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문인 일화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 체코 프라하)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8:36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 체코 프라하)

 

 1875년 12월 4일 아버지 요셉 릴케와 어머니 소피 사이에서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아래 있던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부친 요제프 릴케는 군인으로 입신(立身)할 생각이 있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십 년 간의 군복무 후에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들어갔다. 검소하고 성실한 성품이었다고 하며 65세로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친 조피아는 허영심이 강한 여자였다고 한다. 이 부부 사이에는 처음 딸이 태어났으나 이내 죽고 이어서 아들이 태어났다. 카톨릭의 영세를 받고 르네 마리아 릴케라고 명명되었다가 훗날 살로메의 권유로 라이너(Reiner)로 개명하게 된다. 그런데 릴케는 다섯 살 때까지 계집애처럼 자랐다. 그래서 머리를 길게 기르고, 옷도 여자아이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죽은 딸에 대한 모친의 변질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마리아(Maria)란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1884년 양친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 끝에 이혼하고, 이후 어머니에 의해 양육된다. 1886년 부친의 희망에 따라 성(聖) 폴텐의 육군 유년학교에 국가장학생으로 입학하고,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군사학교 시절을 나중에 릴케는  참담한 시련의 시기로 묘사했다.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시기로 이 때였다.

 1891년 7월 부친을 설득하여 건강상의 이유로 사관학교를 그만두고, 도나우 강변의 린츠 실업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연애사건으로  퇴학당했다.

 이 무렵에 오스트리아 포병장교의 딸 발리 폰 다비트 로온펠트를 알게되어 서로 사랑한다. 이 관계는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1894년 처녀시집 <인생과 소곡(小曲)>출판하여 애인 발리에게 헌정했다.

 1895년 가을에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여 겨울학기에 미술사, 문학사, 역사철학의 강의를 들었다.

 1897년 5월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부인(독일 작가이며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녀는 취리히대학에서 종교학·신학·철학을 공부하였다. 애인이었던 니체의 구혼을 거절하고 여성·종교문제 저술에 전념하던 중 동양학자 안드레아스와 결혼하였다. 1897년 그녀는 자신보다 14세 연하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릴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의 친구이자 제자가 되어 그 이론에 대한 저술을 발표하였으며 정신분석치료로 일생을 보냈다. 1952년 그녀가 릴케와 나눈 편지들이 책으로 출판되었다.)을 알게 된다. 단순한 애정관계로 시작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정신과 영혼을 나누는 벗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한때 니체의 애인이기도 했던 루는 릴케의 삶에 있어서 어머니 같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으며, <생애의 회고>에서 “나는 릴케의 아내였다”라는 고백을 했다.

 1899년 4월 살로메 부부와 동행하여 러시아 여행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톨스토이를 만나기도 했다.

 1901년 4월29일, 여류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하여 베스터베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클라라는 1897년부터 1898년까지 조각가 막스 클링어에게 배웠고, 1898년 파리로 가서 로댕(Auguste Rodin)의 제자가 된 여류조각가이다.

 1902년 8월 하순까지 베스터베데에 거주했다. 부친에게서 경제적 지원이 끊어져서 생활이 어렵게 되자 딸 루트와 아내 클라라를 처가에 맡기고 혼자 파리로 옮겼다. 경제적 곤궁을 타개하기 위해 <로댕론>을 쓰기도 했다.

 1905년 3월 이후 독일 각지를 전전하다가 9월 파리로 돌아와서 로댕의 집에 입주했다. 로댕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창작의 자세는 릴케의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 제 7시집 <시도시집(時禱詩集)>출판하여 루 살로메에게 헌정했다. 1906년 3월14일, 부친 요제프 릴케가 사망했고, 곧 로댕과의 불화로 로댕의 집을 나오게 되었다.

 1907년 10월 세잔느의 유작전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아내 클라라에게 세잔느 평을 보냈다. 이 무렵 로댕에게서 화해의 편지를 받고 기뻐했다. 제 8시집 <신시집>출판했는데, 로댕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시집>은 결코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이라고 릴케는 말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출판된 소설 <말테의 수기>는 파리에서의 죽음과 불안, 고통과 절망의 체험에서 나온 릴케의 대표적 산문이며, 자신의 내적 고백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신진 작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품이었다.

 1914년 2월 베를린에서 피아니스트 하팅베르크와 사랑하게 되어 뮌헨, 파리, 두이노 성 등을 전전하다 5월에 헤어졌다. 6월 1차 세계대전 발발했고, 파리에 있는 그의 재산은 모두 압류 당했다. 전쟁중 주로 뮌헨에 거주하며 여류화가 루 알베르 라자르와 함께 생활했다.

 1919년 6월 스위스로 이주했다. 제네바에서 여류화가 클로소브스카와 알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가 유명하다.

 1926년 10월 뮈조트 성에서 장미를 꺾다가 왼쪽 손가락에 가시가 찔려, 그것이 화농하여 백혈병 증세가 나타났다. 발몽 요양소에 들어갔지만, 그 해 12월 29일 새벽에 발몽 요양소에서 조용히 永眠에 들어갔다.

1927년 1월 2일 유언에 따라 라몽의 언덕위에 있는 교회옆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묘비명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토록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릴케 자신 스스로 "예술가에게는 깊은 외로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듯이. 릴케의 작품에는 고독을 노래한 시가 많다.

 릴케의 시는 우리 나라 근대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윤동주, 김춘수, 김현승 등에 영향을 주었다. 윤동주는 순수한 동심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릴케의 시를 수용하였고, 김춘수는 사물에 내재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실존적 탐구로 릴케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김현승은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에 대한 경건한 성찰의 측면에서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