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리들의 마음자리
글 작성 시각 : 2002.11.14 21:01:09
김주필외, <우리들의 마음자리>, 도서출판 월인, 2002.
영남대 국어교육과 스무 살 축하 행사에 갔다가 선물을 받았다. 선생님들이 직접 쓴 '우리들의 마음자리' 였다. 마음자리 하나 하나를 찾아가며 읽었다. 나는 대학생활을 특별히 오래한 것도 아닌데 여덟 분 선생님 중 여섯 분에게 수업을 받는 기회를 가졌다. 이제 선물에 대한 인사를 독후감으로 대신할까 한다.
김주필쌤 <세상 읽기>
만 다섯 살의 지우가 연주회장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피아노 연주에서 기준음을 한 단계 낮게 잡은 지우처럼 아버지의 삶도 처음부터 자릿수가 잘못 되었다. 하지만 이미 들어선 삶에 갑작스런 변화를 꾀하기보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사셨다. 그런 아버지를 필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우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의 삶을 원망했던 어린 시절을 훌쩍 넘어서서 이젠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나이가 돼버렸다.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삶을 한 옥타브 낮추어 끝까지 연주해가는 아버지처럼 필자도 자신의 삶의 연주에 변화를 주기가 어려워 보인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세상을 읽고, 읽은 세상을 표현하면 산다. 다만, 서로 마주본 두 눈에서 같은 세상을 읽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지우의 눈물이 보여준 세상이 바로 그것일진대, 우린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김주필쌤은 안으로 파고들수록,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깊어지는 사랑을 갖고 계신 분인 것 같다.
박종홍쌤 <있는 것, 보는 것>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대로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필자는 말한다. 똑 같은 드라마를 같이 보고도 한 사람은 재미있어 하고, 또 한 사람은 지루해한다.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평도 제각각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이나 인물을 두고 각각의 반응이 다르게 나오는 경우를 필자는 당연시한다.
우리 삶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 자신과 다르게 보는 사람 역시 나름대로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자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의 견해도 존중해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말한다.
서로를 인정하는 태도를 필자는 지도자 선택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자신만 바르게 본다는 우월감에 빠진 사람보다 상대를 존중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열린 대화로써 조율해 나가는 지도자를 뽑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지도자를 고르는 조건은 딱 좋은데 이것마저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허방칠까 걱정되기도 한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 내 눈을 맑게 씻어야 할 것이고, 남의 시선도 부지런히 좇아야 하겠다.
박종홍쌤은 연구동 4층에서 거울못 분수를 바라보며 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서종학쌤 <낙수>
왜 제목을 '낙숫물'로 했을까, 생각했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제목을 보다가 뜨끔했다. 낙수(落水)가 아니고, 낙수(落穗)였다. 얼른 사전을 찾아보니, '낙수(落穗)①가을걷이 후에 논밭에 떨어져 있는 곡식의 이삭 ②어떤 일의 뒷이야기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풀이되어 있었다. 국어교육과 이십 년을 되짚어 본, 정사보다는 야사에 가까운 이야기인 셈이다. 물론 실제 있었던 일들이다.
학술답사시 '학'보다 '술'에 가까웠던 날들에 대해서, 야유회와 야회수업시 사제가 함께 어우러진 날들에 대해서 필자는 감회 어린 목소리로 술술 풀어놓고 있다. 다산 초당 옆에서 술잔을 기울일 기회를 탐하는 필자는 옛선비의 모습을 닮았다. 술이 지나쳐 장애인이 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자세한 사설을 늘어놓지 않았으니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필자는 국어교육과의 풍토가 도전과 응전의 미묘한 조화 속에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여기서 도전과 응전은 사제지간의 법도인데, '술'이 형식이고 '정'이 내용이다. 제자의 도전이 강하면 혹 스승의 응전이 약해질까 조금 걱정된다.
성호경 <백영 선생님, 그 넓고 따뜻한 품>
백영 정병욱 선생의 제자인 필자가 선생을 추모하면서 쓴 글이다. 필자는 백영 선생을 늘 어렵게만 생각하다가 논문지도를 받으며 선생의 자상하고 헌신적인 면을 알게되었다. 제자의 논문을 꼼꼼하게 읽으시고 붉은 글씨로 수정 지시를 세밀하게 해주시는 것들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내기 어려운 것임을 제자는 안다. '백영 선생님이 그립다. 선생님의 그 넓고 따뜻한 품이 정말 그립다'며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극진하게 표현하였다.
6차 국어교과서에 정병욱 선생이 쓴 '잊지 못할 윤동주'가 실려 있었다. 윤동주의 후배였던 정병욱이 추모의 글을 남긴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스승인 정병욱 선생을 추모하면서 제자인 성호경이 추모의 글을 남겼다. 또 언젠가는 성호경 선생을 그리워하는 제자의 글이 이어질 것이다.
윤영천 <경산벌의 추억>
필자가 영남대에 머물렀던 오년간을 되짚어본 추억담이다. 필자가 경산벌을 누비고 살았던 시대를 '신화의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 글에서 흔적만 확인해볼 뿐이다. 신화는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이강옥 <달빛 받은 당신의 발등은 칼날이었습니다.>
대학촌에서 자취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름은 '철거민촌'에서 '대학촌'으로 바뀌었지만 거기서 사는 사람은 하나같이 고단한 일상을 거친 행동으로 풀어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습관성 폭력을 필자는 아프게 바라본다.
내팽개쳐진 인생을 꿋꿋하게 견디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남편의 배신과 모욕 속에 그만 약을 먹고 말았다. 그 아주머니를 리어카에 싣고 달리던 필자는 그날 보았던 것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여인의 발등에 비췬 달빛이 번쩍이는 칼날이 되어 필자의 가슴에 박혔다.
이강옥쌤은 못가진자에 대한 가진자의 폭력,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을 싫어한다. 균형을 상실한 사회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 때 칼날이 되어 다른 쪽의 선봉에 서 있을 분이다. 그리고 제자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친 고마운 분이시다.
정호웅 <김소진>
소설가 김소진과의 마지막 술자리를 함께 했던 인연으로부터 시작해서 작품 전반에 대한 짧은 평을 곁들인 이야기이다. 김소진이 내세운 인물은 위태롭고, 우울하고, 쓸쓸했다. 그래서 근거없는 낙관주의를 피할 수 있었고 리얼리즘을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짧고도 명료한 평으로 김소진을 가까이 느끼게 만든다.
정호웅쌤은 강의 때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이강옥쌤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꼭 필요한 말을 더 잘하기 위해서라도 침묵이나 머뭇거림의 미덕'을 갖춘 게 아니었나 싶다.
최미숙 <사과 상자 안의 책들>
사과 상자라는 말이, 말 그대로 곧이 들리지 않게 된 요즘이다. 사과 상자 안에 사과가 있어야 하는데 딴 게 있으니 문제이다. 필자는 사과를 담지 않고 책을 담았으니, 이 역시 용도를 무시했다고 하겠는데, 법적인 제재 방법은 없다.
필자는 손이 떨린다. 단지 사과를 담지 못한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사과 상자에 들어갈 책에서 무언가를 보고 말았던 것인데, 바로 책에 묻어있었던 80년 대의 아픔이었다. 아픔이 고개를 들고 나왔다. 필자는 완강하게 이를 외면하고 사과 상자를 테이프로 꼭 봉했다. 사과 상자 안에는 사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