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임미리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임미리
사내가 단단한 나무에 못질을 한다.
뾰족한 못으로 나무를 뚫는 일이 어려울까만
못은 툭 튀어 올라 허공에서 낙하한다.
못을 다시 나무 위에 올려놓고
단단한 것은 부드럽게 구슬려야 한다면
정성을 다해 망치질을 한다.
이윽고 나무는 몸을 열어 못을 받아들인다.
약아빠진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이가 먹으니 보이는 것이 늘어난다.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나 할까.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리라.
못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살면서 알아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이제 저 나무는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몸속으로 들어온 뾰족한 못으로 하여
때론 눈물도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며
그만큼의 깊이를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리라.
-『물고기자리』, 고요아침, 2010.
* 나무에 못 박는 일이 녹록한 일이 아니다. 서투른 망치질은 못을 ‘툭 튀어 올라’ 가게도 하고, 맥없이 구부려지게도 한다. 이쯤 되면 못을 박는 것보다 바로 세우는 데 헛심을 써야 한다.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신경질이 된다면 못은 허리 절반이 꺾여 나무 바닥에 혼절해 누울 것이다.
못 하나 박는 데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 때론 ‘부드럽게 구슬려야’ 나무가 못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화자는 생각한다. 이는 전에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는데 연륜이 절로 생각이 미치게 만들었으므로 ‘적응하는 법’이 늘었다고 여긴다. 이때 적응하는 법을 삶과 연관 짓자면 타인과 관계 맺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기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화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늘어난다는 것’이라는 내적인 각성으로까지 확대된다. 누군가에게 어설픈 망치질이기도 했을 자신을, 누군가의 불편한 못질을 밖으로 밀치는 나무옹이 같기도 했을 자신을 떠올리기라도 했을까. 이제 그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음이리라.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못은 남성의 상징이 된다. 조절되지 않으면 폭력으로 변질되기 쉬운 것이 남성이다. 그 폭력을 순하게 길들이는 것이 여성적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서로에게 깊이 스민 눈물 자국에서 숱한 시행착오에서 오는 아픔과 연민을 맛본다. 결국,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사랑을 연습하는 게 인생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