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1897-1963,서울)
염상섭(1897-1963,서울)
1925년 말 시대일보가 내분으로 문을 닫음로써 염상섭은 다시 무직의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이듬해(1926년) 다시 일본에 건너간다. 염상섭은 도쿄에 있는 동안 나도향, 양주동과 자주 술을 마시며 2년의 세월을 보낸다. 양주동은 그 무렵의 염상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상섭은 참으로 좋은 술동무였고, 당시 근 일년 동안의 동거 생활은 나의 반생 중에도 한 즐거운 추억이다. 그 때 우리들 주량은 백중을 다투리만큼 거량(巨量)이어서 날마다 필수량이 거창했으나, 둘의 포켓은 자못 소슬(蕭瑟)하였다. 그런데 혹시 돈이 생기면 술턱을 내는 폼이 두 사람이 아주 각기 달랐다. 나는 학비로 고료가 오면 그 중에서 먼저 방세를 치르고 그 나머지 액수를 그에게 고백하고 둘이 나가 마시는데, 상섭은 그렇지 않아 고료만 오면 시치미를 떼고 왔다는 말도, 액수도, 일체 말하지 않는다. 내가 벌써 그 눈치를 알고 내 돈 약간을 보이면서 값싼 술집으로 가자 한다. 그가 못이기는 체하면서 나를 따라 나선다. 주밀한 그가 고료로 온 전액을 그의 조끼 안주머니 최심부(最深部)에 감추었음은 물론이다. 그래 나의 값싼 술턱으로 둘이 다 우선 거나하게 취한다. 나는 그만 돈이 벌써 떨어졌음을 그에게 고하고, 일어서 돌아가자고 그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자, 예서부터가 나의 작전의 승리다.
「자, 상섭형, 가 !」
「못가 ! 다른 데 가서 더 먹어 !」
「돈이 없는데……」
「아따, 없긴? 히히히, 예 있어. 이것 봐, 일금 대매(大枚) 삼십원야라.」
이리하여 최심부에 비장되었던 대매 삼십원은 대번에 일약 최전선으로 출동된다. 삼십원이면 그때 한달 숙식비가 넉넉한 돈이다. 그래 두 사람은 이번엔 고급 바로, 카페로 발전하여 권커니 작커니 일·양주로 거듭하여 전액을 한푼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 만다! 나는 먼저 여간 한 턱을 내고 뒤에 인색함에 반하여 상섭은 전주 꼽재기 이상 굳다가도 몇 잔 술에 가나하기만 하면 뒷일은 삼수갑산 아랑곳 없이 있는 돈을 모조리 다 털어 끝장을 내고야 하는 성미이다."
그는 '주정'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이렇게 술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한참 젊은 나이에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 지식인의 고뇌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처럼 술을 마시면서도 소설을 계속 썼고 소설 속에서 당시 사회의 모습과 개인의 삶의 양상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
부인 김영옥이 남긴 글에 따르면, 횡보는 평소에 소주나 배갈 같은 독한 술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것도 같이 술상은 받은 삶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셔댔다. 언젠가 중국인으로부터 질이 좋은 배갈을 선물받았는데, 초저녁부터 집에서 술잔을 든 것이 자정이 되면서 바닥나 버렸다. 집안을 뒤져 고급 양주 한 병을 발견한 횡보는 그 때부터 또 양주 반 병을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마셨다. 독주를 좋아했던 횡보였으나 북어 같은 마른 안주가 있어야 술을 마셨다. 여기에 술상에서 꼭 빠져서는 안될 것이 술국이었다. 그렇다고 횡보가 술국에 수저를 대는 일은 몇 번 없었다. 하루 걸러 평균 한 번씩 술을 마셔 댔다 하니,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횡보는 진정 술 체질이었나 보다.
첫아이를 유산한 아내에게 아기가 생겼다. 아내는 상섭에게 이번 아이까지 유산시키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말과 함께 술을 끊든지 자신을 친정으로 아예 보내주든지 결정을 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횡보는 술을 끊겠다고 또 다짐을 했다.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했지만, 하루 이틀이 가고, 한 달 두 달이 가도 횡보는 정말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1931년 첫아이를 낳고도 횡보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지낸 지 2년 만인 첫아이 돌 때 그만 횡보는 또 딱 한 잔만이라는 말과 함께 그날부터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줄곧 술에 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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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섭은 오랜 辛苦로 극도로 쇠약해진 몸에 잠시도 붓을 놓으려 하지 않았고, 정신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신경이 날카로와지면서 헛소리와 고함으로 그 괴로움을 참으려 했던지 몹시 불안해 하며 안절부절을 못하다가 급기야 의식을 잃고 인사불성 지경에 빠지기를 거듭하니 식구들은 더욱 불안과 고통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메디컬센터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입원 후에도 하등의 차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악화됨을 보고 의사의 허락을 받아 자택으로 옮겼다. 1963년 3월 13일 저녁 때였다. 둘째딸이 신부님을 모셔왔고, 고통과 괴로움의 13일 밤이 새고 14일 아침이 되어 부인이 평생 즐기던 정종 3수저를 떠 입에 넣으니 永眠했다 한다. 시간은 上午 9시쯤이었고 상섭의 나이 만 6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