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 자연학교를 다녀와서
우리시 자연학교를 다녀와서 / 이동훈
대구 성암산에 작은애를 데리고 중턱까지 오르다가 내려왔다. 비가 지나고 물이 불어 계곡 물소리가 청청했지만 지난 삼일 간의 여운이 남아 있었는지 머리엔 울산 배냇골 안개가 아직껏 지피고 있는 듯했다. 몽롱한 의식을 깨치며 울리는 전화 소리. 여행 후기를 보내달라는 말씀에 덥석 응하고는 안개 대신 우박을 맞이하는 기분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 한 구절처럼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일 것을……. 뒤늦게 후회막급이다. 이제라도 내가 만나고 본 사람과 풍경, 들은 이야기를 더 까먹기 전에 서둘러 적는 도리밖에 없다.
달력에 크게 표시해 둔 여름자연학교가 오고야 말았다. 아내와 아이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차에 시동을 걸면서 잊었다. 경산을 출발하여 청도를 지나면서 뜨뜻한 바람에도 콧노래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울산에 닿아 석남사에서 학교가 있는 고개로 올라서면서 조금씩 긴장이 되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에 대한 긴장도 있었지만 꼭대기로 오르는 급경사에 내 낡은 자동차가 연신 앓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겨우 도착했더니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안개가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왔다. 울산학생교육원이라는 명찰을 달았지만 안개의 집이고 바람의 집인 게 틀림없다. 안개와 바람은 떠나는 날 아침까지 손님을 배웅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울산의 이민화 시인이 아는 체를 해주셔서 조금은 덜 무안하게 입구로 향하니 은빛 머리칼의 신현락 시인이 반겨 주신다. 더 늦게 올 줄 알았던 서울팀이 벌써 와 있었던 것이다. 잘 빠진 고속도로를 두고 이리저리 고부라진 국도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사님께서 고갯길 체험을 제대로 시킨 셈이다. 좋은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인 것일까. 풍경은 좋았지만 그 덕에 멀미를 호소하는 분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장시간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박영원 시인께서 이튿날까지 고생하시는 듯해서 마음이 쓰였다.
행사 진행을 앞두고 바람을 쐬러 나왔던 분이 자연스레 일행이 되어 주위를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장영희 시인이 영남알프스와 주변의 특기할 만한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하시는 데 거의 전문 해설가 수준이시다.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그 옆에 분이 그 이상이라고 동의해 주셨다. 어찌어찌해서 장 시인의 고향인 예천 회룡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아름다운 마을이 하천 정비와 보 설치로 인해 훼손될 여지가 많다며 걱정을 하신다. 일전에 우리시에서 생태시와 생태주의 시인을 옹호하는 권두시론을 썼던 분이란 걸 직감했다.
산책에서 돌아오니 진즉부터 노래를 부르시며 운동장을 도시는 분이 있었다. 우리시 홈페이지에서 풋볼이란 닉을 쓰시는 홍속렬 시인이었다. 한때 상무에서 축구대표팀 감독까지 지낸 분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끝나는 날에도 체조 강습을 기꺼이 해주셔서 지친 일행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셨다.
바깥바람이 좋아서인지 엉덩이 댈 만한 자리에 시인들이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번 여름자연학교 교장선생님인 김석규 시인의 맞은편에 앉아서 안부를 묻고 답하는 분은 바로 오늘의 초대 작가인 정일근 시인이다. 두 분은 서로 인연이 있는 사이란다. 다음날 초대 작가인 양문규 시인은 임보 시인과 인연이 있다고 했다. 사람 사이 조금씩 영향을 주고받고 살게 마련이다. 좋은 인연은 뭘까, 곰곰 생각해 본다. 그냥 좋은 게 제일 좋은 인연이란 말에 공감하면서도 서로를 발전시키는 인연도 그럴 거라고, 그런 인연이 그리워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김석규 시인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신인상 시상이 곧바로 이어졌다. 우리시가 배출한 두 명의 신인은 한문수 시인과 박승출 시인이다. 임보 시인의 평이 아니더라도 시에 대한 애정이 흠씬 느껴지는 작품을 쓰신 분이다. 한문수 시인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그날 저녁에 바로 돌아가야 했다. 먼 길을 생각하니 상패와 꽃다발과 가방이 무거워 보였지만 새로운 길에 대한 설렘이 여정의 피로를 덜어 주었으리라 짐작한다. 박승출 시인은 소감 발표에서 상 받으러 이박삼일이나 나가야 되느냐는 아내의 말을 옮겨서 웃음을 자아냈다. 다음날 일정을 같이 소화하면서 시인의 소탈한 면모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지는 특강 시간엔 정일근 시인이 선택과 집중이라는 내용으로 자신의 시론을 재미있게 소개했다. 정 시인은 선택보다는 집중이 자신에게 맞았다고 했다. 경주 남산에 대해서, 혹은 고래에 대해서 집중하고 그 집중한 결과로 시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것에 대해서 써야 좋은 글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집중의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다만 집중하고 싶은 대상을 만나야 한다는 문제와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와 여건이 같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에너지의 원천은 사랑이라고 한다. 더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주변의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남유정 시인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런 사회와 회원들의 참여로 밤이 깊어갈수록 강당의 열기는 더해졌다. 늦은 저녁에는 울산 두레문학회 회원과 지방에서 찾아온 시인 위주로 시 낭송회가 이루어졌다. 부산과 대구에서 온 시인의 면면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동향의 정숙 시인, 정하해 시인, 장혜승 시인에게 사회자가 붙여준 삼총사라는 칭호가 재미나기도 했다. 낭송회 사이사이에 박은우 시인의 하모니카 연주를 비롯하여 가요, 국악, 벨리댄스 등의 공연이 있었다. 박현웅 시인은 공연자를 초빙하기 위해 서울에서 울산으로, 울산에서 창원으로 오가는 살인적인 일정을 말없이 소화해냈다.
여름자연학교엔 취침 시간을 지키라는 선생님들의 규율이 없어서 좋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이야기가 시들해지면 노래를 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함께 한 조병기 시인은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여서 보는 사람을 덩달아 흐뭇하게 만드셨다. 당일엔 느끼지 못했지만 다음날, 신현락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장영희 시인이나 이대의 시인 이하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분위기를 업시켜 놓으면 신 시인이 기어이 마이크를 잡고 다운시킨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북한강에서, 송학사 등의 신 시인의 유장한 레퍼토리를 귀담아 듣지 못한 게 유감이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신 시인의 팬으로서 시에 대한 열독은 물론이거니와 노래에 대해서도 그러해야겠다고 약속을 둔다.
긴 밤은 그렇게 가고 이튿날 일정이 시작되었다. 좋은 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주제로 양문규 시인의 강연이 있었다. 양 시인은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역시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담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교와 수사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소통이 우선이라는 것에 의문을 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소통을 기본 전제로 하더라도 진실한 감동을 주기 위한 기법에 대한 고민은 각자의 몫으로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남은 일정과 과제는 대왕암과 태화강 십리 대숲을 돌며 백일장 시제를 생각하고 다듬는 것이었다. 대왕암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제 하루는 산안개로 속까지 젖었다면 오늘 대왕암에서는 바람에 따라 무시로 일어나는 바다 안개로 흥이 났다. 그간 도시에 찌든 때를 이틀에 걸쳐 말끔하게 씻어가는 기분이었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는 시간 차를 두고 오는 일행을 배려해서 찍사님들이 셔터를 서른 번은 족히 눌렀을 성싶다. 그래도 다들 환한 낯이다. 김경성 시인, 이민화 시인, 이대의 시인, 박현웅 시인, 강동수 시인은 홍길동의 후예인가 보다. 언제 나타나서 언제 찍고 가는지 모른다. 덕분에 우리시 행사 사진은 늘 풍성하다.
태화강 대숲 길도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쓰는 돈보다 버는 돈이 더 많다는 동네인데 산림 복원이나 휴식 공간 조성 등 공동체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돈을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 분과 앞서 길을 가다가 어디서 방향을 놓쳤는지 울산 문협에서 전시해 둔 시화를 보지 못해서 조금 아쉬웠다.
이동 시에 박승출 시인, 홍해영 시인, 허연숙 시인과 함께 우종태 시인의 차를 이용했다. 나중에 백일장 심사 결과, 홍 시인이 장원을, 허 시인이 차상을 휩쓸었으니 대단한 사람들과 동행한 셈이다. 홍해영 시인은 시종일관 유쾌한 말씀과 웃음을 주더니 상을 받은 시는 삶의 쓸쓸한 부분을 다루어서 이채로웠다. 허연숙 시인은 낮술이 깨지 않아 고생하고 밤새 누구보다도 더 놀이에 열중했는데 언제 詩作을 했는지 궁금하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울산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르는 모습도 기억에 남아 있다.
저녁 시간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 낭송회와 공연이 어우러졌다. 색소폰을 부는 이영준 시인과 기타 치며 노래하는 김생수 시인이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이분들께 받은 명함에는 불우이웃을 위해 무료 공연을 한다는 문구도 보인다. 환하다는 것은 밝은 곳을 찾아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어둠을 안을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벽이 올 때까지 지치지 않는 사람들을 피해 숙소로 가려는 순간, 조삼현 시인이 손을 잡는다. 오늘 일찍 일어나서 뒷정리를 같이 해야 할 것 같다고 그러신다. 생각보다 조금 더 잠을 잔 것 같다. 머리는 아팠지만 조 시인의 당부 말이 생각나서 강당에 나갔다. 실내가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만큼 말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고 놀라움과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이 교차했다. 조삼현 시인은 보이지 않고 구슬 같은 땀을 흘리시는 분은 따로 있었다. 조봉익 시인이었다. 뒷정리를 생각한 조삼현 시인이나, 실제 뒷정리를 하신 조봉익 시인, 두 분께 모두 감사드린다. 요리조리 빠질 궁리만 하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점점 끝이 보인다. 지각 벌로 황정산 사무총장에게 밥을 사라는 홍해리 이사장의 말씀에 황 시인은 여자 분만 따로 사겠다고 피해 간다. 때마침 딸내미의 전화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우쳐 준다. 이번에 내려오지 못한 나병춘 시인이 전화를 주신다. 고마운 일이다. 행사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이성웅 시인은 멀리서 보내온 복분자 술을 두고 맛만 보면 안되겠냐는 사모님의 간절한 청을 끝내 거절했다며 그간의 소회를 밝혔다. 여러분은 행복하실 줄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 불행했다며 홍해리 이사장이 엄살을 떠신다. 치아 치료 때문에 술을 한 잔도 드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핍감이 시를 쓰게 만든다고 했던가. 시에 가까이 가는 길은 사람이 고프고, 술이 고프고, 무엇보다 시가 고파야 한다. 이번 여름자연학교를 지나와도 난 여전히 뭔가 고프다. 그 고픈 것의 정체를 찾아서 내년의 삼척을 기다려야 할까 보다.
마지막 행선지인 반구대 암각화로 가지 못하고 청도, 경산 방면으로 산을 넘어 돌아왔다. 임동윤 시인과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온 정이랑 시인과 새로 동행을 했다. 경산으로 접어들 때 즈음 바로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작달비가 엄청스레 쏟아진다. 지난 삼일을 추억으로 돌려놓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듯이.
- 2010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