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 인도)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 인도)
아래는 오귀환의 글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1757년 벵골 지방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벵골 태수의 군대가 맞붙은 플라시 전쟁 때 영국군은 단지 3천명인데도 5만명의 벵골군을 물리치고 있다. 그 영국군 가운데 백인은 단지 3분의 1이었고, 나머지 3분의 2는 인도의 용병들이었다. 이 플라시 전쟁으로부터 1세기 이상 영국의 인도 지배가 공고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 앞장 선 사람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다. 그는 20세기 중반까지 완고하게 식민지배를 계속하려는 세계 최강의 무력국가 영국에 비폭력적 무저항운동(사티아그라하·원뜻은 ‘진리를 위하여’임)으로 맞선 사람이다.
간디는 1869년 인도 서해안 구자라트주 포르반다르에서 대대로 지방태수국의 총리를 지내온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평생 힌두교적 가치관과 종교관의 영향을 짙게 받게 된다. 13살 때에 동갑인 카스투르바이와 결혼한 간디는 19살 때인 1888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변호사 자격을 딴 뒤 귀국한다. 그는 1894년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인도인 상사의 고문 변호사 자리를 제안받자 곧바로 남아프리카로 간다. 이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시작으로 다른 인도인들의 참상에도 눈뜨게 된다.
남아프리카의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의 일이다. 1등칸의 표를 가지고 1등칸에 탔던 그는 역무원에게서 짐차칸으로 옮기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는다. 그가 거절하자 경찰까지 동원해 그를 강제로 기차에서 끌어내리고 짐까지 내던졌다. 유색인종이 1등칸에 탔다는 이유에서다. 이튿날 다시 역마차를 타고 여행을 계속하던 그는 이번에는 백인 마부로부터 심하게 얻어맞는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마부석 앞 바닥으로 물러나 앉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간디는 남아프리카 거주 인도인의 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백인들의 기도를 계기로 본격적인 정치적 활동에 나선다. 그 결과 ‘나탈 인도 국민회의’를 조직하게 된 그는 그 뒤 남아프리카에 20여년 머물며 인두세 폐지운동 등 인도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일한다. 남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를 비롯해 세계의 여러 종교를 접하게 된 그는 힌두교의 주요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 깊은 영감을 얻는다. 또 톨스토이와 러스킨의 사상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그 결과 러스킨의 저작에서 영감을 받아 농사를 지으며 <인디언 오피니언>이라는 주간신문을 발행하는 센터인 피닉스공동체를 만드는가 하면, 톨스토이 농장도 세우게 된다. 이곳 농장에 신문사를 옮겨 놓고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신문을 발행했다. 농장에 사는 모든 식구는 같은 임금을 받는 공동체였다. 톨스토이 농장은 신문사이자 농장이자 학교이자 공동체였다.
이 무렵, 간디의 검소함이 잘 드러난 일화가 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 뿐이오” 간디가 1931년 런던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한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간디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당시 영국 당국은 만일 인도인들이 이 전쟁에 협력해준다면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식으로 회유책을 내놓고 있었다. 간디 역시 이 약속을 믿고 앞장서서 인도인의 전쟁 참전과 영국 지원을 호소했다. 다른 한편으로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인권운동 투쟁이 기본적으로 한 구성체 안에서 영국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허용해달라고 주장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인 역시 백인과 동등한 의무를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과 결사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반동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영국의 이런 반동적인 억압정책에 반발해 인도인들의 반영민족운동이 일어나자 간디는 앞장서서 그 운동을 지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논지를 펴는 <영 인디아>를 창간하는 한편 영국제품 불매 운동, 물레 장려, 비폭력적 무저항주의 등 전 인도적 차원의 운동을 주도한다. 인도 민중들은 간디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간디의 지도에 따라 서로 팔을 걸고 대열을 지은 채 나아가 몽둥이로 얻어맞고 쓰러지는 역사상 유례없는 비폭력 시위에 참여했다. 인도의 대중은 그가 물레를 돌리면 같이 물레를 돌리는 것으로 영국 물품을 배척하는 운동에 떨쳐나섰고, 그가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소금을 만들었다. 인도 역사상 한 지도자의 정치적 이니셔티브에 대해 이처럼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는 일찍이 발현된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시민불복종을 준수하는 저항자는 불복의 결과로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폭력이 인간 속에 있는 짐승의 법칙이라면 자기 고통, 즉 시민불복종은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법칙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양심을 최고로 여기는 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됩니다.”(간디가 1919년에 쓴 편지)
다민족·다종교로 갈갈이 찢겨져 제대로 된 하나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것만 같던 인도인은 한 인간의 지도 아래 뭉쳐 그렇게 인간의 존엄을 증명했다. 그리고 역사를 바꿔나갔다.
1930년대 초 간디는 노령을 이유로 일단 정치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자와할랄 네루 등 젊은 지도자에게 자리를 맡긴 뒤 칩거한 채 묵상과 헌신 등으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간디는 다시 민족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는 독일 나치스 등 파시즘에 대해선 항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해 지난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맹목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은 반대했다. 영국이 당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모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 당국은 전시라는 이유와 반영적이라는 이유로 간디를 비롯해 국민회의 지도부를 모조리 붙잡아 투옥했다.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그는 아내를 잃기도 했다.
독립은 다가오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간디 등 지도부가 투옥돼 있는 동안 인도의 힌두교 사회와 이슬람교 사회는 결정적인 분리독립쪽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결국 1947년 8월15일 인도는 평화적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하나의 인도가 아닌, 무슬림의 파키스탄과 힌두의 인도로 분리된 채였다. 그래도 간디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 나라의 통합을 호소하며 인도 전역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도 대세를 되돌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48년 1월30일, 간디는 저녁 기도를 드리러 가던 중 과격 힌두교도의 총격을 받고 7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간디에게 '위대한 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바쳤고, 이후 인도의 국민들은 간디를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게 되었다.
“내일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배워라.”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폭력이 선한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보일 때라도 그 선은 일시적인 것이고, 그 폭력이 행한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간디가 남긴 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