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소여와허크 2010. 8. 31. 22:23

노 대통령이 떠난 지 일년, 그때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 이창동 감독의 ‘시’를 봤다. 손자와 함께 살면서 파출부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할머니(미자-윤정희 역)는 꽃만 보면 그렇게 좋단다. 시심이 있지만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는 뒤늦게 시 창작 교실에 참여했으나 좀처럼 시를 쓰지 못한다.
그러던 중 손자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성폭행했던 소녀가 강물에 투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충격에 더하여 사물의 이름을 지칭하는 명사를 자꾸 잊어버려 병원에 갔더니 알츠하이머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는다.
피해자의 사진 앞에서도 손자는 죄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 같고, 가해자 부모는 합의금과 함께 사실을 덮기에만 급급하다. 이제 소녀의 죽음은 잊혀지면 그만인 하나의 소소한 사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 세상을 경찰에 고발하고 그날 밤 밤새 시를 쓴다. 그리고 잠적을 감춘다. 소녀의 뒤를 이어 강에 투신했을 거라는 여운을 주면서. 할머니가 쓴 시가 소녀의 시와 만나면서 영화의 막은 내린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어제부터 내린 비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시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란 걸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집에 와서 할머니의 시(이창동의 시)를 다시 읽으니 먼저 가신 분에 대한 조시인 듯도 하다. 우산을 내리고 빗방울의 무게를 느껴보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