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이성부(1942-, 전남 광주)

톰소여와허크 2010. 10. 2. 09:49

이성부(1942-, 전남 광주)


아래는 박형준의 글을 줄인 것입니다.


  [ 이성부 시인은 1942년 전남 광주시 대인동 23번지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대에는 요즘처럼 ‘역’이라고 하지 않고 ‘정거장’이라고 부르는, 광주 정거장에서 3백미터쯤 떨어진 초가집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철길 너머로는 끝이 안 보이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철길 아래의 굴다리를 지나 길게 뻗은 둑길을 조금 걷다보면 넓고 깊은 경향저수지가 나타났다. 둑길에 펼쳐진 팽나무 고목들은 아이들의 몸이 들어갈 정도로 홈이 컸는데 어른들은 그것이 구렁이가 사는 구멍이라고 했다. 멀리 태봉산과 야트막한 야산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저수지와 들과 함께 모두 번화가로 변했다. 이 들판은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벼〉의 무대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해방과 관련된 유일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할머니 등에 업혀 광주역 광장에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검은 얼굴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내들이었다. 나중에서야 이들이 일본군 패잔병들임을 알게 되었다. 광주 수창 초등학교 3학년 때 6·25를 경험했다. 북쪽 멀리 장성(長城) 쪽에서 대포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의 걱정스런 얼굴과 수근거림에 이어 “피난할 사람은 피난하라.”고 번복되는 다급한 마이크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광주가 수복되고 그해 가을부터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 선수가 되어 공을 찼는데, 이때의 경험이 신문사 재직시절 아침마다 조기축구를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때 고모가 읽다 만 연애소설들인 《순애보》 《청춘극장》, 훗날 레미제라블의 번안임을 알게 된 《아 무정》등을 몰래 훔쳐보며 책읽기에 불을 댕겼다. 고모를 통해 문학에 빠져들게 된 셈이었다.

  어른들의 뜻에 따라 교사가 되기 위해 광주사범 병설중학에 진학했다. 2학년 때 축구부를 그만두고 ‘1일 3백 페이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책상 앞에 붙이는 등 책읽기를 집중적으로 하였다.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 등의 시를 접해본 것도 이 때였다. 3학년이 되면서 진로를 문학에 돌렸다. 황동규, 이제하, 마종기 등의 시가 실린 〈학원〉지에 자신의 시를 투고하여 활자화되어 나온 것에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결국 집안의 뜻을 져버리고 문학에 정진하기 위해 사범 본과 대신 인문계 고교인 광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인문계 명문고이면서도 ‘시인의 학교’라고 부를 정도로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배출한 학교라 마음에 들었다.

  입학하면서 문예반 활동에 들어갔는데 이때 김현승 시인을 뵙게 되었다. 조선대 교수로 있던 김현승 시인의 댁이 있는 양림동에 선배들을 따라 가면서 선생으로부터 사숙하게 되었다. “자췻방에서 젖은 톱밥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글을 쓴 문순태씨와 함께 일요일마다 찾아가 대학노트에 그동안 쓴 시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보여드렸다. 〈문학단체 무용론〉을 발표할 만큼 대쪽 같던 선생의 성품과 인생관, 문학관 등이 사숙하면서 은연중에 배어들었다.

  전국 규모의 고교현상문예를 휩쓸며 기고만장해 있던 고교 3학년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이훈’이란 이름으로 시를 투고해 1석, 2석으로 당선됐다. 당선 1선작은 〈바람〉. 박봉우, 박성룡 등과 함께 3년 선배였던 박경석씨가 당선 3석이었다. 심사를 맡았던 김현승 시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놔야 할 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실토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선생도 당선된 작품이 그의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1월 1일자 신문을 받아보니 자신의 시와 함께 “이훈씨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대단한 솜씨”라는 평이 실려 있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문예장학생으로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김현승 시인도 이 해에 서울의 숭실대 교수로 부임했다. 김광섭, 황순원, 조병화 선생이 포진해 있던 경희대는 말 그대로 문학의 요람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올라온 전상국과 단짝이 되었고 영문과에 다니던 김용성씨와도 어울렸다. 3학년 때 광주고교 후배인 조태일이 들어와 모두 지기가 되었다.

  4·19는 교복을 찾으러 친구와 청량리역으로 나갔다가 맞게 되었다.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이문동 자췻방에서 걸어서 청량리역까지 갔는데 차도가 온통 사람의 물결이었다. 저절로 대모대의 일원이 되어 시내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종로 4가에 이르러 친구와도 헤어지게 되었고 동대문 경찰서 근처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다음날 일찍 학교에 가니 정문에 탱크와 군인들이 서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시국이 어수선해도 시쓰기는 게을리하지 않아 신촌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김현승 시인에게 시를 보여드렸다. 5·16이 나던 2학년 때 현대문학에 〈소모의 밤〉이 첫 추천을, 이어 〈백주〉로 2회를 받고, 3학년 때 〈열차〉로 추천완료했다. 추천은 모두 김현승 선생.

  그런 다음 영장이 나오자 군에 바로 입대했다. 서울에서 더 이상 버틸 경제적 여력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2년간 철도 이동헌병대에서 중대행정병을 맡아 부산, 대구, 대전에서 복무했다. 제대해서 곧바로 광주집에 틀어박혔다. 집안이 어려워 복학할 형편이 아니었는데다가 시인으로 데뷔했다고 해서 어느 한곳에서도 청탁서가 날아오지 않았다. 66년에는 최하림 시인의 서울 장위동 자췻방에서 식객노릇을 하기도 했다. 지붕이 왼쪽으로 한참 기울어지고 툇마루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폐가와도 같은 집에서 엄동설한에 오돌오돌 떨며 지냈다. 최하림 시인은 돈이 떨어지면 굶고 지내는 게 보통이었는데, 힘이 빠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이불을 펴고 누워 잠만 자는 그의 손목을 끌고 장위동 입구 외상 튼 선술집에서 같이 밥 대신 막걸리로 끼니를 때웠다.

  더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가난한 화가들과 문인들이 모이는 금남로통의 ‘오센집’이라는 선술집에 매일 드나들며 막걸리에 취한 채 집에 돌아오곤 했다. 거기에서 인텔리의 젊은 노동자를 만나게 되었다. 벽초 홍명희를 비롯, 박태원, 이태준, 임화 등을 소상히 알고 있는 그와 격의 없이 친해져 그를 주인공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그 시가 67년 동아일보에 당선, 〈우리들의 糧食〉으로 게재된 〈노동자의 술〉이었다. 주인공이 된 그 노동자는 당시 광주에서 가장 높은 7층짜리 건물을 올리던 광주관광호텔 신축공사장의 인부였다. 투고 당시 결혼을 약속한 아내의 남동생 이름인 ‘한수현’을 빌렸다.

  은사 조병화 선생의 주선으로 서울의 성문각 출판사에 취직하여 고입, 대입 국어참고서를 집필, 편집, 교정하는 일을 맡았다. 한림출판사로 직장을 옮겼던 68년 7년간 연애했던 한수아씨와 결혼, 남가좌동에 터를 잡았다. 남가좌동의 모래내에 보증금 만원에 월 천원짜리 사글세방으로 출발했는데, 모래내는 비만 오면 진창길이 돼 “마누라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할 만큼 변두리였다. 이후 지금까지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

  이때 김현, 염무웅, 김지하, 김치수, 김주연, 김승옥, 이문구와 자주 어울렸으며 고은 시인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혜화동에서 하숙을 하던 염무웅을 도와 그가 맡아했던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1년간 참여하고 김현, 김화영 등이 주도한 《68문학》에 동인으로 활동했다. 전후 독일의 젊은 작가들 모임인 ‘47그룹’을 연상시키는 ‘68그룹’은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4·19세대, 또는 한글세대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68문학》은 몇년 후 계간지 《문학과지성》의 모태가 되었다. 이외에도 박성룡, 박봉우 등이 주도한 《영도》 동인에 참여했고 권오운, 김광협, 최하림과 함께 《시학》 동인을 결성했다. 《시학》 동인은 최하림 시인이 표지디자인을 맡고 본문 종이를 중질지로 쓰는 등 호화판으로 볼륨있게 꾸며 선배시인들의 부러움을 샀는데 창간호가 끝내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어려웠던 시절, 호주머니를 털어 고급동인지를 만든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출판사들의 열악한 근무조건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그는 “어떻게 하면 직장을 옮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일보에 기자모집 사고가 실린 것을 보고 근무하면서 한달여 동안 몰래 시험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여 69년 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신문사에 들어간 후 택시 운전수, 목수, 선생 등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모래내 서민들과 조기축구를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가끔 일요일에 고기를 잡으러다니는 등 애·경사를 같이 하면서 서민적 정서가 자신의 체질에 맡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언어들이 횡행하는 모더니즘 풍의 시를 버리고 서민의 정한에 뿌리박은 시들을 체질화하기 시작했다. 74년에는 유신체제를 거부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하고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으로 사장실에 호출이 됐는데 사장이 양주를 클라스잔에 가득 따라주며 마시라면서, “대통령이 내 친구인데 그러지 말라.”는 소리를 했다.

  70년대 말부터 신문에 인간문화재를 연재하면서 “조선 땅 구석구석 안 돌아다닌 곳 없는/제비 같은 쇠꾼 얼굴도 보이누나”(〈상쇠 崔씨〉), “크낙한 어둠 속의 어둠을 잡아 찔러, 두루 쓸모있게 만들어내는 친구가 있거니”(〈曺서방〉) 등 전통문화예인들의 버림받은 삶을 조망했다. 이러한 작업은 《前夜》 이후 9년만에 나온 《빈 산 뒤에 두고》에 나오는 연작 〈유배시집〉의 다산 정약용, 조광조, 허균, 송시열, 정희량 등 권력으로부터 추방당한 지식인의 초상을 그린 시들로 이어진다. 또한 동네에서 조기축구를 하면서 만난 이름 없는 서민들에게 붙인 헌시들에도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에게서 올곧은 정신을 발견하려는 시인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그는 고은의 〈만인보〉에 한발 앞서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80년 봄 고향 광주에서 터졌던 비극으로 인해 언어는 그에게 깊은 절망감으로 각인됐다. 계엄령 하에서 활판교정쇄를 들고 시청으로 중위, 대위들에게 검열을 맡으러 다녔고 어떤 진실도 보도될 수 없었다. 광주의 진상은 언론에 의해 ‘빨갱이’와 ‘폭도’의 난동으로 매도됐다. 그는 “진상을 밝혀주는 것이 언어의 힘인데, 언어가 허위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이때 뼈저리게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일체의 시작활동을 중단하고 80년 가을 현실도피와 지기 학대를 겸한 등산에 몰입했다.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20∼30대 때에는 거의 산을 오른 적이 없던 그가 40대에 접어들어 고통으로서의 산의 세계에 탐닉했다. 중학교 다니던 아들과 함께 구례부터 세석평전, 증산 등지까지 지리산을 하룻만에 종주한 적도 있었다. 일간스포츠 산악회인 월악회의 일원으로 전국 산악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일등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츰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과 사찰, 인물들의 흔적에 관해 공부를 하는 동안 자신이 산과 더불어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는 “산을 탄 지 10년쯤 흐르니까 자연 《빈 산 뒤에 두고》에 담겼던 언어에 대한 불신과 비참한 패배의식도 조금씩 산의 넉넉한 품속에서 씻기기 시작했다. 산시 등의 글이 그제서야 나왔다.”고 밝혔다.]

 

아래는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이성부 시인의 글입니다.


[학창시절 내가 만났던 좋은 시들은 내 정신의 키를 자꾸만 높여 주었습니다. 나는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이 볼 수 없는 먼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그래서 잠못들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학교 수업과 학과 공부는 엉망이 되어 갔습니다.

  소위 명문대학 입시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밤새워 글을 쓰거나 문학서를 읽고, 수업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기만 했으니, 이게 어디 요즘 같으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그렇게 나아가는 삶이 나의 길이요, 그 길에서 추호도 비켜나서는 안된다고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시를 읽고 좋아하고 쓰게 된 것은 중학 시절부터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선수가 된 나는, 중학 2학년이 되자 미련없이 축구부를 떠나 문예부로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도 문학은 운동을 하는 ‘재미’보다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내 영혼의 사춘기가 시에 눈을 떴다거나 할까요?

  고교 시절에 만난 좋은 시 가운데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가 있습니다. 광주에서 문학강연회가 크게 열렸을 때, 다형 김현승 선생께서 낭독하신 작품입니다. 서울에서 온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강연에 하품만 하고 있다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와 박력 넘치는 시의 가락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연단을 응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로서는 하나의 감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형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그 ‘자유’의 번역시를 빌려와 읽었으며, 그 시가 씌어진 배경과 그 시인에 대해서도 조금쯤은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시는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지나쳐 버리지 않는다, 좋은 시란 개인적인 감정 토로에 그치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시는 이민족과 총칼이 억압하는 상황에서도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좋은 시인은 그런 기개를 잃지 않는 대쪽 같은 사람이다…. ‘자유’를 여러 차례 읽으면서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와 광주 집에서 무위도식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미 나는 입대 전 대학 재학 중에 4.19와 5.16을 체험했으며, 이 와중에서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이라는 절차도 거친 뒤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학지에서도 원고청탁서 같은 것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취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친구 화실에 나가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 친구가 사주는 막걸리에 취해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드나들었던 ‘오센집’이라는 막걸리집은, 광주의 문인들과 화가들이 저녁마다 모여 담론을 펼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 주막에는 마침 그 무렵 신축 중이던 큰 빌딩의 토목공, 철근공 등 노동자들도 적지않게 모여 하루의 피로를 씻어가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 노동자들과도 친숙해져 말문이 트였지요. 허름한 옷차림의 노동자들 속에는, 내가 모르는 것을 ‘잘 아는’ 지식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들의 노동현장을 구경하는 때가 많았으며, 그 노동자 친구를 ‘나’로 변용시켜 ‘우리들의 양식’을 썼습니다. 등단 무렵(1961~62년)의 어렵고 관념적인 언어를 벗어나,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세계와 삶과 시대를 함축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를 가명으로 중앙지 신춘문예에 투고해 당선(1967년)하고, 그 상금으로 서울 변두리 모래내에 사글셋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출판사에 취직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모래내 일대는 당시 거의 모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구차하게 살아가거나, 원주민들이 사는 시골과 같았습니다. 이농을 하고 올라와 도시 노동자, 상인이 된 사람들의 거처입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버스 종점까지 10리 길을 걸어 출퇴근을 했고, 일요일이면 조기축구회에 나가 운동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동네 친구가 많이 생겼습니다. 넝마주이를 하는 친구를 따라 난지도라는 곳을 처음 가보았으며, 철공, 미장, 택시기사, 청소부들과 어울려 능곡, 파주 등지로 천렵을 나가는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먹물’이 좀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눈’으로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나는 어느 사이 그들과 동화되어 있는 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한 시대에 살아가는 개성적인 사람들이었으며, 모두들 가난, 외로움, 상처를 지니며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삶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가난, 외로움, 상처야말로 나의 시가 보듬고 가야 할 주제라고 믿게끔 되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말까지 씌어진 나의 시들은, 모두 이처럼 소외되고 어렵게 삶을 이끌어가는 변두리 서민들의 정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서민적 기질과 체질의 나의 시가 자리잡힌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집에서 30여 분 걸어가면 난지도 쓰레기산이 나타납니다. 그 아래에 쓰레기 더미를 정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천막촌 같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온통 하늘을 가리는 먼지와 쓰레기 썩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그 속에서 이리저리 손으로 파리떼를 쫓으며 점심을 먹는 남녀인부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파리 몇 마리 도시락 밥 위에 앉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밥을 먹었습니다. 소줏잔에 파리가 앉아도 그대로 들이켰습니다. 마치 파리들에게도 한 잔 마셔라 하고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짠하거나 슬펐던 것이 아니라 커다란 노여움으로 왔습니다.

  이러한 풍경을 아무튼 배운 사람들은 모르고, 또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서 나는 자꾸 화가 치밀었습니다. 노여움을 가득 가슴에 담고 나는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 노여움은 내 안에서 익어 하나씩 시가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이후에 나는 언어와 시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신문 기자였습니다. 기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고, 시인이 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삭제되거나 은폐되었습니다.

  불의와 허위가 교묘하게 미화되어 여론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그 갑갑한 시절에 시라는 것들은 진실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시와 언어를 경멸하는 시 몇 편을 썼습니다. 욕설과 자기 학대, 절망으로 가득한 그 시편들은 더욱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로부터 6, 7년 여 동안 나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시의 벙어리가 된 셈이지요. 김삿갓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방랑했다고 합니다. 그 5월에 싸우지도, 기개를 펴지도, 죽지도 못했던 비겁한 나를 나는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산으로만 더 깊이 빠져갔습니다. 산에서도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피해 되도록이면 인적이 드문 길로, 위험한 바윗길로만 다녔습니다.

  동방삭이 말단 벼슬아치를 하면서 “…나는 속세에 숨어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궁궐 속에서도 세상을 피하고 몸을 보존할 수 있는데, 어찌 꼭 깊은 산 속 쑥대집 밑이어야 하리”라고 쓴 글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나는 서울에 살면서도, 기자를 하면서도, 세상을 등지고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에 다닌 지 10년 가까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시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삼각산과 설악산에서의 암벽 등반 체험들을 나는 그냥 머릿속 기억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름답고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들을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다시 시를 썼고, 이것들을 드문드문 발표하였습니다. 산은 그러므로 문학에서 떠난 나를 문학으로 복귀시킨 계기가 된 셈이지요. 산길은 함께 가는 친구들이 있어도 ‘혼자’ 가는 길입니다. 혼자서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합니다. 아무도 내 발걸음을 대신 걸어주지 못합니다.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가면서도, 나의 생각은 혼자 엉뚱한 곳으로 가 꿈의 실체에 접근합니다. 혼자 가는 날에는 나의 영혼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며 갑니다.

  혼자 가는 나를 지켜보는 것들도 많습니다. 손짓하는 풀꽃들, 나무들, 바위들, 바람과 햇볕이 있어, 나는 끝내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뼈다귀를 드러내고 서 있는 지리산의 고사목들은, 이 산에서 죽어 몸을 묻고 흙이 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영혼들로 다가섭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에는 이렇게 역사의 숨결과 내음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나는 그 숨결과 내음을 나의 빈약한 언어로 기록해가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로 씌어지는 것이지만, 언어가 갖는 힘과 희망의 덕목을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가는 길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문학, 삶, 산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문학을 왜 하는가. 문학이야말로 내가 기꺼이 선택한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