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글 작성 시각 : 2003.02.24 08:14:40
성석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문학동네,2003.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이되 그리 심심하지 않은, 오히려 박진감 넘치는 사건 사고로 번쩍이는 황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주인 있는 염소를 잡는 불법 사냥꾼, 동네 음주운전자와 실랑이하는 파출소 차석, 딸기에 물감 넣는 인간, 술을 죽도록 마시고 싶었던 인간과 인간적인 조폭, 가짜 휘발유 사고 파는 인간, 술 취해서 개집 빼앗아서 귀가한 인간, 뇌물 때문에 갈등하는 인간, 그밖에 치과의사, 학원강사, 트럭 운전사 등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을 삽화식으로 제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 주위엔 조금 모자라면서도 구순한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또 이들을 농치며 우려먹는 나쁜 인간도 흔히 볼 수 있다. 또 한편 예의바르면서도 야박한 그래서 왠지 찜찜한 인간도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러한 인물유형을 짚어가는 것도 재미거리가 될 성싶다. 어쩌면 소설 속의 인물에서 상당한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단순하고 이기적이다. 소설 앞의 자신과 꽤 닮았으니 위로가 안 될 리 없다.
읽는 독자에 따라 와닿는 이야기가 따로 있을 것인데, 내 경우엔 '군대 라면'을 읽고 옛생각에 잠깐 빠져들었다.
팔십년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입대한 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붙이고 첫휴가만 기다렸다. 드디어 날 받고 빈집에 도착했던 내가 처음 한 일은 부엌에 물얹고 라면 끓인 일이었다. 하늘같은 고참만 냄새 풍기며 먹던 라면이 아니었던가.
한번은 고참의 명령으로 화장실 변기 뚜껑(왜 하필 화장실인지 군대 갔다 온 사람만 안다) 위에 세 발 버너를 얹고 그 위에 라면을 끓이다가 그만 엎질러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거의 죽음을 기다리는 나에게 고참의 태산같은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뒷정리나 잘 하고 자라는 말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막 근무 끝나고 돌아온 동기생과 화장실 청소 작업에 들어갔었다. 밀대로 바닥을 밀기 직전이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라면 면발이 눈과 코를 얼마나 자극하는지, 옆에 있는 녀석도 숨을 꼴딱이며 침을 삼키는 폼이 곧 죽을상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린 화장실 바닥에 떨어진 라면을…. 쩝, 다음은 짐작에 맡겨야겠다. 이 때의 상황을 성석제의 표현으로 대신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그 라면은 내가 그때까지 사회에서 먹었던 어떤 라면보다 감동적이고, 기념비적이고, 호소력 그 자체였으며 그 라면 때문에라도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정도다."라고.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다. 황홀한 그 순간을 살지는 못해도, 그 순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욕심난다. 지금 이 순간도 번쩍임이 느껴지지만 내 눈은 참으로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