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李白/701~762)
이백(李白/701~762)
이백의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모친이 그를 임신했을 때 태백성(太白星-일명 金星)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므로 太白이라는 字를 붙였다는 설이 있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詩仙 또는 神仙이 하늘에서 땅으로 귀양와서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謫仙人이라 불리기도 한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노력하여 "十歲觀百家"라 불리었다. 그는 "一鳴驚人,一飛沖天"(일명경인,일비충천-한번 울면 세상을 놀라게 하고 한번 날면 하늘을 찌른다)의 크 뜻을 품고 천하를 호령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20세를 전후로 四川지역을 유람하고 26세(726년)부터 집을 떠나 10년에 걸친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이 방랑생활은 시인에게 호방하고 낭만적인 詩風을 심어주었다.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게 된다.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너무 자주 술에 취해 물에 빠져 꽁꽁 언옷을 입고 들어오곤 해서 玄宗(현종)은 宮女十五名 (궁녀십오명)을 동원하여 입김으로 언옷을 녹이게 했다한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과 양귀비가 베푸는 향연장에서 지은 시인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잔치에 무료해진 현종이 이백을 찾았다. 이백은 이미 궁궐 밖에서 만취된 상태였다. 현종이 웃으며,
「이한림(李翰林)이 또 주중선(酒中仙)이 됐군.」하고, 지필(紙筆)을 내려 노래(詩)를 쓰라고 명했다.
이백 여전히 대취중(大醉中)에
「주중선(酒中仙)에게 술을 더 주시든지 잠을 자게 해 주소서.」하고 애교 있는 농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 대한 굳은 기개와 자부심에 불타고 있었다. 신하들이 가슴을 조이면서 그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노래(詩) 짓기를 재촉하자,
「허허허 물보다 술을 한 잔 더 해야 시가 나오지.」하고, 술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술잔이 입에서 떨어지자 마자 청평조(淸平調) 3수를 줄줄 읊어 현종을 기쁘게 했지만, 그 속에는 양귀비를 한 대의 왕비(王妃)였던 조비연(趙飛燕)의 음란(淫亂)에 비유했고 절세미녀의 경국난세(傾國亂世)를 비꼰 것이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장안의 술집에서 취해 쓰러져 있으면 당대의 세도가인 고력사로 하여금 업어 들게 하였으며 손수 신발을 벗기게 했으니 그로써 원한을 품은 고력사의 모함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放浪 (방랑)길에 화음현 태수 앞에서 주정을 부리다가 묶인 몸이 되어 취조를 당하는데 다음 시 일수로 취조를 대신하였다.
「이전에는 내가 토했을 때 龍巾(용건)으로 오물을 닦고 天子(천자)가 맛본 국물로 해장을 했도다. 고력사가 나의 신발을 벗기고 양귀비가 내곁에서 벼루의 먹을 갈았도다. 天子(천자) 앞에 말을 달려도 용서했는데 화음현에서는 노새도 못다니게 하는가」하니 현감이 알아보고 壇下 (단하)에 내려와 사죄했다고 한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11살 아래인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그의 명시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을 감상해보자.
兩人對酌山花開 (양인대작산화개)
一杯一杯復一杯 (일배일배부일배)
我醉欲眠卿且去 (아취욕면경차거)
明朝有意抱琴來 (명조유의포금래)
둘이서 마시자니
산에는 꽃이 피고/
한 잔 한 잔 기울이다
끝없이 마셨네/
취했으니 자고싶네
그대는 가게나/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다시 만나세
두보는 평생동안 이백을 마음의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두보가 이백을 모습을 읊은 시 한수를 덧붙인다.
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이백은 술 한말에 시가 백편인데,
장안 거리 주루(酒樓)에서 낮잠을 자네.
황제가 불러도 배를 타지 않고,
나는 주중선(酒中仙), 껄껄 웃기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