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1298-1351 , 충남 한산)
이곡(1298-1351 , 충남 한산)
가정(稼亭) 이곡은 찬성공(贊成公)의 세 아들 중 막내로 1298년(충렬왕24) 충남 한산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읜 이곡은 고향을 떠나 반대편인 동해 바닷가의 경북 영해로 갔다. 거기서 그 지방의 토호인 진사(進士)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의 사위가 된다.
이곡은 장인인 김택의 후원으로 도평의사사의 서리로 있다가, 2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다. 지방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인 이곡은 고려에서 벼슬하는 것이 쉽진 않았던 바, 원나라 과거를 통해 발신할 뜻을 세운다. 36세에 원나라 과거에 합격한다. 신라 시대 때 최치원이 당나라 과거 전시에 상등으로 급제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 아들인 목은 이색도 원나라 전시에 급제하여 부자 2대가 문명을 떨쳤다. 이후 이곡은 고려와 원을 오가며 벼슬을 했다.
이곡의 스승인 이제현은 일찍부터 제자의 학문적 능력을 크게 평가하고 있었으며, 이곡이 과거에 합격하자 자신의 일인 양 축하해주었다. 이후 이제현은 왕에게 글을 올려 자기를 대신하여 서연강설의 직을 이곡과 안축이 맡도록 건의했다. 제자에 대한 신뢰가 담긴 이제현의 글을 보자.
"첨의찬성사 안축과 밀직부사 이곡은 청백하고 경개하여 허식이 없고, 단아하고 방정하여 지키는 바가 있습니다…(이들은) 학문이 동방에서 제일 높고 재명은 상국을 진동시켰습니다. 이 두 준수한 사람을 가려 이 어리석은 사람과 교체하시어 중석을 깔고 경의를 담론하면 문치를 숭상하는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곡은 원나라에 머무를 때, 원나라 순제에게 간하여 고려의 조혼 풍속까지 유발시켰던 공녀제도를 폐지케한 공로도 있다.
이후에도 이곡은 관직에 계속 있다가, 1351년(충정왕3) 54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동문선》에 100여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에 가전체 문학인 ‘죽부인전’도 있다.
현재 한산의 문헌서원과 영해의 단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아래는 이곡의 시이다.
苦寒(고한)
朔吹搖空歲暮天(삭취요공세모천)
颼颼老屋讀書氈(수수로옥독서전)
一寒到骨那能解(일한도골나능해)
萬事關心只自煎(만사관심지자전)
衾鐵夜深明積雪(금철야심명적설)
樵山市近絶炊煙(초산시근절취연)
詩人耐冷今猶古(시인내랭금유고)
擬訪梅花澗水邊(의방매화간수변)
폭풍이 몰아치는 그믐날
우수수 낡은 집, 담요 둘러 쓰고 글을 읽는데
추위가 뼈골에 사무치니 어찌 녹일 수 있을까
온갖 잡념 심란하여 홀로 속을 태우네.
깊은 밤 이불은 쇠처럼 차고 눈이 쌓여 훤한데
나무할 산과 시장이 가까우나 불기는 끊기었다
시인이 추위 견디는 것이야 예나 이제나 같거니
아, 언제나 매화꽃 찾아 시냇가를 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