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저녁의 시간/ 이시영

톰소여와허크 2010. 10. 15. 13:01

저녁의 시간/ 이시영


  한때는 내가 어느 분야에서 세계를 모두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었다. 자고 나면 싸움이었고 자고 나면 연대 투쟁이었으며 성난 이마엔 상처가 늘어났다. 미안하지만 내 청춘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공원을 가로질러 점심도 혼자 먹고 저녁도 혼자 먹는 그늘의 시간 속에 서 있다. 아무도 이제 아름다운 연대를 이야기하지 않으며 이 복잡한 세계를 책임지겠다는 사람들도 없다.

  저녁의 시간은 내게 그렇게 조용히 온다.

                                  - 『조용한 푸른 하늘』 수록


- 군부 독재에 항거하며 70, 80년대를 보낸 사람은 굴종을 강요하는 세상과 굴종할 수 없었던 양심 사이에서 스스로 고투하며 ‘성난 이마’를 하고 시대를 지나왔을 것이다. 투쟁할 대상도, 투쟁할 명분도 분명했다. 힘으로 누르는 세력에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위해서 연대는 불가결한 일이었다. 깨부수기 위해서 깨지면서 끌어안는 연대는 눈물 나는 것이면서도 사뭇 아름다운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90년대를 지나면서 그때의 투쟁 대상은 사라지거나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사회는 다원화되고, 집단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낸다. 투쟁의 동력은 약화되고 연대는 쉽게 허물어졌다.

  화자는 담담하게 이런 상황을 수용한다. 젊음을 아름다운 연대에 소용했지만, 더 이상 연대가 필요하지 않는 세상이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누군가의 책임 있는 행동과 연대에 의해서 그 건강성이 담보되는 것이라면 화자는 지금의 현실이 적이 불만인지도 모를 일이다.  

  화자는 시대의 격랑을 넘어와서 기슭에 댄 배의 처지와 유사하다. 조용한 가운데 짐짓 흔들거리며 ‘아름다운 연대’를 생각하는 모습이랄까. 저녁의 시간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뭘 위해 열심이어야 하는지…….(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