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1850-1893, 프랑스 노르망디)
모파상(1850-1893, 프랑스 노르망디)
1850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디에프 근처 미로메닐 성(센 마리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출생 기록은 가짜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는 페캉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버지 구스타브는 네덜란드 귀족이었고 예술적인 기질은 어머니 로르에게서 이어받은 것이다.12세 때 부모가 별거하자, 어머니 밑에서 문학적 감화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69년부터 파리에서 법률공부를 시작하였으나, 1870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1872년 아버지의 도움으로 해군성 ·문부성에 취직,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머니의 어릴 때부터의 친구인 G.플로베르에게서 직접 문학지도를 받았다. 1874년 플로베르의 소개로 E.졸라를 알게 되었고, 또 파리 교외에 있는 졸라의 저택에 자주 모여 문학을 논하던 당시의 젊은 문학가들과도 사귀었다. 1880년 졸라는 모파상을 포함한 6명의 젊은 작가들이 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단편집 《메당 야화(夜話)Les Soires de Mdan》를 간행하였는데, 모파상은 여기에 《비곗덩어리Boule de suif》를 실었다. 이 작품은 날카로운 인간관찰과 짜임새 등에서 어느 작품보다도 뛰어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이로써 그의 문단 데뷔를 확고히 하였다.
1883년에는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 Une vie》을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은 선량한 한 여자가 걸어가는 환멸의 일생을 염세주의적 필치로 그려 낸 작품으로서 문명(文名)을 더욱 높였을 뿐 아니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모파상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단편에 나타나는 외설적인 묘사가 지나치게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L.N.톨스토이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모파상은 이미 27세경부터 신경질환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증세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불과 10년간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외에 《벨아미 Bel-Ami》(1885) 《몽토리올 Mont-Oriol》(1887) 《피에르와 장 Pierre et Jean》(1888) 《죽음처럼 강하다 Fort comme la mort》(1889) 《우리들의 마음 Notre cœur》(1890) 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작품에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 어두운 염세주의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그의 무감동적인 문체를 통해 그의 작품 전체에 이상한 고독감을 감돌게 한다. 이런 경향은 당시의 시대적인 영향도 있으나, 그보다도 그의 신경질환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병은 더욱 악화되어, 1891년 최초의 전신 마비증세, 1892년 1월 2일 니스에서 자살을 기도 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으나, 이듬해 7월 6일 4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몽파르나스의 공동 묘지에 매장되었다.
아래는 스승 플로베르와 관련된 일화이다.
[ 프랑스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1857년 <보바리 부인>을 출간하며 프랑스 문학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자료를 수집하고 현지 조사하는 데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플로베르는 친구의 여동생에게서 자신의 아들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글 한 편 발표하지 못한 청년은 마음이 조급해져 플로베르에게 항의했다. "제자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플로베르가 청년에게 물었다.
"자네가 우리 집에 온 지도 오래되었군. 그러니 우리 집 계단을 수천 번 오르내렸을 텐데, 그 계단의 수가 몇 개인지 아는가?"
청년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 있었다. 플로베르는 다시 말했다.
"자네는 계단의 숫자 같은 하찮은 것을 왜 세라고 하는지 모르겠지?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 그렇게 관찰력이 없어서는 안 되네. 우리 집안에 있는 것이라면 내 책 위에 먼지 하나까지 빠뜨리지 말고 살펴 두게. 그리고 자네 키가 넘을 정도의 원고지에 습작을 하게."
청년은 그제야 자신이 날마다 스승의 집을 건성으로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작문 공부를 했다. 1880년 청년은 마침내 첫 소설을 발표했으며, 마흔 세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또한 그의 대표작 <여자의 일생>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청년은 바로 플로베르가 만년에 가장 사랑했던 제자 모파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