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섭(1922-2010, 평양)
손창섭(1922-2010, 평양)
손창섭은 1922년 평양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난다. 열네 살 때 집을 떠난 그는 만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쿄토와 도쿄에서 고학으로 중학교를 마친 뒤 니혼 일본대학에 들어간다. 1946년 학업을 접고 귀국한 그는 고향이 있는 이북으로 갔다가 1948년께 이남으로 넘어온다. 손창섭은 남녁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잡지사에서 근무한다. 이 무렵 틈틈이 소설 습작을 했다.
1952년 [공휴일]이라는 작품을 들고 문단에 나온 그는 몇몇 단편에 전쟁으로 망가지고 뒤틀린 한국사회의 현실과 이런 현실 속에 함부로 내팽개쳐진 인간의 무가치성, 모멸감, 허무를 압축해 보여주며 이내 1950년대를 자신의 연대로 평정해버린다. 서준섭은 “어두운 방, 뒷골목, 방황, 비오는 길, 고아, 질병, 가난”을 손창섭의 세계라고 말한다. 손창섭은 현대 한국 소설사에서 가장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창조해낸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손창섭의 소설에는 바깥과 소통이 막힌 동굴이나 감옥, 또는 여기저기 파리 똥과 거미줄이 얽혀 있는 창 하나 없는 방, 아니면 대문은 물론 안방과 건넌방, 문짝과 마루에 이르기까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밀폐된 공간이 자주 나온다. 더구나 그의 소설에서는 걸핏하면 비가 내리곤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일게 되는 눅눅한 느낌은 그의 소설을 한결 음습하고 무기력한 분위기로 밀어 넣는다. 게다가 이런 음습한 공간 속에서 서식하는 인간들은 한결같이 팔이나 다리가 없거나 폐병환자, 간질 병자, 백치, 정신병자, 벙어리 등의 형태로 성치가 않다. 실제로 이와 같은 불구나 온갖 병자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1950년대 한국 사회에서 흔히 눈에 띄던 인간 군상이기는 하다.
손창섭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그런데 그가 그리는 인간상은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간 자체에 대해 냉소'로 일관된다.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먹고 배설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그림으로써 인간을 동물적 존재로 전락시킨다.
손창섭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환멸은 6ㆍ25 체험과 피난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부산 피난시절 많은 사람들은 임시로 지어진 가건물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손창섭의 생활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바라크'라고 불리는 가건물에서의 생활은 오물처리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상수도 시설은 상상도 할 수조차 없는 생활이었다. 바라크에서는 어떤 인격적 생활도 불가능했으며, 극한적 상황에 내몰린 절박한 인간으로서의 생명 유지만이 가능했다.
손창섭은 이러한 극단적인 생활에 처해진 인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손창섭 소설에 인물들은 동물원 우리 속에 갇힌 동물을 보고 있는 듯한 관찰자적 시선을 통해 희화화되고 있다. 그러기에 손창섭의 문학을 폭로의 문학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는 극한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이 드러내는 추한 면들이 작가의 냉소적 시각에 의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손창섭 소설은 특히 당대의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작품 속에 드러나 있는 우중충하고 암울한 분위기,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인물들의 심리상태, 불구적인 인물들이 드러내는 자조의식과 자기모멸의 감정 등이 전후의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를 대변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 세대들은 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에게서 자조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그 인물들을 통해 자기 연민의 감정까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1961년 [신의 戱作]에서 주인공 S는 어릴 때 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한 뒤 보복 심리, 인간혐오증, 거세공포증, 야뇨증 등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것은 자살 미수, 섹스콤플렉스, 동료들에 대한 폭력적 행위로 나타난다. 도입부에 “시시한 소설가로 통하는 S는-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삼류 작가 손창섭 씨”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의 희작]은 작가 스스로 겪은 바를 바탕으로 씌어진 소설이다. 이 소설을 대하노라면, 손창섭에게 문학은 전쟁으로 훼손된 현실과 개인사적 절망이 뒤엉킨 허무의 늪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 안간힘, 유일한 극복수단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잉여인간]을 통하여 허무의 늪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온 뒤 [신의 희작]을 통하여 내부에 쌓여 있던 찌꺼기를 토해낸 손창섭은 후련함과 함께 아쉬움을 느낀다. 자신의 삶을 틀어쥐고 있던 절망과 허무로부터 풀려날 듯한 예감을 받은 것이다.
다음은 정기 간행물 '작가연구 제1호(1996) -손창섭 특집-' 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손창섭에 관한 특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일본으로 건너 간 이후의 손창섭의 행적이 묘연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한창 활동할 때에도 작품 활동 이외에는 매체나 지면을 통해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몹시 꺼렸고, 문단의 교우관계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그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작가였는데, 일본에 건너간 이후에는 아예 국내와 연락을 끊다시피 하여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손창섭은 현재 도쿄에 부인과 단 둘이 살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손창섭이 일본으로 귀화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그와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는 한 지인은 그가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 국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생계는 부인이 일을 해서 꾸려 나가고 있고, 손창섭은 전혀 벌이가 없는 상태다.
손창섭이 왜 절필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달랐다. 한 지인은 손창섭의 도일(渡日)은 그가 소설창작에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을 때 다른 수입이 전혀 없었고 오로지 원고료 수업에 의지해 생활했는데, 원고료가 넉넉지 않아서 언제나 힘들어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 당시 작가의 원고료는 일제 시대보다도 더 낮은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또 다른 지인은 손창섭이 도일하기 직전에 잠시 안양 부근에서 파인애플 농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당시 파인애플의 소비자는 대부분 부유층들이었는데, 손창섭은 도둑놈들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이 안돼 곧 작파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지인은, 손창섭의 도일 이유가 복합적이어서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전제한 후, 도일을 결심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5.16 이후 군사 정권 아래에서의 타락하고 부패한 현실에 대한 환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손창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여생을 마치는 것이 일본인 아내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도일 직후에는 출판사에서 편집과 교정 일을 보면서 아주 가끔씩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다고 하는데, 귀국의 이유는 과거 어려웠던 시절에 신세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그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손창섭을 연구한다니 반갑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이 다시 한국에서 회자되고 거론되는 것을 결코 반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자신의 도일 후 행적을 이런 식으로라도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 절교하자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손과 연락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달라는 당신들의 부탁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 설사 내가 시도한다고 해도 그가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 건너 간 후에는 일본 이름으로 일본의 문학 잡지에 몇 번 작품을 발표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손창섭의 개인사에 관해서는 비단 도일 후만이 아니라, 그의 성장기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연구자들도 대개 그의 자전적 작품이라고 알려진 '신의 회작'에 기대고 있는데, 이 작품이 사실과 얼마나 일치하며, 어느 정도가 픽션인지에 대해 자신있게 이야기하기 무척 어렵다.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보았지만, 미흡하기 짝이 없다. 확인한 것이라곤 그가 아직 생존해 있고,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