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익(1681~1763, 평안도 벽동군)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8:17

이익(1681~1763, 평안도 벽동군)

 

 

아래는 이덕일의 글을 줄인 것이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貞洞)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碧潼郡),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역임한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配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실록> 8년(1682)조는 이하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형 이잠(李潛)이 숙종 32년(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다시 당쟁에 휘말린다. 이잠은 노론이 세자(경종)를 내쫓으려고 한다고 주장하다가 사형당한 것인데, 이 주장은 훗날 경종독살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장희빈을 죽인 노론으로서는 그 아들까지 제거해야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잠의 상소 사건이 일어나자 ‘이잠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혹시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손을 흔들며 피했다’고 전하는데, 스물여섯이었던 이익은 그때 선영이 있는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주했다. 성호(星湖)라는 호는 여기에서 딴 것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廣州)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서해 가까운 안산에 속한 지역이었다.

첨성촌으로 이주한 그는 “화난(禍難)을 당해서 곤박(困迫)한 지경에 빠져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라고 과거 공부를 포기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집에 장서 수천 권이 있어서 때로 이를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게 되었다”라고 공부마저 포기하지는 않았음을 전한다. 게다가 벼슬길이 막힌 채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머리만 큰 지식인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는 ‘성호 농장(星湖之莊)에서 몸소 경작(耕作)했다’는 기록처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士農)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사(士)가 때를 얻지 못하면 농(農)으로 돌아가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는 데 힘쓰고, 또 그 지식은 후생을 가르치면 족하다”(<향거요람서>(鄕居要覽序))라고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농포(農圃) 일무(一畝)를 가꾸어 내 손으로 남과(南瓜·호박)를 심어 누렇게 익는 것을 기다려 수장(收藏)했다가 겨울철에 지져서 돼지국을 만들어 반찬으로 먹으면 그 맛이 달다”라는 글도 남겼다. 농경에 종사하면서 그 시대 사대부들이 천시하는 노동의 철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노동의 철학 속에서 그는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變革)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라며 개혁을 시대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인재들만이 극심하게 편중된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면서 균전제를 주장했다. 그의 균전법(均田法)은 일종의 한전법(限田法)으로서 일정 규모 이상 농토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 (‘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위의 말은 ‘말이 불손하다’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는 등의 여러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당쟁의 연원은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주위의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하지만 싸움 끝의 이익은 정치인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대개 이(利)는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이 둘이 되고, 이는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당쟁의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 붕당(朋黨)의 화도 그 근원을 따지면 벼슬하려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혹 이로써 죄를 얻어 멀리 내쫓김을 당한다 할지라도 얼마 안 되어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높은 지위로 뽑아올리니, 마치 자벌레가 제 몸을 한 번 굽혀서 한 번 펴기를 구하는 것처럼 죽을 경우를 겪어도 꺼리지 않는 이가 있다.” (‘귀향’, <성호사설> 제23권)

당쟁이 치열하다 보니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지고 오직 자당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당쟁의 구조를 간파한 이익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편당심이다. 이익은 ‘편당 속에서 성장하면 비단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당론’(黨論))며 편당심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쟁의 문제점에 대한 이익의 해결책은 신선하다. ‘이(利)가 나올 구멍을 막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벼슬아치의 사익을 창출하는 정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이를 탐해 ‘벼슬을 하려는 자가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들어서 시대의 요구와는 거꾸로 소수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익은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오늘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종당(宗黨·친척당)과 사돈붙이가 아님이 없어서… 서로 결탁하여 대를 이어가면서 벼슬을 독차지’하는 직업 정치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공경(公卿)들에게 미천한 사람들의 농사일을 알게 하려면 반드시 벌열이란 칼자루 하나를 깨뜨려 없애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가려 높여서 등용해야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꾼 중에 인재를 발탁하자’(薦拔?畝), <성호사설> 제10권)

이익은 사대부만이 아니라 서얼·농민, 나아가 노비까지도 등용하자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는다. 세습적 직업 정치가인 소수 벌열에게 집중된 정치구조를 깨트리고,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이익은 천거제를 주장한다. ‘전형(銓衡·인사)을 맡은 자로서 시골 인재를 추천하지 않은 자는 벌을 주자’고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익의 이런 주장들이 그 시대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처럼 그의 사상 역시 주자학을 뛰어넘었다. 다산 정약용은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둘째형님께 답합니다’(答仲氏))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또 이익의 옛집을 방문하고, ‘(이익이)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으며, 주석은 마융·정현을 헤아렸다’라는 시구를 남겨 이익이 주희를 거치지 않고 공맹에게 직접 다가가고, 주희 이전 고대 한(漢)나라 학자들의 주석으로 유학을 해석했다고 평가했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던 이익은 사신들을 통해 들어온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즈(중국명·陸若漢)가 정두원(鄭斗源)에게 준 각종 과학서적과 망원경 등을 예로 들면서 “그가 우리에게 준 물건들은 모두 없앨 수 없는 것들이다. 나도 천문(天問)과 직방(職方)은 읽어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양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밖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 속에서 안으로는 우리 것을 찾자고 주장했다. 이익은 안정복(安鼎福)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인(東人·조선인)이 동사(東史·조선사)를 읽지 않고, 거친 상태로 내버려두어 자고(自古)로 이에 유의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 그 규제(規制)와 체세(體勢)는 스스로 중국사와는 다르다”라고 말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두 버리고 중국인이 되기 위해 광분하던 소중화 시대에 ‘동국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상의 주체성은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때 열심히 농사지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만년에 흉년이 계속되면서 “1년 중 친척 중에 20세가 된 자로 죽은 사람이 열두 명인데, 그 태반이 기병(飢病·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외아들 맹휴(孟休)의 와병 때, “늙은 몸으로 일찍부터 밤까지 간호하여 근력도 다하고 가산도 탕진”할 정도로 노력했으나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조 39년(1763) 83살의 고령이 된 이익에게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의 직이 내려졌으나 그해 12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세웠던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아래는 신병주의 글입니다.

 

[ “숙종 연간에 교활한 도적 장길산이 해서지역에 출몰하였다. 길산은 본래 창우(倡優·광대)로서 곤두박질을 잘하는 자로서 용맹스럽고 민첩하고 비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근심하여 신엽을 감사로 삼아 체포하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그 후 병자년(1696년) 역적의 공초에 그 이름이 또 나왔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최근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사극 ‘장길산’에 관한 ‘성호사설’의 기록이다. 장길산은 숙종대에 해서지방과 양덕(陽德)을 주무대로 활약한 실존 도적. 이익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도적 장길산을 현대의 소설이나 드라마의 시각과는 달리 ‘교활한 도적의 괴수’로 파악하였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이익(1681~1763년). 그는 성호(星湖)라는 호처럼 별 같은 학자들을 모이게 한 실학파의 호수와 같은 존재였다.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은 학문의 무대였고, ‘성호사설’은 학문의 결정판이었다. 이 책은 그가 40세 전후부터 책을 읽다가 느낀 점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그의 나이 80세 되었을 때 집안 조카들이 정리해 편찬했다.

사설이란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글’이란 뜻으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것. 책은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 등 다섯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지문’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의 아래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태양의 궤도, 춘분, 일식을 비롯하여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한역(漢譯) 서양서에 나타난 천문, 역법이 잘 나타나 있다.

‘만물문’에는 의복과 음식, 곤충과 동물, 식물에 관한 관찰 기록을 비롯하여 망원경, 조총, 자명종 등 당시 수입된 물품에 대해 도입된 배경과 기능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악어와 가야금에 관한 기록과 남초(南草)로 불렸던 담배 이야기도 관심을 끌며 윷놀이와 장기, 줄타기 등 민속을 언급한 내용도 주목된다.

‘인사문’은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혼인, 제례, 인물, 사건 등에 관한 것으로 개혁적인 주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왕세자에 대한 엄격한 교육, 서얼의 허통, 과거와 천거제의 병용, 무학(武學)의 설치, 화폐유통의 문제점 지적, 사치 풍조의 근절, 노비법이 천하의 악법이라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이익이 폐전론을 주장한 것은 화폐의 유통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사치 풍조를 조장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신용카드의 남발로 많은 신용불량자가 양산되고 있는 현실과도 묘하게 대비되고 있다.

이익은 조선문화의 절정기인 18세기를 살면서 그 변화의 조짐을 읽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학문 탐구에 일생을 바친 남인 실학파의 중심인물이다. 그의 실학은 ‘성호’라는 거대한 호수에 모인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활짝 꽃피워졌고 계승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와 서학의 수용에 개방적이었던 그의 학풍을 둘러싸고 제자들 간에는 성호좌파와 성호우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만큼 이익은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우뚝 선 학자이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다리를 만들어 준 인물이었다.

장길산에 관한 기사를 담고 있는 자료로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숙종실록’, ‘추안급국안’, ‘성호사설’ 세 자료뿐이다. 앞의 두 자료가 국가에서 도적 장길산의 체포를 독려하기 위해 쓰인 점을 감안하면 ‘성호사설’의 기록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이익이 현실 사회 문제에 민감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호사설’에서 장길산을 임꺽정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 도적의 괴수로 단호하게 확신했던 이익. 그런 그가 2004년 의적의 모습으로 탄생한 드라마 장길산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하다.]

 

아래는 한문희의 글입니다.

 

[ 집을 나서 학교로 가는 길,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기 시작하는군요. 그 아름다운 풍경에 사진이라도 찍어 두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듭니다. 그런데, 왜 계절은 어김없이 여름에서 가을로 또 겨울로 바뀌는 걸까요?

사람은 보통 눈으로 자연 현상을 보고 마음으로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이치, 즉 원리를 깨닫게 되지요. 이렇듯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는 방법을 '격물치지'라고 합니다. 사물을 마주하여 그 이치를 깊이 헤아려 보고, 이를 통해 삶의 지혜를 깨우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미루어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이것이 바로 유교의 기본 덕목인 '수기치인'이랍니다. .

조선 후기 학자였던 성호 이익 선생(1681~1763)도 평생 이러한 자세로 일상의 사물을 관찰하고 원리를 깨우치는 공부를 계속했지요. 그리고 그때마다 이를 기록해 두었다가 책으로 묶어 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성호사설'이랍니다. '성호'는 선생의 호이고, '사설'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란 뜻이지요.

"처음에는 잊지 않기 위해서 때때로 기록해 뒀는데, 나중에 그대로 배열하고 보니 두루 열람할 수 없어서 다시 부문별로 분류하고 그 이름을 '사설'이라 붙인 것이다……. 아무리 흔한 똥 무더기나 흙덩어리라도 거름이 되어 아름다운 곡식을 기를 수 있고, 이름 없는 잡초라도 아궁이에 불을 때면 아름다운 반찬을 만들 수 있다."

성호사설은 천지문ㆍ만물문ㆍ인사문ㆍ경사문ㆍ시문문 등으로 나뉘며, 3000항목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그중 '천지문'에는 천문과 기상, 지리에 대한 내용이 담겼어요. 즉, 해와 달ㆍ별ㆍ바람과 비ㆍ이슬과 서리ㆍ조수ㆍ역법과 산맥 및 옛 국가의 강역(영역)에 관한 글이지요. '지구가 둥글고 달보다 크며 해보다는 작다'거나, '지도 제작에 정간목법(지구 위의 모든 경도선 또는 위도선 상에서 길이를 축척대로 정확하게 줄여서 나타낸 지도 투영법)을 쓰면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지요. 서양의 과학 기술이 정교함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 것인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답니다.

'만물문'에는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복식ㆍ음식ㆍ농사와 누에치기ㆍ가축 기르기와 화초ㆍ화폐와 도량형ㆍ병기 등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말 그대로 세상의 온갖 물건에 대한 내용으로, 매우 요긴하고 실용적이지요.

'인사문'에는 정치와 제도ㆍ사회와 경제ㆍ학문과 사상ㆍ인물과 사건 따위와 관련한 글을 실었습니다. 첩의 자식인 서자에 대한 차별을 없앨 것, 비싼 이자로 돈놀이하는 것을 금지할 것, 노비 제도를 개혁할 것 등이 대표적인 내용이지요. 선생은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하층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당파 싸움에만 빠져 있는 정치를 개혁할 방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특히 '인사문' 가운데 '여섯 가지 좀(육두)'이라는 글에서는, "재물이 모자라는 것은 농사를 힘쓰지 않는 데에서 생기는데, 농사를 힘쓰지 않는 자 중에 그 '좀'이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가 노비요, 둘째가 과거공부요, 셋째가 권세를 부리는 가문이요, 넷째가 신기한 구경거리요, 다섯째가 부역을 부담하지 않는 승려요, 여섯째가 게으름뱅이들이다. 이 여섯 종류의 해로움은 도둑보다도 더하다."라고 하여, 농사에 힘쓰지 않아서 나라와 백성들의 생활을 힘들게 하는 각종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웠어요.

'경사문'에서는 유학의 경전과 역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우리 역사와 관련해 '단군과 기자 조선의 강역이 요서 지방에까지 미쳤다'거나, '과거를 볼 때 국사 시험을 보도록 하자'는 등 올바른 역사 연구의 태도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답니다. '시문문'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명한 시문에 대한 비평을 실었지요.

성호 선생은 20대 중반에 아버지처럼 따르던 형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정치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과거 공부에 대한 생각을 접었지요. 그 뒤 평생을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 학문의 연구와 저술, 후학을 키우는 데 매진했습니다. 이론에만 치우치는 학문이 아닌 나라와 백성을 위한 실용적인 학문에 힘쓰는 실학의 기풍을 강조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선생은 18세기 실학의 시대를 연 대학자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선생의 깊은 관찰력과 꼼꼼한 기록 정신이 이루어낸 성호사설은 뒷날 많은 실학자에게 영향을 미쳐 실학의 시대를 여는 선구적인 구실을 했습니다. 선생이 남긴 책으로는 성호사설 외에 사회 개혁 방안을 담은 '곽우록', 자신의 글을 모은 '성호 선생 문집'이 전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