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1961-, 경북 예천)
안도현(1961-, 경북 예천)
안도현은 1981년 <대구매일신문>에 시 「낙동강」이, 그리고 1984년 <동아일보>에 시 「서울로 가는 全琫準」이 신춘 문예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시인이라는 명함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미 <서울로 가는 全琫準>(민음사, 1985),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1994) 등을 통하여 잘 팔리는 시인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래는 정철훈의 글이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시인 안도현이 전북 장수군 산서면과 연을 맺은 것은 1994년 봄이었다. 전교조 교사로 해직된 지 5년만에 발령장을 받아들고 찾아간 산서면은 그의 표현대로 “산토끼와 발맞추기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변변한 하숙집 하나 없어 자취를 하기로 작심한 그는 월 3만원짜리 방을 얻어 밥을 짓고 빨래를 했다.
자취는 두번째의 일이었다. 예천의 한 점방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슈퍼마켓이 들어오면서 집안이 몰락, 경기도 여주로 이사를 했고 대구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장학금을 준다는 바람에 대학도 덜컥 원광대 국문과를 선택했다.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경기도에서 전라도로 전전하던 이 젊은 유목민의 피로를 산서는 자연의 언어로 씻어주었다. 신경림 시인이 “산서 생활 3년이 오늘의 안도현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라고 지적했듯, 그의 시적 서정의 바탕에는 산서 시절의 추억들이 출렁거리고 있다. 예컨대 그가 산문집 ‘사람’에서 “봄이 오기 전이었는데 연탄불은 왜 그렇게 자주 숨을 놓아버리는지…. 거기서 일년 가까이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 앞에 쪼그려 앉아 쌀을 씻고 걸레를 빨았다. 그리고 시를 썼다”고 진술한 회고는 후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 전문)를 잉태한다.]
아래는 시인의 글이다.
[다섯 해 전, 이른바 전업작가가 되려는 마음을 품었을 때, 솔직히 나는 밥이 걱정이었다. 시인은 가난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살아야 된다는 통념이 널리 유포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문학으로 밥을 얻겠다고? 그게 가당한 일이기는 할까? 내가 불순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한 적도 있었다. 문학에 비해 밥은 여전히 불경스러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청탁이 오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서 밤새워 자판을 두드렸다. 호구지책이었다. 한 해 동안 이천 매 가까운 산문을 쓴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바닥이 보였다. 더 이상 물러설 데도 나아갈 데도 없었다. 기껏 한 공기의 밥을 위해 나를 소진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또 다른 회의가 나를 짓눌렀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문학이 내 속에서 자꾸 꿈틀거렸다.
내가 문학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게 아니었다. 문학이 몽매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글쓰기란, 나라는 인간을 하나씩 뜯어고쳐 가는 일이었던 것 같다. 문학에 의해 변화된 내가 흔들릴 때마다 문학은 다시 나한테 회초리를 갖다 댔다.
문학은 나에게 늘 초발심의 불꽃을 일으키는 매서운 매였다. 문학은 엄하고 무섭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문학을 가르쳐 준 세상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특히 나는 팔십년대와 함께 이십대의 청춘을 보냈다는 것이 더없이 고맙다. 팔십년대는 풋내기 문학주의자에게 세상이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걸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스무 살의 봄날, 시집을 끼고 앉아 새우깡으로 소주를 마시다가 계엄군에게 걸려 묵사발이 되도록 얻어터진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시집보다 역사나 사회과학을 읽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가슴에 ‘펜은 무기다’라는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골방에서 광장 쪽으로 내 관심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천연덕스럽게 드러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수록 시대의 무거움이 버거워 나는 끙끙댔다. 그 끙끙대던, 그 전전긍긍하던 시간들을 나는 참으로 소중하게 여긴다. 문학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긴장하고 현실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단순한, 그렇지만 한 번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그런 고민을 어깨에 얹어준 것만으로도 팔십년대에게 빚진 게 많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빚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 빚을 갚으려고 나는 쓴다.
내 등단 작품의 제목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인데, 왜 하고 많은 인물들 중에 하필이면 시에다 전봉준을 불러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를 쓰게 한 것은 역사책 속에 남아 있는 전봉준의 사진 한 장이었지만, ‘광주’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현실을 지나간 역사를 앞세워서라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이 세상한테 시로서 빚을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시에도 상투적인 엄살이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이름 없는 들꽃’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너무 유치하기까지 해서 지금 들여다보면 몸둘 바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한테 그것보다 더 절실한 노래는 없었다.
한국에서 시 쓰는 자가 ‘어둠’이라는 비유를 자기 검열 없이 쓸 수 있게 된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채 이십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서 시를 쓰는 일은 슬픔이자 또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문득 ‘이름 없는 들꽃’이 ‘애기똥풀’로 보이게 된 시기가 있었다. 해직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복직을 했을 때였다. 복직은 모처럼 찾아온 기쁨이었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한 절반의 승리였다. 전교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신규 채용 형식으로 학교로 돌아간 것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싸웠으나, 돌아간 학교는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이 벽처럼 느껴졌다. 그 벽을 무너뜨리는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쳐 있었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참담한 세월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시를 쓰는 일 뿐이었다. 돌아보면 팔십년대는 현실의 신명과 시의 신명이 일치하던 시기였다. 현실과 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치 기관차처럼 내달릴 수 있었다.
시가 예술성의 울타리를 넘어 탈선을 감행해도 용인을 해주던 시대가 끝나자, 기관차도 기관사도 승객들도 모두 길을 잃고 망연히 철길 가에 주저앉아버렸다.
삶과 문학, 두 가지를 앞에 놓고 나는 뭔가 전환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 자신한테 주문했다. 그 주문의 목록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시에서 지나친 과장과 엄살을 걷어낼 것, 너무 길게 큰소리로 떠들지 않을 것, 팔목에 힘을 빼고 발자국 소리를 죽일 것, 세상을 망원경으로만 보지 말고 때로 현미경도 사용할 것, 시를 목적과 의도에 의해 끌고 가지 말고 시가 가자는 대로 그냥 따라갈 것, 시에다 언제나 힘주어 마침표를 찍으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시가 연과 행이 있는 양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고할 것….
그러자 바깥에서 또 다른 주문이 들어왔다. 이 세상은 복잡하고 갈등으로 얽혀있는 곳인데, 당신의 시는 그런 갈등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너무 편안하고 화해하는 쪽으로 한 발 앞서가 있는 게 아닌가? 당신의 시는 낭만적인 구름 위에서 거친 땅으로 좀 내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주문에 나는 이제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취중에 떠들거나 어줍잖은 산문으로 나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오직 시로 나는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 시는 천천히 오래도록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해서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인지 시를 쓰는 동안에는 시간이 잘 간다. 마치 애인 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처럼. 남의 시를 읽을 때도 시인이 장인적 시간을 얼마나 투여했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시간을 녹여서 쓴 흔적이 없는 시, 시간의 숙성을 견디지 못한 시, 말 하나에 목숨을 걸지 않은 시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시를 읽고 쓰는 것, 그것은 이 세상하고 연애하는 일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연애 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가슴으로만 하는 연애, 손끝으로만 하는 연애도 나는 경계한다. 가슴은 뜨겁지만 쉽게 식을 위험이 있고, 손끝은 가벼운 기술로 사랑을 좌우할 수도 있다. 가슴과 손끝으로 함께 하는 연애, 비록 욕심이라 할지라도 내 시는 그런 과정 속에서 태어나기를 꿈꾼다.
몇 해 전에 전주 근교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완주군 구이면이라는 지명을 따서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 구이구산(九耳九山)이다. 겨우 시 몇 줄 끼적이는 시인 주제에 무슨 작업실이냐고, 누군가 핀잔을 준다 해도 괜찮다.
전업으로 글을 쓰면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전화는 도대체 외로워할 틈을 주지 않고, 나를 지치게 만든다. 전화는 나를 불러내고, 나에게 독촉하고, 내가 전화기 옆에 붙어 살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나는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피신해서 외로움이라는 사치를 좀 누리는 중이다.
문학은 여전히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외로움의 거름을 먹지 않고 큰 문학이 있다면 그 뿌리를 의심해 봐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문학하는 일은 헛것에 대한 투자임이 분명하다. 미국의 어느 교육심리학자가 ‘태양에 플러그를 꽂는 일’이 창의성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를 쓰는 일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헛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쫓아가는 동안 나는 시인이다.]
다음은 안도현이 대구 대건고 시절의 도광의 선생을 회상한 내용을 줄인 것이다.
[1977년 봄,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당시 대구 남산동에 자리잡고 있던 대건고등학교 별관 5층건물 맨 꼭대기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갔다. ‘문예실’이라는 낡은 팻말이 매달려 있는 그곳은 일반 교실의 3분의 1 크기였는데, 거기에선 어깨가 딱 벌어진 선배들이 시커먼 교복 주머니에 기세등등하게 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어리고 연약한 후배 하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문예반에 들어가려고 용기를 내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곳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날 처음 가본 문예실 벽에는 길게 늘어뜨린 한 폭의 시화가 걸려 있었다. ‘풍경의 경사(傾斜)’라는 좀 까다로운 제목의 그 시는, 어느 바닷가 마을의 오밀조밀한 풍경을 배경 그림으로 깔고 있었다.
‘傾斜’를 비롯한 몇 개의 한자가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를 괴롭혔지만, 빨려들듯이 읽었다. 이렇게 긴 시가 겨우 세 개의 마침표만 가지고 있다니! 나중에야 알았지만 시의 호흡이라는 것을 나는 이 시를 읽음으로써 조금씩 깨치게 됐던 것 같다.
“선배님, 저 시는 어떤 선배가 쓰셨는데예?”
“임마, 저 시는 선배가 쓴 게 아이고 도 선생 시다. 아니, 도 선생도 우리 학교를 졸업한 동문이니까 니 말대로 선배는 선배다.”
문예실을 나와서도 내 머릿속에는 ‘풍경의 傾斜’라는 시의 앞부분이 맴돌며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사는 사람의 심성까지도 풋내기 문학소년의 마음으로는 헤아려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1학년이 다 끝나가도록 나는 선생님과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선생님에 대한 문학적인 연모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과의 대화 창구는 당시 3학년 문예반장이던, 지금은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덕규 형 한 사람뿐이었다. 조무래기 신입생인 나에게도 선생님은 범접하기 어려운 큰 산과도 같았다.
다만 선생님께서는 술을 무척 좋아하신다는 이야기, 수업시간에 유난히 시에 관한 말씀이 많으시다는 이야기들을 풍문으로 전해들을 따름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하시다가도 곧잘 주전자 물을 들이켜곤 해서 금붕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전날 과하게 마신 술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도광의 선생님은 정말 내 상상 속에 숨어 있던 전형적인 시인의 모습이었다. 키 180cm가 넘는 미루나무같이 훤칠한 선생님이 천천히 걸으면서 간혹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길 때면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쓸쓸해져서 시야에서 선생님이 사라질 때까지 서서 바라보곤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가을비가 오는 날, 대구의 중심가인 동성로 한복판에서 바바리코트를 입고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선생님을 누군가가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가슴이 사정없이 울렁거리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2학년이 되자 드디어 선생님은 나를 부르셨다. 1년 동안 선배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학교 바깥에서 열리는 이런저런 백일장에서 몇 개의 상장을 받아온 덕분에 선생님의 눈에 들었던지 그동안 쓴 시들을 가지고 한번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황송하고 기뻐서 이튿날 습작노트를 들고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내가 쓴 시들을 한참 들여다보시던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은 내 노트에다 빨간 볼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하고 수많은 가위표와 동그라미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의 빨간 볼펜이 내 노트에 적힌 시에 닿을 때마다 나는 생살이 베이는 것 같은 지독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전정가위에 싹둑싹둑 잘리는 생나무의 아픔이 또한 그러하리라. 스무 줄짜리의 시가 열 줄도 채 안 되게 앙상하게 뼈만 남는가 하면, 선생님의 볼펜 끝에서 아예 자신의 숨소리를 놓아버리는 시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간혹 한 마디씩 던지는 말에 그저 “예, 예, 알겠습니다”만 되풀이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도마에 올려진 생선에게 가하는 난도질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반론 한번 제기하지 못하고 그냥 교무실 문을 닫고 나온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내가 밤을 하얗게 보내면서 고치고 또 고치고 해서 들고간 시가 무참하게 찢어졌다는 생각에 아예 시 쓰기고 뭐고 다 포기해버릴까 하는 자포자기의 마음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날의 비참함이 없었다면 나는 언어를 함부로 남발하거나 혹사시키는 언어의 난봉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시인이란, 언어를 다스리면서도 언어로부터 다스림을 당하는 자가 아니던가. 혹시 내가 쓴 시에 언어를 절제하는 능력이 손톱만큼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다 도광의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리라.
이따금 접할 수 있었던 선생님의 시를 나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 “교외로 나오니 햇볕은 나뭇잎을 흔든다”로 시작되는 ‘물 오른 포플러’며, “명절날 둑길 위로 분홍치마 자락이 소수레 바퀴의 햇살에 실려 가면”이라는 구절이 아름다운 ‘甲骨길’이라는 시를 즐겨 읊조렸으며, “서서 우는 타관 풀잎”이라는 시구를 읽으며 궁핍한 자취생이던 나 자신을 머쓱하게 돌아보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분교’ ‘저녁답이면’ ‘봄물빛에 묻어오는’ ‘눈 오지 않는 겨울’ 등의 시가 끌어당기는 힘과 시에서 풍기는 따스하고 그윽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의 시는, 당시 유행하던 현학적인 모더니즘류의 시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촉촉한 물기 어린 서정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자의 쓸쓸함과 회한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었다. 혹시 내가 쓰는 시에 인간의 냄새가 눈곱만큼이라도 배어 있다면 그것도 다 도광의 선생님에게서 익힌 것이리라.
선생님은 일찍이 1965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됐고, 그 후 ‘현대문학’지의 추천을 받은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인 1982년에야 ‘甲骨길’이라는 표제로 첫 시집을 내셨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선생님께서 문단에 나온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인쇄매체의 급속한 발달과 흘러넘치는 종이의 홍수 속에서 이런 일은 아주 못난 시인이거나 아주 특별한 시인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이른바 ‘문단정치’하고는 담을 쌓고 글을 쓰는 선생님의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특별한 존재로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는데, 나는 여기서 서슴없이 도광의 시인은 아주 특별한 시인이라고 말해야겠다. 이 한 권의 시집 속에는 선생님의 욕심 없는, 그러나 고투(苦鬪)의 흔적이 역력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두 번째 시집을 2003년에 내셨다. 문단에 등단한 지 40여 년 만에 낸 시집의 제목은 ‘그리운 남풍’(문학동네)이다. 시집 초판이 나온 날 서울에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모여 조촐하게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때 술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시던 선생님을 뵈면서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던 기억이 난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저물 무렵’ 한 편만 읽어봐도 선생님이 얼마나 말과 감정을 아끼는 시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서 울던 목청 높은 산꿩이
해질 무렵에는 무밭으로 내려와
낮은 목청으로 운다
기우는 햇살이 설핏해지면
입술 퍼런 산그늘이
주막 쪽으로 내려온다
이 시각 또한 비어 있는 마음들도
주막 쪽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말을 경제적으로 운용하면서 한 폭의 풍경을 이렇게 밀도 있게 그려내는 시를 요즘은 보기가 매우 드물다. 산꿩의 울음소리도 잦아드는 저물 무렵의 스산한 기운을 “입술 퍼런 산그늘”로 압축하는 것, 그 산그늘과 함께 허한 마음을 주막 쪽으로 집중시키는 결구(結句)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이런 풍경의 세계로부터 멀리 떠나왔으나, 짧은 시 한 편을 통해 그 아련한 세계의 주막으로 초대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누군들 그 주막집에 가고 싶지 않겠는가. 비록 주머니가 텅 비어 궁한 신세라 하더라도 주머니에 두 손 찌르고 그 주막집 부근을 얼씬거리고 싶지 않겠는가. 다 도광의 선생님 덕분이다.
고등학교 때, 도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셔서 교무실로 가 봤더니 서무실에 가서 봉급을 좀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달치 선생님의 봉급이 담긴 그 봉투를 차마 선생님께 전해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겉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실수령액 : 7천원’
그 월급봉투를 갖다드렸더니 선생님은 나에게 묻듯이 말씀하셨다.
“내가 이 달에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얼마 안 되는 박봉을 가불해서 과연 선생님 혼자 그것을 모두 술값으로 썼는지, 아니면 쪼들리는 살림에 보탰는지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그게 선생님의 삶의 방식이고 현실일진대 제자인 내가 어찌 가벼운 입을 놀려 깝죽댈 수 있겠는가. ‘실수령액 7천원’의 선생님은 나에게 그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스승이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