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욱국/김선우
아욱국/ 김선우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빛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
나는 아욱을 빠네
시푸르게 넓적한 풀밭 같은 풀잎을
생으로나 그저 데쳐 먹는 게 아니라
이남박에 퍽퍽 치대어 빨아
국 끓여 먹을 줄 안 최초의 손을 생각하네
그 손이 짚어준 저녁의 이마에
가난과 슬픔의 신열이 있었다면
그보다 더 멀리 간 뻘밭까지를 들쳐 업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푸르른 관능의 힘,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
치대지는 아욱 풀잎 온몸으로 푸른 거품
끓이는 걸 바라보네
치댈수록 깊어지는
이글거리는 풀잎의 뼈
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
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
어린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
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수록
- 아욱을 국으로 끓이려면 껍질을 벗겨내고 이남박에 치대고 으깨야 한다. 잎줄기를 연하게 하고 신맛을 덜기 위한 것이다.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누굴까. 끼니때마다 곁에 사람이 맛나게 먹어주고 몸도 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어머니일 것이다. 그 이전엔 어머니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오늘의 목숨은 다 그들의 사랑에 빚진 거다.
아욱을 치대는 과정에 시푸른 즙이 거품까지 내는 걸 보고 오르가슴을 연상한 건 이상할 게 없지만 어머니의 오르가슴을 물어보는 건 도발적인 데가 있다. 딸의 당돌한 질문에 어머니가 엉뚱한 답을 내놓으면서 상황은 유쾌하게 반전되지만 어머니는 딸의 의도를 간파하고도 ‘오, 가슴!’이라고 천연스레 부언한다. 결국, ‘오르가슴’과 ‘오, 가슴!’이, 그리고 ‘사랑’이 같은 의미일 수밖에 없음을 어머니도 딸도 수긍하는 눈치이다.
‘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차리는 어머니의 사랑, 그 안엔 숱한 슬픔이 간직되어 있다는 걸 화자는 꿰뚫어 본다. 상대의 슬픔이 짚이고, 그 슬픔이 자신 안에 같은 무늬를 남길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