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정약용 (경기도 광주, 1762∼1836)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1:59

정약용 (경기도 광주, 1762∼1836)

 

  다산(茶山) 정약용은 1762년 광주군 초부방 마재(지금의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의 소내에서 태어났다. 소내는 다산이 75세의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의 벼슬살이와 18년의 귀양살이 기간을 제외하고 40여 년 동안을 머물러 살았던 곳으로, 그에게 제1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정신적인 고향이었다.

 정약용은 15세 되던 해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남인계인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결혼은 자신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이 해에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정조는 등극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옹호했던 남인계의 시파인물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28세가 되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는데, 정조의 총애가 지극했다.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거나,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는 일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33세에는 경기도 암행어사의 직책을 맡게 되면서 조선말기 사회상과 백성의 어려운 삶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약용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그를 천주교 신자라고 몰아붙여 그의 벼슬살이를 마감하게 만든다. 1975년 청나라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고 둘째 형 약전이 연좌되면서,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는 공격을 받는다. 정조가 방패막이가 되어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했으나, 39세 되던 해,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신유옥사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죽임을 당했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그리고 다산 자신은 장기현(지금의 영일군 장기면)으로 유배되었다. 게다가 신유옥사의 모진 박해를 북경의 주교에게 전달하려던 황사영(첫째 형 정약현의 사위)의 백서가 발각되면서 다산과 약종은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다. 그 결과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귀양 보내졌고, 그의 형 약전은 흑산도로 보내졌다. 약전은 다시는 육지를 밟아보지 못한 채 1816년 그 곳에서 죽었다.

 정약용과 형 약전은 함께 유배지로 가다가 나주 북쪽 율정 주막에 이르렀다고 한다. 율정은 목포와 해남으로 갈리는 삼거리에 있었다. 이제 하룻밤을 묵고 나면 기약없이 헤어져야 했다. 이 때 남긴 시를 보면,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이 어스름해/ 잠자리 일어나 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말이 없네./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눈물나네. <율정별 栗亭別>

 정약전은 흑산도에 머물면서 어물들의 생태학에 대한 연구를 해서 책 한 권을 썼다. 약전이 죽은 후, 이 책은 그 가치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몸종이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몸종이 자기 아들의 혼례 후 신혼 방을 단장하기 위해 방의 도배지로 이 책을 사용하고 말았다. 이것을 안 정약용이 형의 일생의 저작이 물거품이 된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벽의 도배지로 사용된 것을 거의 손으로 베끼기를 시작했다. 몸종이 겹칠을 했기에 안쪽에 발라진 책은 구할 수 없었고, 겉에 나와왔던 책 한 권만을 건진다. 그 책이름이 바로 '자산어보'라는 책이다. 책을 베낄 때의 정약용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의 동문 밖 주막에 도착하여 귀양살이를 시작할 때, 그는 그 주막을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 이름짓고는 두문불출하였다. 4년 뒤인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산의 보은산방의 고성암으로 거처를 옮겨 주역 연구에 몰두하였고, 다시 이듬해에는 읍내에 살던 제자인 이청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배움을 구하는 황상, 이청 등을 제자로 삼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들이 나중에 다신계(茶信契) 일원이 되어, 다산이 고향에 돌아간 뒤에도 해마다 햇차를 보내기도 하였다. 다신계는 다산이 귀양에서 풀려나자 18명의 제자와 강진에 있는 여섯 제자를 모아 만든 일종의 학문 토론 모임이다.

 다시 이듬해 봄인 1808년에는 강진현 남쪽 만덕산 서쪽에 있던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옮겨 살았다. 그곳이 바로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이다. 그는 산의 이름을 호로 삼아 '다산'이라 하였다. 그는 못을 파고 꽃을 가꾸었으며 채소도 심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금의 다산초당은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며, 동암과 서암은 1974년에 복원되었는데 이때 새로이 천일각이 지어졌다. 천일각이 있는 그곳은 한눈으로 구강포 앞바다가 보이는데, 아마도 그는 그곳에 서서 귀양간 형을 그리워하고 고향과 그의 처자식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다산초당에 들린 법정 스님의 글을 잠깐 인용하면 이렇다. [아버지는 유배생활 10년째 되는 해 가을에 두 아들에게 이런 사연을 띄운다.

‘나는 논밭을 너희들에게 남겨 줄 만한 벼슬을 못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이와 같이 당부하면서,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부지런함과 검소함,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이나 기름진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평생을 두고 필요한 곳에 쓴다 할지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부지런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일을 저녁 때까지 미루지 말라.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늦추어서는 안 된다. 집안 식구들이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한순간도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부지런함이라 한다.

 또 검소함이란 무엇인가.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이 옷을 먼 훗날까지 입을 수 있는지 헤아려 보라. 가는 베로 만들면 머지않아 해어지고 말테니 질박한 천으로 만들어 입으라. 음식도 목숨을 이어가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거라.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면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모할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조건을 극복하는 일시적인 방편이 아니라, 여유있는 가정일지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항구적인 생활 규범이다. 그러니 가슴깊이 새겨두라고 거듭 당부한다.]

 어쨌든 이곳초당은 사람과 수레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정치와는 먼 땅이었지만 오히려 다산에게 조선 후기의 위대한 학자로 남을 수 있는 학문적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500권이 넘는 많은 책의 대부분도 이 곳에서 썼다.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에 관한 [경세유표], 죄인을 다스리는 형벌에 관한 [흠흠신서] 등을 썼다. 지방 관리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다룬 [목민 심서]는 관리의 부패상과 정치·경제 제도의 문제점을 엄중히 비판하여 당시에는 읽는 것이 금지되기까지 하였다.

 정약용은 정치가이면 학자이면 동시에 시인이다. 그가 쓴 시가 주목받는 것은 당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로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 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軍籍)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도/ 범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애절양(哀絶陽)> 중에서

 이 시의 제목은 '애절양(哀絶陽)'이다. 말 그대로 옮기면, '남자의 생색기인 양기를 자르는 슬픔'이라는 뜻이다.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인데 조선후기의 세금 거두는 제도인 삼정(三政) 중 군정(軍政)의 문란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이다. 죽은 시아버지에게 군포를 거두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입가에 어미젖이 누렇게 말라붙은 갓난아이도 장정으로 취급해서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의 실상이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분노와 슬픔에 눌려 자신의 남성을 거세했던 그 당시 민중의 처절한 삶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다산초당에 거처하도록 도와준 윤단은 원래 해남 윤씨로 다산의 외가 쪽 사람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그녀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공재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니, 다산에게 귤동 마을의 해남 윤씨들은 외가 친척들인 셈이었다.

 다산은 근처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를 종종 찾아가 혜장선사와 교류하였고 그에게서 차를 배웠다. 또한 초의선사와도 교류하였는데, 다산의 영향을 받은 초의선사는 이후 다도(茶道)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다산의 나이 57세인 1818년 봄에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는데, 이 해 여름 정약용은 귀양에서 풀려났다.  강진의 다산을 떠나 그는 9월 14일 처자식이 있는 고향 땅 소내로 돌아왔다. 그 후 다산은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고향땅에서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 날은 그의 결혼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