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바위틈에서 죽다/ 차창룡
나무, 바위틈에서 죽다/ 차창룡
난 바위틈에서 살아남았다
모래알 속에도 때론 일용할 습기가 있어
달콤한 척박함에 취해
떠난다는 것의 슬픔을 모르던 시절
나의 자식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 계급의 운명
멀리 흩어지는 것이 성공이다
그곳에서 나처럼 살아남으리라 믿으며
나는 죽어서 또 바위틈에서 태어난다
바위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으며
바위야 아직도 가렵니 쓸데없이 묻는다
바위도 녹는다는 걸 아는가
그것은 살아 있음의 증거
나도 녹는다 슬픔이 물에 녹듯이 바위 속에서
- 『벼랑 위의 사랑』, 민음사, 2010.
바위는 나무에게 박토 중의 박토이다. 그럼에도 알지 못할 인연의 바람이 불어 바위에 악착같이 붙어 뿌리내리는 생명이 있다. 척박한 환경의 내림이 계급적이라면 불평등한 굴레를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게 한 생의 운명이기도 하겠다.
여하간 이번 생은 바위가 껴안았다 해도 다음 생은 이곳에서 “멀리 흩어지는 것”이 나무의 바람이다. 그럼 그 나무를 받아주고 키운 바위는 어떤 존재인가.
화자는 “바위틈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바위틈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화자를 세상에 내놓은 모성임을 짐작케 한다. 어릴 때는 모성 안에서 달콤했겠으나 다른 세상을 경험하면서부터 모성은 떠나야 할 대상이 된다.
모성을 떠나면서 화자가 만난 또 하나의 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여성이다. 화자를 낳으면서 모성이 되고, 화자를 만나면서 여성이 되는 두 여자에게 화자는 빚진 게 많다. 바위는 나무로 인해 조금씩 닳아가지 않는가. 바위에게 나무는 자랑이자 고통이기도 하겠고, 나무에게 바위도 사랑이자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 인연이란 걸 무겁게 받아들인다면 슬픔이 녹고 슬픔이 스미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삶과 죽음을 윤회하는 것이리라.(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