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이종문
밥/ 이종문
초파일, 작은 절집, 공양간 그 어귀에 긴 행렬 늘어섰네, 밥 한 그릇 먹을 행렬,
그러나 밥은 동났네, 이것 참 큰일 났네
목말라 기절한 꽃 조리개로 물을 주면 생기가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지듯이
밥 먹고 못 먹고 따라 그 얼굴이 천양이라
먹으면 부처님도 못 먹으면 중생이니, 부처가 별게 아니라 밥이 바로 부처인데,
그 밥이 한 그릇 없어 부처되지 못하네
듣자 하니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식당과 화장실이 동쪽에 있기 때문,
부처-ㄴ들 어쩌겠는가, 동쪽으로 와야지 뭐.
- 『정말 꿈틀, 하지 뭐니』수록
- 절집 공양간만 믿고 채비도 없이 산에 올랐던 사람에게 밥이 동났다는 비보가 전해진다. 자신과 가족의 얼굴에 스치는 낭패감이 원망으로 바뀌고 서로의 허물을 탓하기도 한다. 반면에 먼저 밥을 먹은 사람은 더없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여유를 즐긴다. 안녕과 공덕을 빌려 왔던 애초의 마음은 다르지 않은데 밥을 먹은 사람은 불심으로 충만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밥을 놓친 사람은 불만을 감추지 않으니 밥이 곧 부처라 할 만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갈등과 다툼의 이유를 적나라하게 까발려 놓으면 ‘밥’과 ‘밥그릇’ 이 남게 될지도 모른다. 잘 싸는 게 잘 사는 일이라고 하는데 결국, 잘 싸는 건 잘 먹는 일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말처럼 먹는 것에 대한 바람은 그만큼 깊고 절실하다. 그러니 공평하게 밥이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자기 밥에 눈독을 들이는 건 당연해 보인다. 정말, ‘부처-ㄴ들 어쩌겠는가’.
시인은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식당과 화장실’ 때문이라고 말한다. 익살스럽게 던진 말이지만, 여기엔 최소한의 욕구가 충족되는 삶이 곧 부처 세계라는 함의가 있어 보인다.
자기 밥을 달게 먹는 건 중생이든 부처이든 어렵지 않은 일이다(그렇다고 아주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욕구가 부딪쳐 밥그릇 싸움으로 쉬이 번지는 게 중생들의 삶이고 보면, 적게 먹고 나누어 먹는 게 결국 부처 세계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