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소설> 모기

톰소여와허크 2010. 8. 31. 10:23

글 작성 시각 : 2002.06.27 21:50:13

정동수, <모기>, 밝은누리, 2001.

정동수 소설집 〈모기〉를 읽었다. 어린 날의 추억을 제제로 한 소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몽당연필'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소설 속의 '나'는 미군부대 철조망에 손을 넣어 노란색 미제 연필을 줍는다. 비록 몽당연필이었지만 나의 기쁨은 대단했다. 국산 연필은 잘 부러지기도 했고, 침을 계속 바르지 않으면 써지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미제 연필을 사용하면 글이 부드럽게 잘도 써졌다.
반 아이들의 부러운 시선도 잠시였다. 곧, 영철이가 다가와 자신이 잃어버린 연필이라고 우겼다. 증인까지 대어가면서 우겼다. 미칠 노릇이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의혹과 질시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결국 연필을 빼앗겼다. 영철이가 연필을 가지고 갔지만 나는 그 연필이 그 애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미군 부대 안에 연필을 던져놓을 리는 없으니까. 나를 괴롭힌 것은 연필에 대한 미련보다는 영철이에게 반발도 못하고 연필을 빼앗긴 사실 때문이었다.
영철이가 똑 같은 연필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반 년이나 기다린 끝에 결정적 증거를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순간, 전날에 있었던 모멸을 영철에게 되돌려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영철이가 '정말 미안해' 하며, 나의 공격을 무디게 만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날 일인가. 그런 내가 귀찮다는 듯이 영철은 담임 선생님에게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고백해 버렸다. 나는 담임 선생님 앞에서 영철과 개운치 않은 화해의 악수를 했다.
이 후 영철과 겉으로는 잘 지내는 사이처럼 되었지만, 속은 딴판이었다. 영철이를 볼 때마다 나는 몽당연필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은 나 쪽이었다. 친구 사이에 그 흔한 농담도 영철이와 나눌 수 없었다. 영철이를 의식하는 나의 태도는 영철이에게도 감지되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서 중학생이 된 나에게 영철이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고. 난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그게 뭘 뜻하는지 잘 알면서. 몽당연필 사건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옹졸한 나임을 증명해 보일 수는 없는 거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나에게 영철이가 술로 불콰해진 얼굴로 주저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나는 애써 못 알아듣는 척했다.

소설을 다 읽고 떠올려지는 친구가 있다. 한때 친한 친구 사이었는데 무슨 일인가가 계기가 되어 멀어지게 되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 친구는 나에게 실망을 했을 것이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면서도 속 마음을 다시는 열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상대에게 실망한 적도 더러 있었다. 성격상 싫은 내색을 못했지만, 상대에게 우호적인 감정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지만, 싫은 사람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며 사는 것도 고통이란 것을 알았다. 차라리 상소리라도 하면서 애초에 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소설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참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