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천상병(1930-1993,일본-->경남 창원)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06

 

 

천상병(1930-1993,일본-->경남 창원)

 

  '귀천'의 시인 천상병은 술을 너무 좋아해 술을 친구 삼고, 세속의 관행을 무시한 기이한 행동으로 한평생을 살았지만 이 세상, 우리 세대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역사 이래 별난 사람과 기인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혜성과 같이 나타나 제도권 안에서 율법에 얽매여 조잡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기인' 이나 '별난 사람' 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란 속물들에게 꼭 필요한 재산이 별로 없다는 것이고 옷치장이나 얼굴 손질을 등한시한다는 것, 전통적인 법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지갑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돈이 없으니 구태여 돈을 집어 넣을 주머니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을 갖고 크게 만족할 줄 안다는 특징이 있다.  

 천상병은 코미디언 김희갑처럼 웃으면서 그 유명한 손바닥 인사를 한다. 시인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손바닥을 내보인다. 그것은 평생 몸에 밴 천상병식 인사법. 시인이 그의 손바닥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은 말하자면 상대에 대한 지긋한 애정의 표시이다. 그를 만나서 그의 손바닥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시인으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다고 믿어도 거의 틀림이 없다. 시인이 손바닥을 보여 준 대가로 부르는 가격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정해져 있다. 그것은 자기와의 친분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평균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정해진다.

즉 천상병식 감정가격이 있는 것이다. 최하로는 왕대포 한 잔 값에서 최고로는 그 열 잔 값.

그의 생각으로 그 정도면 상대가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을 것으로 믿어지는 액수이다.  어느날 시인이 신경림 시인에게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시인에게 있어서 신경림 시인은 언제나 왕대포 한 잔짜리였다. “이봐 상병이! 난 이제 살기가 좀 나아졌다고. 내 책에서 나오는 인세도 제법 있고 마누라도 벌이가 괜찮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5백원으로 하자.” "문디 자식, 수작하지 말라. 넌 아직 2백원 짜리야.” 바로 이런 식이었다.

  ***       

 고문을 받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천상병은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간경화)로 거리에서 쓰러지게 되고,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서울 시립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된다. 친구와 친척들은 여러 달 동안 백방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였고, 사망하였을 거라고 여긴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 {새}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로써 살아 있는 시인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

 그는 술을 좋아해 술에 얽힌 일화가 많다. "하루에 용돈 2천 원이면 나는 행복하다… 내가 즐겨 마시는 맥주 한 잔과 아이스크림 하나면 딱 좋다."라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소설가 한무숙의 집에 식객으로 있을 시절, 어느날 잠도 안 오고 술생각이 간절해 낮에 얼핏 본 안방 화장대 위의 양주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부가 잠든 사이 안방에 숨어들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양주병을 들고 나와 단숨에 들이키고 보니 향수였다는 일화가 있다. 향수병을 양주로 알고 들이켜는 일을 저지르고, 비단이불에 세계지도를 턱도 없이 그린 후 새벽도주로 한무숙 시대를 마감한다.

 작가 신봉승의 집에서는 그의 어린딸에게 동전을 쥐어주며 술을 따르게 해서 「배은망덕죄」로 쫓겨났다.

명동시대. 해질녘이면 송옥 양장점 4층의 송원기원에는 그때까지 술값을 해결하지 못한 '문화인' 들이 서성거리며 서있기 일쑤다. 그들은 팔짱끼고 남의 바둑판을 구경하고 있는 체 하지만 사실은 물주 친구가 어서 빨리 보이기만을 감시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 때 눈치 안보고 당당하게 처신하는 사람이 있었다. 남의 술 얻어 먹지 않고 제 돈주고 제 술 마시는 때로는 남까지 사주는 친구. 그가 바로 천상병이었다. 수입은 거의 없었지만 그의 유일한 무기인 손바닥만큼은 닳거나 헤어지지 않기 때문에 손바닥 위에 올려지는 지전이 꽤 되었던 것이다.

  1993년 겨울. 마침내 천상병은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산동네로 모여들었다. 문화인이라 일컫는 시인, 소설가 등을 비롯해 기자, 카메라 기자 등등...... 모처럼만에 이 산동네에는 그럴듯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그럴듯한 사람들이 모여드니 부조금도 꽤 되었다. 사백여 만원쯤 되었을까.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 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 다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 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 이로 배추이파리 같은 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 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 돈으로 바꾸어주어,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늘 「엄마」의 장례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천상병이 평생에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 죽어서 들어온 것이다. 마치 저승가는 데 여비이듯이.

 수락산 기슭 송산시립묘지, 천상병의 무덤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맥주와 꽃다발이 슬프고도 행복하게 살다간 한 시인의 생애를 기리고 있었다. 묘비에 새겨진 절창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는 「귀천」한 구절과 함께.

 

아래는 ‘시인 천상병과 안면도’라는 제목의 백승훈 님의 글입니다.

 

[한 줄기 지평(地平)의 거리(距離)는

산에서 또 다른 산을 향한,

하늘의 푸른 손이었습니다

불가항(不可抗)의 그 손에 잡힌 산산(山山)의 호수에

어젠 새로운 소식(消息)이 있어

들판 위에는 무수한 길이

실로, 무수한 길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나는 바다로 가자.

 

- 천상병의 '바다로 가는 길' 전문 -

 

바다로 가는 길은 멀다.

입춘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흰 눈을 이고 선 먼 산봉우리와 옷섶을 헤집는 맵찬 바람 끝은 여전히 겨울의 한복판임을 웅변하고 있다.

환절의 길목에서 바다로 가는 마음은 겨울과 봄, 두 계절의 어설픈 동거만큼이나 자주 삐걱거렸다.

 

안면도(安眠島)는 말 그대로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섬’이다.

그곳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천상병 시인의 옛집이 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의 옛집이 안면도에 자리 잡게 된 데에는 한 타래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에 대한 사연을 적기 전에 천상병 시인에 대해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이분법이란 단순무식한 흑백논리로 매도당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어떤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기도 한다.

천상병 시인에 대해 이분법을 적용한다면 세상 사람들을 간단히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면 시인 천상병을 아는 사람과 시인 천상병을 모르는 사람 식이다. 또는 그의 시 ‘귀천’을 아는 사람과 ‘귀천’을 모르는 사람으로도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의 '귀천' -

 

천상병 시인을 모르는 사람도 '귀천'이란 시는 안다. 설령 '귀천'이란 시는 몰라도 인사동의 찻집 '귀천'은 알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한 때의 소풍객임을 일깨워 준 그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삶의 고단함과 죽음의 쓸쓸함마저 초월하여 이승살이가 '아름다운 소풍'이란 것을 깨닫는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하고 살았던 천상병(千祥炳, 1930.1. 29 ~ 1993. 4. 28.)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호는 심온(深溫)이다. 일본 효고 현 히메지 출생으로 원적지는 경남 마산이다. 중학교 2학년까지 일본에 거주하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였다.

그의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 시 ‘강물’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하며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 받았고, 1952년 『문예』지에 ‘갈매기’로 추천 완료 되어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54년 서울대 상과대학을 그만 두고 문학에 전념하면서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기도 하고 외국 서적 번역에도 손을 대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비서로 일했는데, 그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직장생활이었다.

1967년 어이없게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으며 6개월여의 옥고를 치룬 뒤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살았다.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 값으로 5백 원, 1천 원씩 받아썼던 돈이 간첩에게 받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고, 천상병 시인 자신은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아이론 밑에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970년 겨울, 직업도 없이 방탕과 주벽 등으로 숱한 일화를 남기며 동가숙서가식 하던 천상병 시인이 종적을 감추었다. 날마다 친구들을 만나 술값을 뜯어 막걸리를 마시던 그의 모습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 가도록 명동이나 종로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던 친구들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봤지만 그의 행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그와 가까운 시인들은 ‘혹시 그가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예감은 사실로 굳어져갔다.

시집 한 권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떴다는 안타까움에 시인 민영 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기 위해 그의 작품을 끌어 모아 60여 편의 시가 모였지만 출판비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시집을 내겠다고 흔쾌히 나서주어 1971년 천상병시집 <새>가 출간되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을 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종해 박사가 살려낸 것이었다. 얼마 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다시 친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고 살아서 유고시집을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질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천상병의 '새' -

 

그에게 있어 새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지향성의 상징이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저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간다. 천진무구와 무욕으로 무장하고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했던 그는 시 쓰기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하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지망생들에게 술값 밥값을 거리낌 없이 뜯어냈지만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고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 권위와 무관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간 기인으로 많은 사람들은 ‘천상병은 천상시인이다’라며 그를 기렸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천상병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에' -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던 그에게 가난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비가 없어 고향에도 가지 못할 거란 걱정을 하던 가난했던 시인은 가난에 길들여져 가난이 주는 조촐한 지복을 누리며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하고 가난 속에서도 삶의 신비에 대해 경이감을 표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린 천상병 시인은 1972년 친구 목순복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천상병이 부인 목순옥을 처음 본 것은 그녀가 상주여고 2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맞아 오빠를 만나러 왔던 그녀는 명동 갈채다방에서 첫 인사를 나누었다. 오빠를 잘 따라다니던 그녀를 천상병 시인도 자주 만나게 되었지만 그저 친구의 귀여운 동생이었을 뿐 처음부터 서로 마음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병원에서 발견된 뒤 목순옥은 안타까운 마음에 일주일에 서너 번씩 문병을 갔고 둘 사이에 애틋한 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2년 5월 14일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마흔세 살이었고 신부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수락산 초입의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너무나 가난했던 탓에 12가구가 사는 벌통집과 의정부 달동네의 창고 같은 집을 전전하며 13년을 살았다.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384번지. 담도 대문도 없는 허름한 집이었지만 천상병은 행복한 생활을 이어갔다. 아내 목씨에게 매일 용돈 2천원을 타서 맥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는 일이 그에겐 더없는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1985년 3월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 24번지에 찻집 귀천‘의 문을 열었다. 문인들의 인사동 찻집으로 불리던 ’귀천’은 천상병 시인의 사랑방이자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1979년엔 시집 《주막에서》를 펴냈고,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년),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년)을 펴내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나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를 펴냈다. 말년에 천주교에 입문한 천시인은 하느님에 대한 소박하고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병이 깊어 누워 있던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마침내 이승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시인이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봄비가 내렸다. 그의 장례를 치룬 뒤 수백만 원의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곳이 하필이면 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저승 가는 여비로 쓰려고 조화를 부린 것인지도 몰랐다.

평생의 반려자 로 인사동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천재시인의 술과 담뱃값을 대어주던 목순옥 여사도 2010년 8월 26일, 74세를 일기로 시인의 뒤를 따라갔다. 시인이 세상을 뜨던 해, 진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출간되었고 1996년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되었다.

 

태안반도에 자리한 안면도는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큰 섬이자 서해의 대표적인 섬이다. 해안을 따라 꽃지. 방포 등 14 개의 해수욕장이 있으며 울창한 해송이 숲을 이룬 자연휴양림과 천연기념물 138호인 모감주나무 군락지가 있다. 또한 안면도의 꽃지해수욕장은 특히 저녁노을이 아름다워 강화 석모도, 부안 채석강과 더불어 서해낙조의 3대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그중에도 가슴 아린 전설이 깃든 할매바위와 할아비바위 사이로 지는 꽃지의 낙조가 백미로 꼽힌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쯤 출발하여 느긋하게 꽃지의 낙조를 감상하고 황도의 그림 같은 펜션에서 일박을 하고 천수만으로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했으면 더 바랄 게 없지 싶은데 현실은 늘 마음과는 일정 부분 틈을 벌리며 내 등을 떠민다. 행담도 휴게소에서 안면도의 지도를 펼쳐놓고 답사지를 짚어본 뒤 서산방조제를 건너 안면도로 들어섰다.

안면대교를 건너 7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안면암 입간판을 보고 왼쪽으로 난 샛길로 차머리를 돌렸다. 쭉쭉 뻗은 소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린 솔숲을 끼고 차를 달리며 차창을 열어 솔향기를 맡으니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작은 고개를 두어 개쯤 넘으면 눈앞을 가로막는 이국적인 절집이 안면암이다.

콘크리트로 짓고 단청 대신 페인트칠을 한 투박하다 싶을 만큼 거칠고 크기만 한 절집인 안면암은 낯설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末寺)인 안면암은 법주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등을 지낸 지명스님을 따르던 신도들이 1998년 안면도 해변가에 지은 절이다.

창건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경관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안면도의 명소로 자리매김 했다. 12지신 상이 줄느러미 늘어선 절집 마당에 차를 세우고 쫓기듯 절집을 등지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시야가 확 트인 앞바다에 여우섬이라고 부르는 2개의 무인도가 있는데, 바위섬까지 약 100여 m에 이르는 부교(浮橋)가 놓여 있다.

밀물 때를 맞추면 30분도 지나지 않아 물 위로 들린 부교 위를 걸어서 섬까지 다녀오는 색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다는데 우리가 찾아갔을 땐, 썰물 진 뒤라 바다 위를 걷는 즐거움은 맛볼 수 없었다. 하여도 한가롭게 부교를 건너 바위섬까지 걷는 것만으로도 먼 길을 달려온 수고로움이 아깝지 않다.

안면도로 들어서면서 거리에 자주 눈에 띄는 게 ‘게국지’라 쓰여 있는 현수막이었다. ‘1박2일’이란 tv 프로에 소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국지’는 서산 태안의 토속 음식이다. '게국지'라는 말은 사투리로 지역에서는 겟국지, 깨꾹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게 또는 바다에서 나온 해산물의 국물을 넣어 만든 김치찌개'를 이르는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겠다. 안면암을 돌아 나와 서둘러 찾아간 곳은 꽃게장으로 유명한 안면도의 맛집 일송정이었다. 젓갈을 듬뿍 넣어 담근 묵은지에 게와 새우를 넣어 구수하고도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일품이다. 게국지로 속을 든든히 채운 뒤 다음 답사지인 안면도 자연휴양림으로 차를 달렸다.

안면읍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안면도 소나무 숲은 77번 국도로 바로 옆 서향 구릉지에 넓게 퍼져 있는데, 아름답게 하늘로 뻗은 날씬한 자태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안면도 자연휴양림이다.

중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는 대부분 구불구불하여 못생긴 것들이라 이곳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자태는 더 인상적이다. 강원 도의 산악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우량한 소나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일까. 조선왕조는 개국과 더불어 송목금벌(이하 "송금")이라 강력한 산림보호시책을 실시했다. 안면도 소나무 숲도 이러한 송금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11대 왕인 중종(1488~1544) 초기에 조정에서 직접 관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왕실에서는 안면도 소나무를 궁궐을 짓는 재목으로 사용하였으며 왕족이 죽으면 관곽재로 또는 조선재로 이용했다. 특히 경복궁을 지을 때와 오래된 궁궐을 보수할 때에도 이곳의 나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용처(用處)에 쓰일 송목재를 원활하게 공급하려고 안면도의 소나무 숲을 황장봉산으로 지정하고, 수군절도사 관할 아래 산감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

이렇게 엄격한 보호정책 덕분에 중부 서해안에서는 드물게 혈통 좋은 소나무 숲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당시의 소나무는 아니지만 그때 소나무의 증손자 격인 안면도 소나무들은 조선왕조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무들이라 할 수 있다. 안면도에는 이러한 소나무 숲이 약 3500ha 펼쳐져 있다.

특히 안면도 자연휴양림 안에는 안면도의 시인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기다림’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이름 모를 산새들 떼 지어 날고

계곡의 물소리 감미롭게 적셔 오는

여기 이 외진 산골에서

맺힌 사연들을 새기고

구겨진 뜻들을 다리면서

기다림을 익히라

카랑한 목을 뽑아 진리를 외우고

쌓이는 낙엽을 거느리며

한 걸음 두 걸음 조용히 다지다가

자유의 여신이 찾아오는 그날

고이 목을 바치리라

대를 물려 가꿔도 빈터가 남는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

 

- 채광석의 시 '기다림' 전문 -

 

시인 채광석(1948.7.11 ~ 1987.7.12)은 충남 태안군 안면도 안면읍 창기리에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대에서 영어교육과에 진학하여 수학했으며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 시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제기하면서 백낙청, 김사인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문학논쟁에 참가하며 2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창작 주체의 계급론적 차별성 문제, 수기의 문학 장르 가능성의 문제, 집단 창작의 문제, 문학 조직의 문제 등을 문단에 던지는 등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문단 평론계의 한 맥을 형성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87년 7월 12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저서에 평론집 《민족문학의 흐름》, 시집 《밧줄을 타며》, 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사회문화론집 《물길처럼 불길처럼》 등이 있다. 유고집으로 《민족문학의 흐름》이 있다.

채광석 시비 앞에서 그의 짧은 생애를 일별하고 수목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목원은 안면송의 향기가 그윽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정원이다. 숲속의 고요와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수목원을 거닐면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공간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천천히 수목원으로 난 길을 걸으며 꽝꽝나무, 은목서, 금목서 같은 나무들의 이름을 외우다 보면 코끝을 간질이는 솔향기와 눈앞에 펼쳐지는 초록 숲과 청량한 솔바람소리가 오감을 자극하며 마음의 빗장을 풀어놓는다. 이 숲에서는 내 마음에 칼금을 긋고 간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목원 안에는 한국전통의 정원으로 거듭난 아산정원을 비롯하여 각종 테마정원이 저마다 멋과 향으로 특색을 자랑한다. 아직 봄이 멀어 꽃은 볼 수 없지만 시간만 허락한다면 세속의 일을 내려놓고 하루쯤 이곳에 묵어가고 싶어지는 곳이다.

 

천상병 시인의 옛집은 안면도 자연휴양림을 나와 다시 영목항을 향해 차를 달리다가 지포저수지를 왼쪽에 끼고 샛길을 따라가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길 중간에 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일자집이다. 우리는 시인의 고택을 지나쳐 펜션 ‘시인의 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펜션의 문을 두드렸다. 미모의 중년 여인이 우리를 반겼다. 펜션의 안주인 이숙경 여사다. '시인의 섬'은 이곳에서 5대 째 농사를 짓던 모종인 씨가 세운 유럽풍의 펜션이다.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 선율 같은 느낌으로 디자인 된 아름다운 안면도의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펜션의 주인인 모종인 씨가 천상병 시인의 고택을 안면도로 옮겨놓은 장본인이다.

펜션을 운영하는 모종인 씨는 안면도 토박이로 1960년 대 이곳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여 부를 쌓은 부친 덕분에 부농의 자식으로 자랐다. 원래 미술을 전공했는데 워낙 시를 좋아해서 천상병 시인과 부인 목순옥 여사와 친부모자식처럼 가까이 지냈다. 2004년 9월 펜션을 개업할 무렵 목 여사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의정부 수락산 자락에 있는 집이 아파트 건설 때문에 없어지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모종인 씨는 천상병 시인의 옛집을 부랴부랴 자신의 고향 땅으로 옮겨 복원해 놓았다.

천상병 시인의 옛집은 단순함의 극치를 이룬다. 중앙에 여닫이문을 단 방을 중심으로 서쪽에 여닫이문 하나를 단 건넌방과 동쪽엔 미닫이문을 단 안방으로 단출하기 그지없다. 가운데 방엔 궤짝을 이용한 책상 위에 먼지 앉은 몇 권의 문예지가 놓여 있고 오른쪽 벽에 그의 시 ‘귀천’이 걸려 있고 방바닥엔 ‘강물’이 앉아있다. 시인의 사진은 양쪽 방에 한 점씩 걸려 있어 방문객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모종인 씨는 천 시인의 고택 옆에 아담한 갤러리도 지었다. 갤러리엔 고인이 된 걸레스님 중광, 김점선 화백의 그림과 소설가 이외수 등의 작품과 천 시인과 목 여사의 소장품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닫힌 문을 열어 갤러리를 보여주던 시인의 섬 안주인은 가족사진에 대해 묻자 두해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일은 가슴 벅찬 일이면서도 가슴 시린 일이기도 하다. 안면도에서 만난 천 시인의 옛집은 성서의 말씀처럼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이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우리는 시인의 섬에서 안주인 이 여사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마지막 답사지인 꽃지해변의 낙조를 감상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서해 낙조의 3대 명소의 하나인 꽃지 해변의 명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할미바위와 할아비 바위다. 바다 위에 우뚝 선 두 개의 바위섬 사이로 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의 장관은 많은 사진작가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담긴 이야기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여느 명승지가 그러하듯 이곳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약 1,200여 년 전인 신라 흥덕왕 때, 그 당시 바다를 주름잡던 장보고는 청해진에 거점을 정하고 해상 활동을 펴나가는 동시에 서해안의 견승포(안면도)에도 해상 전진기지를 두었고, 이 기지를 관할하는 책임자로 승언이라는 사람을 임명하였다. 승언장군은 아름답고 환경 좋은 견승포에 부임하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 미도와 함께 아름다운 바닷가를 산책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청해진으로부터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북쪽으로 떠난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높은 바위에 올라 남편을 기다리던 미도는 망부석이 되어 죽고 말았다. 몇 해가 지나 승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땐 아내는 이미 망부석이 된 뒤였고 승언 역시 망부석이 된 미도 곁에서 아내를 그리다가 숨을 거두고 만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두 바위를 할미·할아비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두 개의 바위섬에 얽힌 전설을 음미하며 그 사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붉게 물든 낙조의 빛깔로 가슴을 물들이고 나면 한 뼘은 더 깊어진 자신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꽃지에 온다고 해서 누구나 멋진 낙조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대를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천왕봉의 일출만큼이나 꽃지의 낙조도 덕을 많이 쌓은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3월의 짧은 해가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하는데 아름다운일몰의 잔상이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하루 동안 걸어온 길을 마음속으로 되짚으며 돌아오는 길, 섬이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인 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도 종 환

 

그대 떠나고 난 뒤 눈발이 길어서

그 겨울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가 곁에 있던 가을 햇볕 속에서도

나는 내내 외로웠다.

그대가 그대 몫의 파도를 따라

파도 속 작은 물방울로

수평선 너머 사라져간 뒤에도

하늘 올려다보며 눈물 감추었지만

그대가 내 발목을 감으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이었을 때도

실은 돌아서서 몰래 아파하곤 했다

그대도 눈치채지 못하고

나도 어쩌지 못한

다만 내 외로움

내 외로움 때문에 나는 슬펐다.

그대 떠나고 난 뒤

가을 겨울 봄 다 가도록 외로웠지만

그대 곁에 있던 날들도

내 속에서 나를 떠나지 않는 외로움으로

나는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