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1917-1990, 충남 연기)
장욱진(1917-1990, 충남 연기)
이 글은 “http://windshoes.new21.org/index.htm”에서 가져온 글을 약간 줄인 것입니다.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 전통적인 한옥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가 있었다. 장욱진은 장기용, 이기재 부부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장욱진은 아버지가 시서화를 즐겼고, 또한 멋쟁이었다고 회상하며, '흰 구두에 중절모 차림으로 마실 나가는 아버지의 저고리 한쪽으로 번쩍이는 회중 시계가 보일 때면 아버지의 모습이 참말로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화가의 아버지는 자녀의 신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시집 간 누이의 설득에 따라 일가족으로 모두 서울로 이사하게 했다. 이때가 장욱진의 나이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데 화가가 일곱 살 나던 해인 1923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염병에 걸린 친척 문병을 갔다가 거기서 병에 옮아 고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젊은 나이에 혼자된 어머니와 장욱진의 가족은 서울에서 고모의 돌봄을 받아야 했다.
그가 까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인류는 원형상징 체계에서 새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고가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어린 장욱진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징이라는 것이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경험 이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까치 혹은 새가 훨훨 날아오르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여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장욱진에게 까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나무 가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였거나 자신을 세상에서 훨훨 자유롭게 만드는 존재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뒤 장욱진 가족의 살림살이는 고향의 둘째 큰아버지가 보내주는 살림과 호랑이같은 고모의 돌봄이 컸다.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장욱진은 이때에도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집에 돌아와서도 늘 그림을 그리던 장욱진이었지만 호랑이 같은 고모는 공부는 안하고 늘 그림에만 몰두하는 어린 장욱진을 야단치곤 했다. 그런 탓에 장욱진은 고모 몰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치 바흐가 그러했듯이 방문을 잠그고 몰래 그림을 그리곤 했다.
장욱진은 14살이 되어서 경성제2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장욱진은 그다지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올바르지 못한 일은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3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일본인 역사 선생이 공정치 못한 일을 하자 여기에 대들어 따지다가 결국 이 일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학교에서 쫓겨난 장욱진은 주변의 화가, 조각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의 아뜰리에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장욱진의 고모는 그가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그림만 그린다고 장욱진의 종아리를 때렸다. 고모는 "세상에서 첫째, 둘째가는 화가가 되면 모를까"하면서 때렸지만 장욱진은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이긴 했지만 호랑이 같은 큰 고모에게 종아리를 맞은 얼마 뒤 장욱진은 전염병인 성홍열을 앓게 되었다. 요양을 위해 장욱진은 가족들과 떨어져 예산 수덕사로 떠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가 열일곱살 때였다. 장욱진은 수덕사에서 요양하는 동안 만공선사의 방에서 머물면서 때마침 그곳을 찾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나혜석은 한때 함께 활동했던 일엽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던 차였다. 나혜석은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자신이 그린 그림보다 좋다고 칭찬해주었다고 한다. 만공은 장욱진을 출가시키려고 했지만 그의 뜻과 재능이 불도보다는 그림에 있음을 알고 "네가 하는 일과 불도에서 하는 일이 똑같다"는 말을 하며 출가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반년간의 수덕사 요양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936년 봄 양정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양정고등학교) 3학년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양정고등학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동양인 최초로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 선수의 출신 학교였다. 장욱진은 당시로서는 키도 컸고, 체격이 좋아서 높이 뛰기와 빙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장욱진은 운동보다는 그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양정고보 4학년 때인 1937년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학생 미전에서 그의 작품 두 점이 가작상을 받았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때 받은 상을 누구보다 내심 기뻐했던 사람은 그의 고모와 가족들이었다. 상금 백원을 받은 장욱진은 그 돈으로 고모에게 비단 옷감을 끊어 드렸다. 조카 장욱진이 최고상을 받아오자 결국 고모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세계에서 첫째 가는 화가가 되려면 모를까"라며 이때부터 화가가 되려는 장욱진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장욱진의 노력과 재능이 완고했던 가족의 반대를 무너뜨리고 일본 유학까지 후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939년 양정고보를 졸업한 장욱진은 먼저 일본 유학을 다녀 온 형의 도움을 얻어 그 해 4월에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장욱진은 일본 유학 중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맏딸 이순경과 결혼했다. 장욱진은 이순경과 결혼한 뒤 평생토록 변치 않는 사랑을 함께 했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장욱진은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일제 징용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그가 징용에 끌려간 지 9개월만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은 찾아왔지만 아직 나라의 꼴이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고, 화가가 할 만한 일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이제 여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장욱진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였을 것이다. 때마침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장욱진은 박물관 직원으로 개성과 경주의 고분 발굴 작업에 참여하며 우리의 옛날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박물관 일을 그만둔 장욱진은 동료 화가들과 모임을 만들어 열심히 작업에만 몰두했다. 일본의 식민지를 막 벗어난 신생공화국의 활기는 모두에게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이때 그와 함께 활동한 화가들은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으로 이제는 모두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었다. 장욱진은 좌우이념의 혹독한 대립 속에서 좌, 우 모두로부터도 손짓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을 먼저 피난 보냈지만 자신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장욱진은 혼자 피난을 떠나기 전에 잠시 인공 치하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넥타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더 이상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는 피난 시절 한동안 교편을 잡기도 하고, 전쟁 그림을 그리는 종군화가단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장욱진은 그때 종군화가상을 받았는데 상장은 버리고, 상금만 들고 와서 술이나 마시자고 외쳤다고 한다.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전쟁을 그리고 받은 상장과 상금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던 것이다. 화가 장욱진의 일생은 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그토록 폭주(爆酒)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을 경험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장욱진은 폭주의 습관을 들이게 되었고,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장욱진에게 술은 고통을 외면하는 방법이거나 잊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그림을 그리다 잠깐 동안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화가 장욱진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살았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장욱진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술을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간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때로는 식음을 전폐한 채로) 그림만 그렸다.
그의 피난살이는 그의 자화상인 <보리밭>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가족을 찾아 텅빈 길을 걸어간다. 그가 걸어가는 길은 화면을 좌우로 나누고 구획짓듯 나뉘어 있고, 피난길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한 사내가 걸어간다. 그러나 길은 붉다. 장욱진이 피난에서 돌아와 집을 찾으니 살던 집은 죄다 부서지고, 화가의 그림들은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전쟁통에 오랫동안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장욱진과 부인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해야 했다. 화가는 잡지에 삽화를 그렸고, 부인은 조그만 책방을 차려 살림을 꾸려나간다. 전쟁을 통해 화가 장욱진에게 집이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되었다. 장욱진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도 장욱진은 화백이나 교수보다는 집 가(家)자가 붙은 화가로 불리기를 항상 희망했다. 그에게 그림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고 집은 그의 마음에 들어앉은 하나의 완성체였는지 모른다.
화가와 가족들은 어려운 살림이기는 했지만 한데 모여 살게 되었고, 장욱진은 매우 행복해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의 모습을 작은 화폭에 옮겨놓기를 즐겨했다. 이 무렵 그린 작품 중 유명한 것이 <가족도>이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옹기종기 둘러 앉은 모습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교수라는 신분과 직업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미술이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고 몹시 따랐지만 장욱진은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그 자신의 감정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안주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이 무렵 장욱진의 동료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화가 이중섭이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병들어 먼저 세상을 떠난다. 장욱진은 그로부터 몇 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 때마침 4.19혁명을 앞둔 무렵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자주 시위를 했는데, 제자들이 매일같이 장욱진 곁에 모여들자 학교 당국은 그가 시위를 부추긴 것으로 추측했는데, 학교에서 불편해 한 탓보다는 그 자신이 떠나고 싶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청해서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몇 년 뒤 자신의 화실을 덕소에 꾸리게 된다.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사할 무렵만 하더라도 덕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다. 화가의 작업실인 아뜰리에에 이르는 동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곤 면장집 하나뿐인 시골,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 하는 오지에서 장욱진은 혼자 살았다. 화가는 훗날 회상하며 말하길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장욱진은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낭떠러지 같은 한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이곳 덕소의 비와 달, 바람 그리고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하길 즐겨했다.
그는 스스로 입버릇처럼 늘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거짓으로 겸손한 척 하기보다는 정직한 교만 쪽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생각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거짓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화가 장욱진은 덕소에서, 서울 명륜동으로, 다시 수안보로, 용인으로 이사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화가는 덕소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그림이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고민했다. 화가는 동경 유학 시절, 서양화풍을 모방하는 일본 화풍을 따르지 않았고, 외국의 미술을 직접 살펴보면서 자신의 세계,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려고 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기도 수도도 없는 덕소에 갔지만, 덕소에서 그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이무렵 우리 화단의 유행이었던 모더니즘과 비교해서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기 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 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럴 때 나는 물이 주는 푸른 영상에 실려 막걸리를 사랑해 본다.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
그렇다, 취하여 걷는 나의 인생의 긴 여로는 결코 삭막하지 않다. 그 길은 험하고 가시덤불에 쌓여 있지만 대기의 들장미의 향기가 충만하다. 새벽 이슬을 들이마시며 피어나는 들장미를 꺾어들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인생의 벌판을 방황하는 자유는 얼마나 아프고도 감미로운가! 의식의 밑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는 허무의 서글픈 반주에 맞춰 나는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 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강가의 아뜰리에 전문, <1965. 8. 현대문학>
장욱진은 덕소가 예전의 풍경을 잃게 되자 결국 정들었던 강가의 아뜰리에를 떠나 다시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화가는 틈만 나면 시골의 자연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장욱진은 산 속의 사찰과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구했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부부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장욱진은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늘 그리기만 하고, 전시회를 열어도 작품을 팔기보다는 정말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거저 달라고 하면 그냥 집어주길 좋아했다. 화가로 생활해 나가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였기에 아내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장욱진은 불기 하나 없는 한 겨울의 덕소 화실에서 일주일간 밥을 굶어가며 아내 이순경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아내의 법명을 따서 제목을 정한 <진진묘(眞眞妙)>였다. 그림을 완성하고 화가는 3개월간 앓아 누웠다고 한다.
장욱진이 평생을 두고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었다. 슬하에 2남 4녀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예술 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라고 말했던 그에게 가족은 더할 나위 없는 방패였고, 버팀목이었다. 아내가 그러했고, 그의 자녀들이 그랬다. 장욱진의 가족은 화목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 오십이 다 될 무렵 얻은 막내 아들은 화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만들었다. 뒤늦게 얻은 맏둥이 자식인지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석달이 지날 무렵 아이가 정신지체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자식이 병을 앓기 시작하자 화가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더욱 불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날 여름 통도사를 찾았다가 불력이 높은 것으로 이름난 경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경봉이 대뜸 화가에게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장욱진은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 답한다. 그러자 스님은 "입산을 했더라면 진짜 도꾼이 됐을 것인데"라 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은 길"이라 답한다. 그 대답을 듣자 스님은 "쾌(快)하다"라며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준다.
아들이 병을 앓을 무렵 화가는 연이어서 가족과 아이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자식을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화가 부부는 아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5살 되던 1979년 결국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즈음 안국동 거리에서 미술사학자 김철순이 화가 내외를 만났다. 어딜 가느냐는 물음에 화가는 아무런 내색없이 태연자약하게 죽은 아이 사망 신고하러 간다고 말하더라고 회상하며, 하도 태연하게 말하길래, 역시 달관한 사람은 자식의 죽음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화가 역시 자식의 죽음을 몹시 가슴 아파했던 것이다. 장욱진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야 자신이 죽으면 아들을 화장해 뿌린 곳에 함께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승에서 못 다한 부자간의 정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은 장욱진에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화가에게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 백내장이란 병이 생기면서 점점 시력을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마치 베토벤이 난청으로 결국 귀가 멀었던 것처럼 화가는 눈에 백내장이 생기면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전시회를 앞둔 장욱진은 자신이 제대로 점을 찍고, 바르게 선을 그었는지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력이 약화되는 와중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화가의 염려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수 십 년을 그림만 그려왔던 그의 손은 시력의 장애를 극복했던 것이다. 화가는 몸의 눈이 아니라 늘 마음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아왔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수안보에서 용인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화가는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마치 다 자란 새가 자리를 털고 둥지를 떠나는 것처럼 훌훌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만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당신 성질처럼 푸드득,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다"고 회고한다. 푸드득, 그렇게 말이다. 화가는 생전에 "난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을 줄일 수는 없는 거고, 기능 없으면 죽어 버리는 게 좋아.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라고 말해 왔다. 그의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자연 속에서 나고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의 한 고리일 뿐 특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장욱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하루 전에 해묵은 종이 뭉치 속에서 먹그림을 가려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무런 미련없이 태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유골은 화장해서 앞서 간 자식이 있는 곳에 뿌려달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특별히 정리할만한 짐이나 세간이 없는 단촐한 그의 방이었는데도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늘 깔끔하게 정리해두길 좋아했다. 그런 성정 탓인지 아니면 정말 고승대덕들이 그러했다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탓인지 그는 자신의 그림들과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훌훌 떠났다. 하지만 장욱진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전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차마 그의 유골을 뿌릴 수가 없어서 고향 마을에 탑비를 세우고 그 안에 유골을 모시게 했다. 그 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실일년 사월.”
화가 장욱진은 생전에 불교의 세계와 좀더 가까운 사람이긴 했지만 늘 기독교의 진리와 불교의 진리는 다르지 않다는 말을 했다. 예수는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화가는 늘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화가는 늘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일곱 살이라고 말하며 살았다. 그런 화가였기 때문에 장욱진의 그림은 작고 소박한 화폭에 단순한 주제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그는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 며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이나 회화와 도자기, 판화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다만 예술과 생활 안에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화가는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와 가족을 그렸다. 우리 미술에서 나무를 즐겨 그린 화가는 장욱진 말고 박수근도 있었다. 박수근이 캔버스에 여러 번 유화물감을 덧칠하는 마티에르 기법이란 것을 사용해 나무를 그린 것과 달리 장욱진은 이미 칠해 논 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법으로 나무를 그렸다. 하지만 박수근의 나무들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헐벗은 나무였던 것과 달리 장욱진의 나무들은 풍성한 잎사귀로 넘치는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다른 화가 이중섭과 장욱진은 모두 가족을 즐겨 그렸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했지만 이중섭의 아내는 일본인이었고, 그런 탓에 이중섭은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가족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장욱진은 이중섭보다는 행운아였다.
새를 즐겨 그린 화가로는 장욱진 말고도 오윤이 있다. 장욱진의 후배격인 오윤은 판화를 즐겨 하는 화가였다. 오윤의 새도, 장욱진의 새와 비슷한 의미를 담았지만 장욱진의 새는 좀더 밝고 희망적이었다. 장욱진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늘상 보고, 만질 수 있었던 자연과 사람을 풍성한 생명과 밝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그가 보았던 현실일 수도 있고, 그가 염원했던 세상일 수도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숲 속 작은 오솔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까치를 보면서 저 새 한 마리가 담고 있는 우리 네 삶의 가치와 존엄한 생명과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러 온 메신저였을 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 하늘과 인간, 세상과 나라는 존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말이다]
아래 글은 제자 최종태의 글을 조금 줄인 것이다.
[ 내가 미술 대학 재학시 어느 여름 방학 때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선생이 반도 화랑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전시장엘 들렀더니 마침 계셔서 만날 수가 있었다. 보자마자 나가자 하는 것이었다. 골목 대폿집으로 갔다. 일본 사람이 자꾸 졸라서 한 장 팔았는데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장욱진 선생을 만날 때는 술상 없는 날이 드물었다. 혜화동 시절에는 으레 공주 집으로 달려간다. 그냥 뵙고 싶어서 발길이 가는 것이지만 나는 항상 무슨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로 있었다. 선생도 그렇고 또 나도 그런데 인사라는 게 없다.
장욱진 선생은 한 모금 들고서야 말을 시작한다. 인사 대신에 첫 마디부터 공격이다. 죄다 기억하리라 마음먹어도 듣다 보면 어느새 나도 취해 버려서 다음날 생각해 보면 무슨 말씀이었는지 하나도 기억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나처럼 많이 혼나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는 늘 혼자서 찾아다녔기 때문에 공격의 화살을 혼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화살을 나누어 받을텐데,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당황해서 저런 사람도 있나 하고들 생각한다. 나는 오랜 기간 단련이 되다 보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래서 밖에서 엔간한 욕쯤 들어도 괜찮은데 선생으로부터 워낙 단련이 되어서 그런 것이다.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장욱진 선생을 수없이 만났지만 무슨 용건을 가지고 뵌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시작이 없고 항상 끝 또한 없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선생이 한창 매직 그림을 그릴 때였다. 한 뭉치를 그려 놓고 보라 하시면서 한 장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학사엘 몇 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비가 온다.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어찌나 우스웠던지 체면 불구하고 배를 쥐고 웃었다. 구름이 몰리다 보면 비가 되는데, 용은 구름을 몰고 다닌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용과 같다는 말씀이 아닌가. 장욱진 선생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알 수가 없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나를 혼내는 것인지 종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 자기 독백이었을 것 같다. 자기 얘기를 하기에도 창창한 것인데 어찌 남의 얘기까지 생각해서 하랴. 장욱진 선생은 남의 얘기하는 법이 별로 없다. 부득이 필요한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얼른 끝내고 먼지 털 듯이 이내 황당무계한 세계로 도망친다.
전원이 그리워 선생은 항상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시가 시끄러워서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덕소로 갔다가 거기가 번화해지니까 돌아오고 수안보 깊은 마을로 갔다가 또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신갈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19세기의 프랑스였더라면 고갱처럼 타이티로 도망쳤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욱진 선생은 숙명적으로 한국을 떠날 수 없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문제를 떠나서 선생의 세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과거 그리고 한국의 자연이 그의 고향인 것이다. 돼지, 강아지 그리고 까치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충청도 들판의 풍경들일 것이다. 그는 아마도 개량종 짐승들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그가 만약에 세퍼트를 그린다면, 그가 만약에 잉꼬 새를 그린다면...... 그것은 아마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그는 참새를 그린다. 참새는 우리 조상 대대로 민중의 삶 속에서 같이 놀던 짐승이다.
덕소 시절에는 강이 그림 속으로 많이 들어왔다. 강이 있고 뒤에 산이 있고 하늘에는 새가 자주 날아갔다. 한번은 매직으로 된 그림이었는데 하이얀 하늘에 다섯 마리의 새가 줄지어 서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장난 삼아 "선생님 저게 무슨 새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참새지."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을 받아서 "참새는 저렇게 열 지어 날지 않던데요."라고 하였더니 선생은 "내가 시켰지."하였다.
내가 시켰지! 나는 그 말씀이 두고두고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 그림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가 시키는 대로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브랑쿠시의 유명한 절구가 생각난다. "제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한다."내 화면 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내가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내 화폭 앞에서는 내가 제왕인 것이다.
어쩐 일일까. 그는 꽃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잎이 무성한 여름 나무를 그린다. 박수근은 이른 봄 몽우리 지는 과수원의 꽃을 그렸다. 늦은 가을, 추운 겨울의 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그렸다.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았으면서도 장욱진 선생은 봄 풍경이 없고 가을, 겨울 풍경이 없다. 여름 풍경뿐이었다. 무더운 여름, 그 나뭇잎들 속에서 새들이 놀고 원두막 안에는 윗통을 벗어제친 촌부가 앉아 있다. 생명이 활활 타오르는 찬란한 여름, 그리고 여름밤의 풍경들.
그것은 낭만이라고 쉽게 넘겨짚을 일이 아닐 것 같다. 그가 말로 하지 않으려 하는 무언가 심오한 장욱진 나름의 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하늘에는 해가 많다. 가끔은 그 하늘에 달도 함께 있고 어린 시절의 세계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은 채 동시적으로 살아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잃어버린 원초적 꿈의 세계를 그는 지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생을 그곳에서 고독하게 싸워서 이겨낸 승리자로서의 장욱진이 되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가치가 혼돈된 세계에서는 정말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장욱진 선생의 그림은 한국 사람이어야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요즈음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지역적인 특수 요인을 갖고 있다는 것이 후진적인 형태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시대일수록 특수 요인을 찾아서 지킨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본원(本源)으로의 회귀, 그래서 장욱진 선생은 고독하다. 한국 사람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그림, 장욱진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그림, 그것이 장욱진의 그림이다. 어찌나 외곬이었던지 유사한 장욱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이즈음 더더욱 고독해졌다. 철저하게 회화이면서도 세계 미술사의 어디에다 비교해도 분석하기가 어렵게 되어 간다. 치열한 전투가 그의 내부에서 끊일 사이 없이 일고 있다. 치열한 정신력으로 하여 그것을 지탱한다. 화면의 긴장감이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있다. 얼마나 장한 일인가.
캔버스에는 물감이 최소한도로 발라진다. 그 인색함이 회화성의 아주 가장자리까지 다다르고 있다. 화면 구성의 기준선에서는 벌써 떠났다. 그가 늘상 그리고 있는 나무는 나무라는 상식을 벌써 떠났다. 모든 것이 상징적으로만 남아 있다. 앞으로 어떻게 갈 것인가. 그러나 장욱진 선생의 숙명은 캔버스에서 떠날 수가 없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 떠날까 말까 하는 형국으로 앉아 있다. 근년에 않던 술바람이 그를 찾아왔다. 그림이 안 풀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몸을 다치고 병상에서 "이제 그림이 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그는 '그림 그린다는 것이 정신과 육체를 소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 면에서도 장욱진 선생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그 긴장감, 그 매력, 그 위트, 그 여유...... 고향 산천이 지금 그대로 있는 것처럼 장욱진 선생도 그대로이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장욱진 선생이 존경하던 노수현 선생의 일이 생각난다. 일제 말기 때의 일인데, 술먹기 대회가 있었다 한다. 노 선생이 이등을 했는데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방이 늦었는데 어떤 조그마한 사람이 남대문을 향하여 뛰어갔다가 우뚝 서고, 물러났다가 또 남대문을 향해서 달려갔다가 문 앞에 이르러 우뚝 서기를 계속하더라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파출소 순경이 불러다가 물어 보니 남대문을 뛰어넘으려 한 것인데 앞에 가서 보면 너무 높고 멀리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문제없을 것 같아서 그러고 있노라는 이야기였다. 그분이 바로 노수현 선생이었다.
장욱진 선생의 도전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다리를 만들던가 하는 것이 서양적인 범례일텐데 장욱진 선생은 정신력으로 정복하려 한다. 언뜻 무모한 것 같지만 계산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뛰어넘는 정신의 차원이 또 있다고 믿어야 할 것 같다.
거대한 서구 미술사 앞에서 정면으로 항거할 수 있었던 장욱진, 그 그림이 어찌되었든 지간에, 제삼 세계 권에서는 단연코 두드러진 기념비적인 존재가 장욱진 선생이다. 그의 끈질긴 정선력과 만만한 기백은 높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 미술의 여러 가지 문제를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기에 거기에 항거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형태로써 해낸 장쾌함이 있다. 화면 구성하는 것이라든지, 물감 바르는 방법이라든지, 형태를 파악하는 소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장욱진 선생의 경우 전혀 엉뚱하게 처리되고 있다. 서구권의 방법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동양화의 방법에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명암도 없고 면(面)도 없고 투시법도 없고 화면 분할도 없고, 그리하여 마치 어린이가 사물을 파악하는 것과 유사하게 보인다. 비례 감각과 공간 감각 등이, 굳이 미술사에 접목시켜 보고자 한다면, 원시 미술이나 한국의 민화 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모든 것을 장욱진 선생은 참으로 오묘하게 특이한 방법으로 성공하였다. 그러노라고 장욱진 선생은 많은 까다로운 생각을 했고 또 그것을 추진하느라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다.
장욱진 선생의 그림은 아이들도 보고 즐겁다고 한다. 생각할 시간을 갖기에 앞서 우선 즐겁게 전달되는 것이다.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나도 저렇게 생각했다던가 내가 그린 것 같다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그림을 그리는 장욱진 선생은 까다롭고 까다로운 생각으로 진땀을 빼는데, 보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독해해 버리고 만다. 누구든지 장욱진 선생의 그림을 보는 순간 저 그림은 나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그림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진기한 면인 것이다. 현대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함정, 즉 난해한 문제에서 그는 제외되고 있다. 그것 또한 매우 중요한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그림은 그렇게 까다롭고 많은 것을 겪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림 자체는 쉬워야 할 것 같다. 진리는 간단하다. 그것을 터득하기까지는 한없이 어렵다. 하나, 알고 보면 간단한 것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장욱진 선생은 기행 기담들을 많이도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여서 한번 얘기가 시작되면 할 얘기들이 많아서 차례 기다리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는 그렇게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는 이제 큰 나무가 되었다. 수많은 가지에 갖가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풍경은 참으로 보기에 좋다. "나는 심플하다." 한 잔 술이 들어가면 수도 없이 외쳐 댔던 그 말들을 이제는 잊으셨나, 아니면 심플마저 졸업을 하셨나, 장욱진 선생은 요즘 적당히 웃는 것으로 말을 대신한다. 그와 마주앉으면 나도 속으로 말을 한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