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1493∼1583, 전남 담양)
송순(1493∼1583, 전남 담양)
송순은 1493년 전남 담양군 기곡면의 기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수초(遂初). 호는 면앙정이다.
스승 박상은 조광조에게 배워 영남 사림파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박상은 송순에게 "남을 다스릴 때는 경(敬)으로써 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직(直)으로써 하라"고 굳게 가르침으로써 훗날 그가 벼슬길의 격랑에 나가서도 관용과 대도로 일관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송순은 27세 되던 해(1519년 중종 14)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광조, 김구 등을 그를 보고 김일손 이후 이처럼 뛰어난 문장가는 없었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 김정 등을 귀양 보내자 이를 통분히 여기며 벼슬을 그만두려 했지만 부모를 생각하여 단념하기도 하였다.
송순은 김안로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 1533년(41세)에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고향 담양에 면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귀향하였다.
중종이 김안로 일당에게 사약을 내리면서 다시 중앙의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그는 승정원 우부승지,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인종이 즉위했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였다. 어린 왕을 대신해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윤원형 일당이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를 죽인 일을 비분강개하여 송순은 의미심장한 시를 지었다.
有 鳥 曉 曉 두려워라 우는 새
傷 彼 落 花 애닮다, 지는 저 꽃
春 風 無 情 봄바람 무정하니
悲 惜 奈 何 슬퍼한들 무엇하리
이 노래를 잔치 자리에서 진복창이 듣고 누군가를 비방하는 노래라고 단정지으며 누가 지었는지를 기녀에게 캐물었다. 노래를 부른 기생이 끝까지 송순이 지은 것을 실토하지 않아 화를 모면한 일이 있었다.
다시 벼슬길에 나간 송순은 진복창, 허자 등으로부터 '사특한 언론을 편 자'라는 모함을 받고 충청도 서천, 평안도 순천을 오가며 1년 6개월의 귀양살이를 했다. 황윤석은 이 일을 두고 "여러 무리에게 해를 입으면서도 오직 한 번만의 귀양살이로 평생을 지낸 분이 또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인격이 원만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었다.
이후 전주부윤, 나주목사 등을 거쳐 한성부 우윤, 의정부 좌참찬 겸 춘추관사를 끝으로 77세에야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90세까지 면앙정을 오르내리며 풍류을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다가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송순이 평생 관용의 대도(大道)를 걸었음은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을 해관(海寬)과 해용(海容)으로 붙인 데서도 잘 드러난다. 두 이름의 끝자를 합치면 곧 '관용'이 되니, 이것은 그의 삶의 지표라 할 수 있다.
송강 정철은 송순이 죽자 "조정에 있는 60여 년을 대로(大路)로만 따랐다."고 흠모했으며, 퇴계 이황도 그를 일러 '하늘이 낸 완인(完人)'이라고 하였다.
송순은 이러한 성품 외에도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즐길 줄 알았으며, 수많은 문인묵객과 교류하였다. 그의 [행장]을 보면 "김인후, 임형수, 정철 이하 20여 명의 후배들이 존경하고 따랐으나, 일찍이 성수침은 온 세상의 선비가 공의 문하에 있었다"고 하였다.
송순의 삶은 벼슬을 얻어 관직에 나아간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는 고향인 담양, 그것도 그가 지은 면앙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그 곳에서 거대한 문학을 이루었으니, 면앙정 주위로 모여든 문인들은 이후로 호남문학을 찬란히 꽃피우게 된다.
송순이 처음 이 정자를 지은 것은 나이 41세가 되던 조선 중종 28년(1533)이었다. 원래 이 면앙정터에는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금어옥대(金魚玉帶)를 두른 선비들이 이 곳에 모여 오락가락 하는 꿈을 꾼 그는 자기 아들이 벼슬을 할 것이라 여기고 공부를 시켰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집안마저 가난해졌다. 곽씨는 이 곳의 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송순이 그 터를 사 놓았다가 나중에 정자를 지었다. 뒷날 이 곳이 면앙정 가단을 이루어 허다한 학자, 가객, 시인들의 창작의 산실이자 휴식처가 되었으니, 곽씨가 꿈을 제대로 꾸었던 셈이었다.
'면앙정( 仰亭)'이란 "허리를 구부리니 땅이요, 우러러 보니 하늘이라"( 則地兮 仰則天兮) 하는 대목에서 따온 것으로, 송순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에게 굽어도 부끄럽지 않다"(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맹자, 진심장])고 다짐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곳 면앙정에서 열렸다. 회방연은 과거에 급제한 지 60돌의 잔치를 일컫는데, 공의 나이는 이미 81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국왕도 꽃과 술을 하사하였다. 이 잔치에는 정철, 기대승, 임제를 비롯하여 도 관찰사, 각 고을의 원님 등 1백여 명을 헤아리는 수많은 명사들이 모여 밤이 깊도록 즐겼다. 송순이 침소에 들려고 할 때 정철이 "선생의 남녀를 직접 메어 드리자"고 제안하여 정철, 고경명, 임제, 기대승이 일시에 가마를 붙들고 옹위하여 사람들이 찬탄했다고 한다. 현재, 면앙정에는 이황, 김인후, 기대승, 임제 등의 글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송순이 친구 정만종의 죽음을 듣고 지었다는 아래의 노래에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친구의 마지막 길에 참석하지 못하고 멀리서 보내는 통곡이 생생하다.
哀 吾 仁 浦 己 云 亡 슬프다, 내 정만종이 벌써 죽었다 하니
天 地 無 情 只 自 傷 천지도 무정하다, 다만 홀로 애를 태운다
一 日 暫 離 猶 有 戀 잠시 떨어져 있어도 그리웠는데
百 年 長 別 奈 爲 忙 이 영원한 이별을 어찌 잊으리
松 阡 歸 骨 悲 新 土 솔밭의 뼈가 되어 흙됨 슬프구나
人 世 流 名 泣 舊 香 세상에는 이름 남아 옛 생각 쥐어짠다
山 海 尙 分 千 里 路 산과 바다로 가로 나뉜 천리길이라
送 君 還 未 尊 壺 ? 마지막 보내면서 술 한잔도 못 올리다니
반면에 [면앙정가]에 나오는 아래의 구절에서 그의 일상을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술이 익어가니 벗이라 없을 쏘냐
불리고 타게 하며 켜면서 이으며
온갖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르락 앉으락 굽으락 젖히락
읊으락 휘파람 불락 마음대로 놀거니
천지도 넓고 일월도 한가하다.
벗과 함께 술을 먹는데, 노래를 부르면서 악기를 타고 계속 이어지게 하니 온갖 취흥이 일어 근심 걱정이 없다는 말이다. 온갖 소리를 악기에 맞추어 흥을 돋우는 술좌석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