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1907-1942, 강원도 평창)
이효석(1907-1942, 강원도 평창)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273번지에서 부친 이시후, 모친 강흥경 사이에 1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면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용꿈을 꾼 한 아낙네의 태몽을 논 몇 마지기 떼어주고 샀는데 이튿날 곧 잉태하여 효석을 낳았다고 한다.
여덟 살이 되던 해 봄,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야기의 멋을 알고 문학이라는 것을 처음 생각해 본 것은 이 보통학교 시절이다. 건너방 벽장 속에는 <사씨남정기>, <귀인기우> 등의 갖가지 소설책이 많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추월색>을 되풀이하여 읽었다 한다. 겨울철이면 머리맡에 병풍을 둘러치고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번갈아 가며 읽었다. 병풍은 석류, 딱따구리 등의 그림이 그려진 것이었는데 그 그림과 <추월색>의 이야기가 어울려서 신비로운 낭만적 동경을 가슴속에 심어 주었다.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준 문학의 첫 스승이 어머니였다고 훗날 소년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1919년 평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 이듬해 경성제일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1년 선배인 유진오와 함께 수재로 불렸다 1학년때 젊은 영어교사가 늘 하시는 말씀이 소설 안 읽는 건 바보라기에 소설이라는 게 소중하고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되었다.
2, 3학년을 기숙사에서 보냈는데 같은 친구들은 대부분 함경북도 출신들로 사범과 학생들이었다. 이들의 문학열은 대단하였고, 대부분이 러시아 문학을 많이 읽었다. 이효석도 체홉, 푸쉬킨, 고리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에 흥미를 가졌고, 아일랜드의 극작가 싱그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조선문학에서는 <추월색>과 빙허의 <지새는 안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때부터 효석은 틈틈이 습작을 하여 이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는 시 '봄'이 동아일보 신춘현상모집에 가작으로 뽑혀 발표된다.
이효석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티 등의 서양 고전 음악에 빠져들어 음반을 모으기도 했다. 세련된 의상감각과 까다로운 식성을 지니고 있던 그는 외국영화를 좋아하고 샹송도 즐겨들을 만큼 유럽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취향은 뒷날 <성화>, <거리의 목가>, <화분>, <벽공무한> 같은 소설에서 이국적 분위기를 돋우는 배경으로 쓰이기도 했다.
192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 예과 조선인 학생회인 문우회에 참가 시를 발표한다. 1927년 예과를 거쳐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1930년 예과를 졸업한 효석은 미술 전람회에서 만난 이경원(당시 여고생)과 사귀다가 결혼한다. 효석보다 6세 아래인 이경원은 부유한 집의 딸이었다. 전주이씨 동성동본이란 이유로 여자 집안에서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효석의 천재성에 감탄하여 그녀는 결혼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효석은 실의와 빈궁의 무직생활을 1년 이상하였다. 더구나 신혼살림을 수송동 단칸방에 차린 그는 궁색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이곳 저곳 취직처를 찾으려고 애썼다. 때는 세계적인 대공황이 시작되어 식민지의 대학졸업자가 일자리를 얻지 못 하는 것은 자연스런 추세였다. 효석은 이러한 현실적인 실의와 창작에의 정열만을 안고 불안정한 룸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효석의 모습은 몸집도 키도 작고 살결이 희어서 여자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라고 최정희는 적고 있다. 웃음을 활짝 웃지 못하고 입을 조물거리며 웃는데 얼굴까지 발개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제일고보 시절의 은사였던 일인 '구사호까 쇼오지'의 소개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근무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 일본 기관에 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효석은 친구들과 문단의 실랄한 비판을 받는다. 그를 완전한 변절자로 또 앞잡이로 취급했다. 무척 괴로운 직장생활을 한 열흘 했을 때 퇴근길에 광화문쪽으로 내려오는데, 이갑기라는 청년으로부터 "너도 개가 되었구나"라는 봉변을 당하고 그 자리에서 효석은 졸도해 버린다. 수송동 단칸방에서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그 옆에 평소 잘 알던 잡지사 기자인 최정희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 한달도 안 되어 직장을 뛰나와 버린다. 그가 당시 얼마나 죄책감에 심신이 피로해 있었는가는 이 삽화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한다.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던 그는 1931년 6월에 첫 창작집 <노령근해>를 펴낸다. 여기에는 '깨뜨려진 홍등', '악령기' 등 여덟 편의 단편이 실린다. 치 초기 작품들의 곳곳에서 등장인물들은 어지러운 사회상황에 맞서 행동으로 강력하게 투쟁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로써 이효석은 유진오와 더불어 '동반자 작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직장 사직 후 1932년 처가가 있는 경성으로 내려간 이효석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이효석은 1933년 창립회원으로 구인회에 가담한다. 이 무렵 자연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인 <돈>, <수탉> 등을 발표하면 점차 프로문학에서 벗어나 순수문학쪽으로 기운다. 1936년에 발표한 <메밀꽃 필 무렵>은 작가 이효석의 변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으로 '한국단편 소설의 백미'라는 찬사를 듣는다.
자연에 대한 이효석의 애착은 각별한데, 이는 소설에 나오는 숱한 식물의 이름으로 확인된다. 메밀꽃 꽃다지 질경이 딸장이 민들레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초 씀바귀 돌나물 비름 늠쟁이 장미 글라디올러스 해바라기 프록스 달리아 양귀비 같은 같가지 풀이며 꽃의 이름과 떡갈나무 피나무 버드나무 황양목 산오리나무 물오리나누 가락나무 졸참나무 아그배나무 고로쇠나무 개옻나무 엄나무 같은 갖가지 나무의 이름은 그의 작품 속에서 톡특한 감각적 효과를 발휘한다.
1940년대에 들어와 효석의 가정에는 연거푸 비운이 닥친다. 네 번째 해산을 하고난 부인이 시름시름 앓더니 이 세상을 하직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둘째 아이마저 뒤이어 죽게 되면서 그가 받은 심리적 타격은 매우 큰 듯하다. 이 시기에 만주, 중국 등지로 전전하며 여행을 하게 된 것도 모두 이같은 가정적인 불행에 기인된 것이다.
그 간의 심정은 최정희에게 보낸 서간에 잘 나타나 있다.
"문학의 말씀도 하였으나 제게는 문학보다도 더 근본적인 생각이 요새 마음을 할퀴고 있습니다. 웬일인지 생애의 여간 심상한 일을 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공허감이 더욱 뼈를 깎습니다. 단순히 의지할 애정이 없어서만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인간적인 괴로움이요 허무감인 듯합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극히 쉬운 노릇이 됐어요 지금 생각 같아서는 그것을 조용히 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내를 잃은지 일년도 채 안되어 효석은 이 고독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어느 여가수와의 사랑에 빠지나 주위의 친구와 지인들의 충고와 반대로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던 작가와 유행가수와 사랑은 한때의 불장난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마음과 몸을 상한 이효석은 1941년 평양도립병원에서 몸의 주요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는다. 유진오가 급한 전보를 받고 병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핏빛 카네이션과 흰 글아디올러스가 고혹적으로 어우러진 병상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고 전해진다. 죽음의 순간까지 탐미주의자의 분위기를 잃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효석은 유진오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뇌막염이란 병명이 확인된 후 퇴원, 5월 25일 오전 7시 5분, 평양 기림리에서 36세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삶은 지극히 도회적이고 세련된 것이었으나, 문학 속의 삶은 강원도의 흙냄새 진동하는 투박한 것이었다. 봉평의 낮은 구릉과 개울과 달빛을 받은 메밀밭, 그리고 돌멩이 투성이의 척박한 산길마저 효석의 문학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