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임화(1908∼1953, 서울)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19:29

임화(1908∼1953, 서울)

 

 임화는 서울 동숭동 낙산 아래에서 1908년에 태어났다.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그의 가정은 파산 상태에 있었다. 특히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그에게 정신적 상흔을 깊이 남긴다. 그의 시에 두드러지는 여성 화자의 목소리는 모성성에 굶주린 인간 내면에 가득 쌓여 있는 균열된 말이며, 그 말이 여성화자의 탈을 쓰고 나온 것이다.

 그는 보성고보를 2학년에 중퇴하면서 평생 정신적 유목민으로서 살아갈 계기를 얻는다. 당시 보성고에는 동기로 이상, 이강국, 이헌구 등이 있었고, 조중군, 윤기정, 김기림 등과는 선후배 사이였다.

 이강국은 임화가 숙청당했을 당시에 남로당파로 몰려 같이 숙청을 당하였고, 조중곤과 윤기정은 카프 시절의 동지였다. 특히 윤기정은 함께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김남천은 "보성고보 학모에 반들반들하게 면도를 하고 휘파람을 불며 다니던" 임화의 이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임화에게 책은 일종은 '존재의 집'과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인, 영화인, 평론가, 혁명가의 다중적인 얼굴을 하면서도 시대의 한가운데를 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접한 책과 독서 지식 때문이었다. 빅토의 위고, 베를렌, 칼 부세를 읽었고, 아리시마 다케오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탐미적 소설에도 접근했다. 크로포트킨의 『지식청년에게 고함』,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의 사회서적과 철학서도 읽었다.

 그 무렵 고아나 다름없는 임화를 받아들인 것은, 그보다 7년 연상이며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박영희였고, 나중에는 박헌영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박영희의 집에 기식하면서도 그 방자함과 방탕함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었다. 임화는 박영희를 '좋은 스승'으로 따랐다고 하지만, 실제로 박영희의 집에 기식하면서 그가 보인 행태는 분명 불량끼 가득한 소년의 그것이었다. 밥상에다 담뱃재를 털어놓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것은 예사였고,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거리면서 밥상 한 번 들고 나오는 법이 없었다. 박영희는 이 불량한 소년 임화 때문에 식솔들로부터 끝없이 불평을 들었다. 끝내는 사람 좋은 박영희도 어쩔 수 없었던지, 어떻게 하면 이 불량 소년을 쫓아내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우인 김기진에게 7원을 빌리고 거기에 자신의 돈을 보태 도쿄까지 가는 노자를 임화 손에 쥐어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열심히 사숙하고 돌아온 그는 곧바로 박영희, 김기진 등 문학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구카프계를 처단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1927년을 전후로 문학운동보다 계급운동이 더 우위에 있다는 이른바 목적의식기가 도래하는데, 그것을 철저하게 관철하고자 했던 임화, 이북만 등 도쿄에서 돌아온 소장파들이 자기들의 카프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임화의 경력에서 이채로운 것은, 그가 친구인 윤기정과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참가하면서 배우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임화의 작품은 <유랑>과 <혼가>이다.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혼가>에서 마부로 분장한 임화를 두고, 뜨거운 태양열을 쏘이고 다니는 마부의 얼굴이라 하기에 임화의 낯빛은 너무 희고 창백했다고 친구인 윤기정은 말했다. 임화의 수려한 외모 덕에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리기도 했다.

 카프 시절 그의 문학 활동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비평과 시분야였다. 1925년 카프 결성 이후 줄곧 경직된 지도 이념과 창작방법이 카프 시단의 작가들을 억압하고, 그것이 시 창작을 가로막는 장벽구실을 하여 작품성을 저하시킨다는 비난이 일었다. 서정성과 경향성의 조화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때 나타난 것이 '단편서사시'였다. 임화는 1929년 '단편서사시'를 통해 카프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이전의 생경하고 구호화된 시에서 벗어나서 문학성과 정치성,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같은 작품이 주목을 받았다. 카프 문학이 담고자 했던 혁명성이 서정성의 촛불 안에서 낭만적으로 타오르고 있다. 혁명적 낭만성은 낭만주의에 대한 임화의 자기비판을 가져오게 하지만, 자신의 시에서는 그것을 결코 막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시인 임화였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강화하면서 국내 사상단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에 나서자 1935년 카프는 해산기에 들어서게 된다. 임화는 체포되어 전주 감옥으로 이송될 찰나 서울역 앞에서 지병이던 폐결핵으로 졸도한다. 카프 맹원 대부분이 기소되었지만, 임화는 감옥을 가는 대신 마산에서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검거 직전의 졸도가 연기였다는 풍문과 카프 서기장으로서 그의 책임감과 윤리의식에 대한 비난이 일자, 그는 정신적 고통을 받는다. 그런 가운에 「조선신문학사」등 문학사 서술에 열중한다.

 임화는 광복이 되자마자 재빨리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해 좌파문학 단체의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문학 이념은 박헌영의 남로당계 노선안에 있었고, 진보성과 인민성이 이념의 중심이었다. 그에게 박헌영은 '풍파를 만나 사방으로 이산하였던 대소(大小)의 어린애가 어버이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임화의 박헌영에 대한 감정은 거의 열광에 가까울 정도였으며, 이는 소년기에 흔히 갖게 되는 동성애적 감수성에 버금가는 것이다.

 고아의식과 불량끼, 모성 결핍 같은 것들로 인해 그의 정신은 끊임없이 '거대한 아버지'를 찾아 목말라 했다. 박영희의 식솔이 된 것도, 그가 그리도 동경해 마지않던 박헌영을 찾아 헤맨 것도, 그리고 박헌영을 따라 북을 선택해 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11월 임화는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서울에 다시 입성한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가 이월에 퇴각하자 그도 다시 북한으로 가게 된다. 그때 자강도 부근에서 쓴 것이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비롯해「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바람이여 전하라」이다. 실려 있는 이들 작품들은 격렬한 파토스(열정)로 전장의 서정을 노래했다. 시인 임화의 승승장구는 아마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얼마 뒤 그는 남로당 숙청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임화를 비롯해 박헌영의 노선을 지지하던 김남천, 이원조, 설정식 등은 모두 1953년에 박헌영의 남로당파가 제거될 때 숙청되거나 사형에 처해진다. 남침 실패와 휴전의 책임을 전가할 대상으로 김일성이 정적을 일시에 제거한 것이다. 임화는 목숨의 위기를 느낀 상황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하고,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주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해 쓰고 있던 안경을 깨서 그 파편으로 오른손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진다.

 임화가 죽은 뒤 1956년에 평론가 윤세평은 「우리 오빠와 화로」가 시종일관 반혁명적 패배주의사상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 시는 카프시대 시적 성과물의 최고로 꼽히던 작품이었다. 오빠가 감옥에 붙들려간 것을 깨진 화로에 비유하고, 집에 남아 있는 오누이를 외롭게 벽에 걸린 부젓가락에 비유해 혁명가와 혁명가의 가정을 모독했다는 주장이었다. '극악한 변절자이며 미제의 고용 간첩'이라는 죄명은 이후 북한에서 임화의 이름 앞에 공식문구로 나붙는 수식어가 되었다.

 임화의 죽음을 통곡한 유일한 사람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이자 소설가였던 지하련이었다. 임화의 첫결혼 상대는 카프 동지인 이북만의 누이 이귀례였다. 이북만은 박영희가 카프 서기장으로 있던 시절에 카프 도쿄지부장이었다. 임화가 박영희 집을 쫓기듯 나와 도쿄 유학을 갔을 때, 이북만은 아내와 누이동생을 데리고 가난한 신접살림을 하고 있었다. 임화는 그 집 식객 노릇을 하면서 이귀례를 처음 만났다. 단편 서사시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그가 열망했던 것처럼, 임화는 이귀례를 만나면서 "노동투사를 애인으로 가진 누이를 돌보는 오빠 노릇"을 비로소 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딸 혜란이가 태어났지만, 폐결핵 이후 결국 이혼에 이른다.

 지하련은 그가 1932년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마산으로 요양 갔을 때 만났던 여자이며, 1940년 '문장'지에 「결별」을 추천받아 소설가로 등단했다. 지하련의 섬세함과 임화의 낭만적 시인 기질이 그들에게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하고 월북의 길을 가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하련은 한국전쟁으로 만주에 피신해 있다가 임화의 사형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달려왔다. 시신은커녕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실성한 듯 거리를 헤매었다. 그 뒤 지하련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대동강에 투신 자살했다는 설과 자강도 희천 부근에 있는 산간 오지의 교화소로 끌려가 격리 수용된 후 1960년 초에 병사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임화와 지하련 사이에 난 외아들 원배 역시 행방불명이 된다.

 북에 갔던 임화가 다시 서울에 나타난 것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10여 일이 지난 뒤였다. 임화는,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 있던 문인들을 불러모아 작가동맹 가입을 권고하고 있었다. 그러던 임화가 남모르게 찾아간 곳은 종로 네거리였다. 그곳은 카프의 대표시라고 할 만한 「네거리의 순이」가 탄생한 장소였다. 다시 종로 네거리를 찾은 임화는 그 자리에 서서 순이가 아닌 자신의 사랑하는 딸 혜란을 목놓아 불렀다. 그는 43세였고, 혜란이 20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종로 네거리에 서서 미어지는 아픔을 이렇게 읊고 있다.

아직도/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를 땋기/ 수줍어 얼굴을 붉히던

너는 지금 이/ 바람 찬 눈보라 속에/ 무엇을 생각하며

어느 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를 생각하며/ 바람 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 아프던/ 엄마를 생각하며

해 저무는 들길에 섰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침마다 손길 잡고 문을 나서던/ 너의 어린 동생과/ 모란꽃 향그럽던

우리 고향집과/ 이야기 소리 귀에 쟁쟁한/ 그리운 동무들을 생각하여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느냐//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 「너는 어느 곳에 있느냐」중에서

 이 절절한 부성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시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 운명적으로 존재 지워지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 '조영복(2002), 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돌베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