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매직아이/ 허영숙

톰소여와허크 2010. 9. 16. 17:12

매직아이/ 허영숙


상(像)1


   저물자 예고도 없이 눈이 내린다 하얀 점들이 길을 가득 메운다 멀거나 가깝게 있던 풍경을 또 다른 풍경이 덮는다 길을 내며 온 것들이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비밀 하나가 생겨난다 갈피도 없이 하루의 기록이 빠른 속도로 덮인다


상(像)2

 

   엄마에게 손목 잡힌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후 혼자 남은 아이가 방죽에 앉아 둥글게 몸을 만다. 늦도록 아무도 데리러 오는 이 없는 아이가 사금처럼 반짝이는 부름을 목 놓아 기다리지만 어둠이 길을 끊어놓는다 눈이 아이를 점점 지운다 믿지마 그레텔, 뿌려놓은 부스러기 달 조각들은 오늘 뜨지 않는단다 두려움이 방광 가득 고인다 요의를 참지 못하고 겁을 지리는 아이


   눈 내리는 저물녘이면 기억의 원근에 웅크린 시절을 선명하게 밀어올린다 오래 들여다보면 눈물이 먼저 차올라 저녁이 휘어져 보이던,


- 『바코드』, 문학의 전당, 2010.


감상: 눈이 내린다. 눈은 세상의 길을 지우고 덮는다. 정지된 풍경 속에서 새로운 길 하나가 비밀스레 열리면서 과거의 어느 한때로 이어진다. 겉으로 보는 세상 그 이면에 딴 세상을 슬몃슬몃 보여주는 매직아이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매직의 주인공은 “아무도 데리러 오는 이 없는 아이”이다. 저물도록 혼자인 아이를 눈(雪)이 덮고, 눈(目)이 지우기를 거듭하면서 시인은 상념에 젖어 든다.

   계모와 마녀, 추위와 어둠 등 적의로 가득한 동화에서 ‘그레텔’ 같은 아이는 시인의 유년일 수도 있고, 이웃의 소외된 아이일 수도 있다. 동화 바깥으로 나온 어른은 고립된 아이가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지 않도록, 그래서 더는 상처받지 않도록 주문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해 볼 수 없는, 아무도 돕지 않던 유년의 한때는 온전히 그 아이의 몫일 테고, 그 순간의 막막함을 생각하는 시인의 눈시울도 뜨거워져 있다.

   눈에 얼비치는 상은 실체가 아니고 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눈의 근육이 필요하다는데 아이가 성장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도 근육과 맷집을 키워 세상에 맞서는 것인지 모르겠다. 돌연, 매직아이(eye)에서 마법의 아이(boy)가 떠오른다. 혼자인 아이에게 엄마도 주고, 빵도 주고, 이웃도 주는 마법이 꼭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마법의 열쇠는 시인이 그러했 듯이 젖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거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