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申寀浩, 1880-1936, 충남 대덕)
신채호(申寀浩, 1880-1936, 충남 대덕)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아침에 세수를 하고 들어오기만 하면 마치 아이들처럼 옷소매와 저고리 앞자락이 흥건히 젖어 있고 했다 한다. 망명시절인지라 옷도 단벌밖에 없어 외출하려면 아랫사람이 부엌에 들고 가서 말려야 했다. 옷 말리기에 짜증이 난 아랫사람이 어떻게 세수를 하길래 옷을 적시나 하고 문틈으로 세수하는 것을 숨어 보았던 것 같다. 머리를 뻣뻣이 세우고 오른손 한 손만으로 물을 길어 얼굴을 씻고 있으니 옷소매에 물이 흘러들고 저고리 앞자락이 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온 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소.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이기가 싫을 따름이오." 라고 답했다. 단재의 자존과 절개의 자세가 잘 드러난 면모였다.
단재는 줄담배를 즐겨하였지만, 술은 좋아하지만 많이는 못 마셔 두서너 잔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월급봉투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던 단재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온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으슬으슬 떨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며 예쁘게 차려 입은 여자가 갸웃이 내다보며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어머, 비를 맞고 서 계시는군요! 누추하지만 잠깐 들어오셨다가 비가 뜸해지거든 가시지요."
단재는 춥기도 하고 비도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아 그 집 사랑채에 잠시 들었다. 장지문을 열어 놓고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비오는 바깥 풍경이 가뜩이나 정서가 여린 그의 심사를 몹시도 뒤흔들어 놓았다. 가슴 밑바닥부터 촉촉이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며 문 밖으로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여주인이 주안상을 차려왔다.
아직 20대 청년의 객기 탓인지 이날 단재는 몹시도 취했다. 본시 술에 약한 체질이면서도, 빗소리를 들으며 낯선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 매우 흥취가 돋구어져 연거푸 마셔 댄 까닭이었다. 그러다가는 술에 취해 깜박 잠이 들었다. 이윽고 잠이 깨었을 때 그는 꽤나 쑥스러워서 안주인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잘 쉬었다 갑니다."
단재는 글을 한 줄 남기고 살그머니 그 집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이튿날 출근한 단재는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더니 한 친구를 붙들고서는,
"여보게, 급히 돈이 좀 필요하니 한 달만 좀 빌려 줄 수 없겠나?"
"아니, 자네 어제 월급을 타지 않았나? 그 돈을 하룻밤 사이에 다 썼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이쯤 되자 단재로서는 빈털터리가 된 어제의 일을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집에 와서 보니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지 뭔가? 그렇다고 어제 일을 안사람에게 내색할 수도 없고. 이봐, 내 사정을 좀 봐주게."
"하하하, 우리 단재 선생께서 정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빈털터리가 되셨구만!"
신문 논설에서는 더없이 명쾌한 논조를 제시하는 단재였지만, 인간적인 면모에서는 허술한 점도 이렇게 없지 않았다.
단재는 조국의 독립은 민중혁명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이후 단재가 관여하였던 신간회 운동이 무산되자 단재는 더욱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경도된다. 그리고 무정부주의 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하여 공작금 마련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결국 택한 방법은 외국위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임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이 위조지폐를 교환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체포된다. 2년 동안의 재판을 통하여 단재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 수감된다. 형기를 3년 정도 앞두고 병이 악화된 단재는 결국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순국한다.
단재가 여순감옥에서 서거한 이후 단재의 유해는 천안, 조치원, 청주를 거쳐 신백우의 집에 도착하였다. 단재의 유해가 돌아오긴 하였지만 묘소허가도 받을 수가 없어서 난감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단재의 친척 중에 면장이 있어 그의 묵인아래 암장을 할 수 있었다.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겨 이를 단재의 묘소앞에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