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1861-1941, 인도 캘커타)
타고르(1861-1941, 인도 캘커타)
인도 캘커타의 명문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타고르의 어릴 적 이름은 '라비'였다. 이는 '태양'이라는 뜻으로, 자라서 온 인류를 비추는 태양이 되라는 뜻에서 붙여준 것이었다. 라비는 딱딱한 규제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래서 엄격한 가정교사들이 오게 되면, 꾀병을 부리고는 꽃과 새들의 노래를 찾아 산으로 들로 달아나 버리곤 했다. 조금 커서 다니기 시작한 학교도 라비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당시 영국의 지배 하에 있던 인도의 학교들은 영국 총독부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엄한 규율 속에서 단편적인 지식만을 암기하는 학교는 라비에겐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된 라비는 아버지로부터 영어와 천문학 등을 배우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께 아름다운 옛 이야기들과 옛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싹 틔웠던 라비의 문학적 소질은 이렇듯 자유롭게 공부하는 가운데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1살때부터 시를 썼고, 16세때 처녀 시집 <들꽃>을 내어 ‘벵골의 셸리’라고 불렸다.
그 후 청년이 된 타고르는 아버지의 권유대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유럽을 돌아보며 그는 문맹과 가난에 허덕이는 조국 인도의 실정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행에서 다녀온 타고르는 1891년부터 아버지 소유의 부동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해 깊은 동정심에 갖게 되었다. 이런 깨우침이 이후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 Galpaguccha〉에는 그들의 '비참한 삶과 자그마한 불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는 이 곳 실라이다에서 벵골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었다.
타고르는 1901년 타고르는 자신의 집을 팔아 '숲속학교'라 불리는 학교를 세웠다. 거기서 그는 인도와 서양의 각 전통에서 최상의 것들을 선별하고 조화시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의 학생들은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대자연의 품에서 지혜와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는 1921년 그곳에서 비스바바라티대학교를 세웠다.
타고르는 그의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보냈다. 간디를 방문했을 때,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 라고 그를 칭송한 시를 바쳤다. 이후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다.
타고르의 대표 시집은 <기탄잘리>다.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의 <기탄잘리>는 157편의 서정시를 묶어 1910년에 처음 출판됐다. 타고르는 이 시집에 모인 시 가운에 57편을 추려내 자신이 직접 영어로 옮겨 1912년에 영국에서 다시 출간했다.
이 시집의 성과 덕택에 그는 이듬해인 191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기탄잘리>는 1923년 김억이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한 바 있다. 문학사가들은 만해 한용운의 시들에서 <기탄잘리>의 영향이 읽힌다고 말한다.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패자(敗者)의노래' ‘동방의 등불’ 두 편의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방한을 요청하자, 거기 응하지 못하고 그 대신 그 신문에 기고한 작품이다.
주요한이 옮겨 그 해 4월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 시의 전문은 이렇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1941년 8월7일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그가 세운 학교안 방에서 80세로 작고했다. 타고르가 활동할 때는 인도와 방글라데시가 갈라지기 전이라고 한다. 지금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그의 시에서 각각의 애국가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