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수복(1924-1986, 전남 함평)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7:34

이수복(1924-1986, 전남 함평)

 

 다음은 범대순의 글을 정리한 것이다.

 [이 비 그치면 /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는 이수복의 시 봄비의 전문이다. 70년 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시로 여러 사람이 암송하고 있는 시이다.  그리고 이 봄비의 시비가 지금 광주 사직 공원에 서있다.

 이수복의 죽음은 봄비처럼 조용하였다. 그는 기독교 신자였지만 장례식은 교회가 아닌 방림동 허름한 자기 집에서 없는 듯 행해졌다. 그의 명성에 비해 조문객들도 별로 없었다.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생전 이수복의 생활은 그의 죽음처럼 아쉽고 조용한 것이었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시 쓰고 혼자 책읽고 그리고 혼자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후학이 찾아가면 그는 언제나 서쪽 작은 자기 방에 앉아 있었다. 당신의 시 봄비처럼 조용하고 다수운 사투리로 그는 말했다. 그는 독서광이었다. 어느 일요일 날 내가 찾아갔을 때 그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고 있었다. 책은 영국 현지에서 최근에 출판된 것을 손철 선생이 사온 것이었다. 손철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수복은 그 원전을 완독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수복은 1950년대 박재삼 이동주 등과 같이 한국의 서정시를 대표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 다만 한 권의 시집을 냈을 뿐이다.  봄비가 그것인데 이 시집에는 봄비를 비롯하여 3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34편은 그의 시 전부이다. 그 시집 조연현의 서문에 의하면 이 34편은 그가 20년에 걸쳐 쓴 시 가운데 고른 것이라 했다. 그 귀함에 지금도 숙연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쓴 이 시집 후기에 의하면 미당이 추천한 시 동백꽃 실솔 그리고 봄비 말고는 마음에 든 시가 없다고 겸손한 말을 적고 있다. 그리고 변화가 없이 너무 단조롭다는 진솔한  자기비판도 있다. 시다운 시를 한 편도 못쓰고도 시집을 내는 모순에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도 말한다.

 오늘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그의 생각 그의 시 그의 인생은 짧았는가. 그리고 작았는가. 그의 시 34편은 그 수에 있어서 아쉬운 것인가. 최근 우리는 노자를 생각하면서 수가 얼마나 헛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이수복은 그의 인생과 시를 통하여 겸손하고 정숙하고 고결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이룩한 시인이었다.]

 다음은 백수인의 글이다.

 [이수복(조선대 국문과 졸업)을 시인으로 추천한 서정주는 우리대학에 교수로 재직할 때 그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서정주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수복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광주에서 생사미판 중에 나자빠져 있던 1952년 겨울로부터 1953년 봄까지 동안에 현승 다음으로 내 삶을 도와 준 친구는 이곳 시인 이수복이다. 그는 이때 아마 수피아여자고등학교란 데에서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학교에나 나가는지 안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오전이나 오후나 잠깐 잠깐씩 그는 내 옆에 나타나서 내 엉덩이에 날마다 끊임없이 그 마이신 주사침을 놓고 있었다. (중략) '홍치마 자락에 내린 / 하늘 비췬 누님의 눈물' 꼭 이렇던가 다르던가 잊었지만, 그 뒤 내가 추천했던 그의 시의 한 구절이고, 또 내가 지금도 외고 있는 몇 개 안되는 이 나라 현대시 구절 가운데 하나다. 이건 동백꽃을 두고 쓴 것이고, 또 이수복 그의 고향이 전남 함평이었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그 뒤 동백꽃을 보면 문득 그의 이 구절을 기억해 내고 아울러 함평이나 그런 언저리를 생각하고, 내게 그때 마이신 주사침을 이어서 꽂고 있던 것은 이 언저리의 '하늘 비췬' 그런 눈물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렇듯 그의 다정다감한 인간성은 서정주의 광주에서의 생활 체험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고, 그의 시 또한 서정주에게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할 정도였다. 이후 그는 1957년에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과 '전라남도 문화상'을 받았다. 특히 그의 데뷔작 '봄비'는 70년대 이후 고등학교 '국어' '문학' 등의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그의 문명을 더욱 떨치게 하였다.

 이 작품은 봄비가 그치면 펼쳐질 생동하는 자연의 아름다운 정경을 배경으로 되살아 오지 않는 님에의 그리움과 슬픔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온화하고 잔잔한 분위기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슬픈 감정을 어울리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봄비가 그친 뒤에 올 봄날의 아름다운 풍경을 부드러운 안개가 감싸고 있는 한 폭의 수묵화에서처럼 슬픔의 그림자가 아늑하게 드러난다. 이 시의 특징은 슬픔의 감정을 강렬하게 드러내지 않고 죽은 임에 대한 그리움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잘 다스려 내어 잔잔히 가라앉게 하는 감정 절제에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동양적 정서를 부드러운 운율로 담아 내는 전통적 서정시의 전형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는 말을 아끼는 그의 천품에 따라 과작의 시인으로 알려져 왔다. 따라서 그는 1986년 작고할 때까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봄비"(현대문학사, 1969)를 남겼을 뿐이다. 1969년 4월 30일치 "조대신문" 1면에는 "이수복 시집 출판기념회"라는 제목으로 "본 대학교 국문학과 출신인 이수복 시인의 시집 '봄비'의 출판기념회가 지난 4월 26일 밤에 성대히 개최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는 이어서 이 출판기념회가 "한국문인협회 전남지부 주최로 광주관광호텔 7층"에서 열렸다고 보도하였다.

 그는 일찍이 서울대 예과를 마치고 귀향한 뒤, 50년대 중반 우리 대학에 시간 강사로 몇 학기 동안 강의를 맡은 것이 우리 대학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후인 1963년에 우리 대학 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65년에 졸업하게 된다. 이 때는 벌써 그가 문단에 나온지 10년이 지난 뒤의 일이고, 불혹의 나이를 넘긴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