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풍이 젖은 나를 말릴 때/ 송재학
'정혜사지 십삼 층 석탑'-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bosar/
서풍이 젖은 나를 말릴 때/ 송재학
비 오면 넓어지는 고요의 얼안을 견딜 수 없으므로 정혜사지 심삽 층 석탑에 머물지 못한다
봄날의 위쪽에서 피는 꽃을 따라잡기 위해 솟구친 찰주
엉겅퀴에는 탑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을 것이다
내 어느 날처럼 떨어지기 위해 높이 올라갔던가
두 눈동자를 파 버리고 물끄러미 서서 기약 없이 다리품 파는 내 수면에는 탑 그림자가 눈물의 방향으로 누웠다
체온이 떨어지는 서늘함, 머리칼은 허옇게 바뀐다
팔다리를 석탑 일부와 이어 주는 가랑비 속
탑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빈터란 더 큰 절을 꿈꾸면서 숨 가쁜 늑골 몇 개로 두리기둥 세우는 곳이다
서풍이 젖은 나를 말릴 때 탑에서 내 미간까지 느린 진자가 움직인다
점점 말라 가는 못은 구겨진 금박지 같은 노을을 퍼 담는다
-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수록
- 비 오는 어느 날, 정혜사지 십삼 층 석탑 앞에 선다. 우산으로 가릴 수 없는 마음은 내리는 가랑비를 다 맞는다. 탑 속에 들면 비는 피할지 모른다. 엉겅퀴 어디에 비밀의 통로가 있을까. 설령 탑 속에 들었다 해도 안주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안다. 욕망이 있는 한 자신을 가둘 수 없을 것이고, 욕망의 높이만큼 바닥으로 꽂히는 아픔도 감수해야 한다.
‘두 눈동자를 파 버리’는 행위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대한 좌절감으로도 읽히지만, 그릇된 욕망과 그로 인한 주변의 고통에 대한 통절한 자기반성으로도 읽힌다. 내면의 절절함은 급기야 머리칼의 색깔마저 바꾸어 놓는다. 십삼 층 석탑이 비로소 화자를 받아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고해가 끝난 마음의 빈터에 새로 두리기둥을 세우는 일은 여전히 화자의 몫이다. 탑과 화자는 비밀스런 경험을 나누어 가지고 또 일상을 견뎌야 할 것이다.
삶이 주룩주룩 젖는 날엔 탑을 찾아도 좋겠다. 탑이 서풍을 불러줄 테니.(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