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현진건(1900-1943, 대구)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24

현진건(1900-1943, 대구)

 

 빙허 현진건은 폭음가로 주호(酒豪)로도 유명했다. 술로써 불평을 해우(解優)시켰고, 불평을 술로써 흩뜨려 버리러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자주 어울려 다녔던 문인들은 횡보 염상섭, 월탄 박종화 등이었다. 이들 말고도 부암동 시절 자하문 안과 밖을 넘나들면 현진건과 술친구를 하던 사람들은 홍명희, 박찬희, 유지영, 정담채, 우승규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자하문 안팎에 살면서 오가는 길에 양계사업을 하던 현진건의 부암동 집에 들러 달걀요리에 병든 닭을 잡아서 안주삼아 밥삼아 술을 마셨던 것이다.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1년 동안 실형을 살다가 출옥한 후 시작한 양계였다. 애초에는 양계 백 수로 근근히 호구지책을 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고 하는데, 울적한 빙허를 찾아오는 술친구들의 토색장으로 닭머리가 점점 줄어들어 난경에 빠지게 되었다.

 현진건 일행은 다방골(지금의 무교동)을 무대로 단골집을 정해놓고 출입을 했다. 먼저 들르는 집은 민순자집이었다. 또 은잔에만 술을 담아 팔았다 하여 일명 '은잔집'으로 불리던 집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였다. 돈이 궁할 때는 비지와 선지가 주 메뉴였던 '깃자집'을 찾았다. 동아일보사 건물 앞 황토마루 고개부터 자하문 밖까지는 저녁 무렵부터 이들이 노닐던 주작로였다. 또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찾던 술집이 있다. '치통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 집은 빙허가 출퇴근길에 종종 들렀던 술집이었다. 빙허와 각별히 친숙하고 사돈이었던 월탄 박종화는 그 집에 얽힌 현진건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어제 마신 술이 채 깨지 않고 출근길에 나선 현진건이 치통집을 들렀다. 현진건의 취한 목소리가 들리자 치통집 주모들은 모두 부엌에다가 신발을 감춘 채 다락으로 숨었다. 아무리 불러도 인기척이 없자 현진건은 가게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진건이 이리저리 무엇을 찾다가 문득 부엌문을 열자 거기에 여인네 신발이 몇 켤레 있더란다. 현진건은 주모들이 신발을 숨기고 어디론가 숨었다는 낌새를 알아채고 신발을 모두 주워서 우물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현진건은 사무실로 유유히 출근을 했던 것이다. 당시 귀했던 고무신을 잃어버린 주모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거룻배만한 짚신을 신고 동아일보 현진건 사무실까지 찾아와 신발을 물어내라고 난장을 부렸고, 마지못해 현진건은 직원 몇몇과 우물물을 다 퍼내고 신발을 찾아주었다.]

 월탄(月灘)은 〈주호 현진건의 추억〉(1954년 8월)에서 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어느날, 날이 추운 겨울 일인데 일본서 다다이스 시인 십윤( 潤)이 왔었다. 몇몇 사람의 발기로 십윤을 초대하여 태서관(太西館) 양식부에서 만찬을 대접하고, 십윤은 술을 대단히 좋아하는 탈속한 사람이라 나하고 빙허, 십윤, 도향, 그리고 몇 사람이 선술집 순례를 시작하는데, 차를 타고 서울역 앞에 있는 주접까지 나가서 술 먹기 시작한 것이 거리에선 술집이 있는 족족 들려서 너비아니를 굽고, 왜콩을 까면서 종로를 거쳐서 동대문까지, 동대문 밖에서 다시 종로까지 오는 동안에 술 먹은 잔 수가 도향이 곱빼기로 70사발, 빙허가 60사발, 내가 50사발, 십윤이 40사발을 했으니, 이만하면 빙허와 도향의 주량을 짐작할 것이다.]

 그의 폭음을 말리는 춘해(春海) 방인근에게 '아니야 죽도록 먹어야 해, 술, 술이다.'라고 외치면서 술속에 파뭍힌 심정을 토로했던 현진건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