려다 화가가 못 되고, 선생이 되려다 제대로 된 선생도 못 되고, 역사가가 되려다 못 되고, 그림을 그리려다 그것도 그만두고, 이렇게 하고 시를 쓰니 그 시가 잘 될 리가 있나.' 하고 시집 서문에 서 놓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10년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되려 큰 것을 얻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계속 걸어오는 동안 삶이란 무엇인가, 문학과 삶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가, 어떤 삶에서 어떤 문학이 나오는 것인가 등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세월이었습니다. 문학과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문학은 삶에서 우러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르게 사는 삶에서 제대로 된 문학이 나온다는 것은 크게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삶을 바르게 만들어 간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해직 10년 동안 어쨌든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애써온 것이 이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서, 8월말인가 서류를 냈더니 엊그제는 시청에서 교도소 생활을 했던 데가 어디냐, 체포 영장이 발부된 데가 어디냐 등을 물어왔습니다. 그때는 어려웠던 것 하나하나가 보상과 관련된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런 거들을 떠나서, 문학은 내 삶의 길이 되었다는 것,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마다 푯대가 되어 주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갈림길에서 문학이 이정표가 되고 길이 되어 주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길이 되어주면 고맙겠고, 문학의 역할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