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ㅂ-ㅇ)

신흠(申欽, 1566~1628, 한성부(서울))

톰소여와허크 2011. 3. 24. 17:55

신흠(申欽, 1566~1628, 한성부(서울))


아래는 한춘섭의 글을 일부 줄인 것이다.

[ 조선시대 한문학의 태두 신흠(申欽, 1566~1628) 선생.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현옹(玄翁)·상촌(象村)·방옹(放翁) 등을 사용했다.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목숨을 살리고 대신 순절한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어머니 송씨(宋氏)가 가슴에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튿날 공을 낳았는데,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오른쪽 뺨에 탄환만한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1585년 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대사간이던 외삼촌 송응개(宋應漑)가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공박하려는 것을 말렸더니, 그때 정권을 쥔 동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경원의 훈도를 거쳐 광주향교의 훈도를 지내는 등 높은 관직을 받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했고, 이어서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됐다.

  1599년에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오르고, 형조, 이조, 예조, 병조 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가선대부 예문관 제학에 이어 예조·병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도승지, 예문관 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이 됐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우두머리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냈다. 이어서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궁리를 하던 중, 때마침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에 연루된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은 출세를 할 수 없는 서얼출신으로서 사회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파는 이들이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허위자백케 해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 교동도에 위리안치하고,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시켜 소사(燒死)하게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1613년 계축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화옥(癸丑禍獄=계축옥사)이라 한다.

  이 때 신흠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직돼 김포 선영 밑에서 살았는데, 한 칸 초가에서 편안히 거처하며 집 이름을 ‘하루암(何陋菴)’이라 써 붙이고 유유자적한 삶의 자세로 일관했다. 3년 후에 춘천으로 유배를 당해 그곳에서도 신흠은 초가집을 짓고 ‘방암(放菴)’이라 했다. 이러한 삶 속에서도 소박한 선비의 모습을 작품 속에 담아 낸 것이 있으니, “서까래 기나 짧으나 기둥이 기우나 틀어지나 / 두어칸 모옥(茅屋)이 적음을 비웃지 말라 / 어즈버 만산나월(萬山裸月)이 다 내 것인가 하노라.”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돼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다시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 신흠의 운명은 바뀌어 인조 조정의 첫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 예문관의 으뜸자리에 오르니, 이른바 양관대제학을 겸한 막강한 자리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연달아 맡았다. 정묘호란(1627) 때에는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해 전주로 피란했으며, 9월 62세 나이로 영의정에 오른 후 질병을 무릅쓰고 오랑캐 사신을 접견하고 귀가하다가 쓰러져 수레에 실려 집에 돌아와서 별세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어진 정승이 죽었으니 나라 일도 끝장이다.”했고, 세자가 직접 상가에 와서 조문했다.

  ‘연려실기술’에 “집이 가난하여 간간이 꾸어 먹어도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며, 거처하는 집과 자는 방이 기울고 허물어져서 집안사람들이 수리하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집은 수리하여 무엇하느냐.’ 하였고, 죽을 때에도 의복이 한 벌밖에 없었다.”고 했다.

  1651년(효종2)에 인조 묘정에 배향됐고, 문집으로 ‘상촌집’이 있다. ‘영창대군 신도비문과 묘지명’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묘소는 부인 전의 이씨와 함께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산 12-1번지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묘비는 1628년(인조 6)에 건립됐는데 뒷면에 새겨진 비문은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1699년(숙종 25)에 건립된 신도비는 총 높이 335㎝의 대형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 감각과 세부적으로 생동감 있는 조각 표현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신흠은 일찍이 학문에 전념해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이 두터웠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월사 이정구(李廷龜), 계곡 장유(張維), 택당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손꼽히고, 조선 4대 문장가로도 칭송된다. 또한 임진왜란 전후로 폭증한 대명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 정리, 각종 의례 문서 작성에 참여하는 등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정구는 공의 신도비문에서 “붓을 잡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생각하지 않고 휘둘러대는 듯하면서도 전중(典重)한 글이 노련하게 작성되면서 한 점 하자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문장이 시(詩)보다 훌륭하다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런데 시를 보면 더욱 맑고 깨끗하여 아취가 있었으며, 남의 흉내를 일체 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였으니, 이런 측면에서는 역시 시가 문장보다 우월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신도비문)”

  신흠은, 그의 청빈한 마음을 담아 이런 시조를 남기기도 했다.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무쳐셰라

시비(柴扉)를 여지 마라, 날 찾즈리 뉘 이시리

밤즁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 한 편이다. 산촌에 은거하면서 청정한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은사(隱士)의 심경을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1627년(인조5) 9월 4일 영의정에 오른다. 하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 신흠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일곱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여의고,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송기수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으며 쓸쓸하게 성장했다. 송기수가 여러 손자들을 가르치면서 ‘춘(春)’자를 내주면서 글을 짓게 하니 공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지만물 가운데 봄이 맏이다.”고 하자 송기수가 감탄하며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공은 비록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친가는 물론 외가와 처가 모두 명문세가였고, 훗날 아들 익성이 선조 임금의 사위가 되기까지 했으며, 마침내는 최고의 관직에까지 올랐으니 막강한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않아 양식을 빌려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자주 끼니를 거를 만큼 곤궁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흠잡을 데 없는 그의 가문을 당대 제일로 칭송했다.

  신흠의 신도비는 좌의정인 월사 이정구가 짓고, 영의정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으며, 이조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는데 이런 내용이 전한다.


  “(생략)지성으로 우애하며 친족과 화목하게 지냈다. 홀몸이 된 누님과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어미처럼 섬겼는데, 집안에 시끄러운 말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 왕실과 혼인을 맺은 일 때문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큰 며느리를 맞을 때 집이 좁고 누추하여 측근에서 관례에 따라 수선할 것을 청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집이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를 행하기는 충분하다’며 끝내 기둥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중략) 빈곤한 생활을 태연히 견디면서 즐기고 좋아하는 욕심이 전혀 없었으며, 일찍이 집안 일에 마음을 쓴 일이 없었다. 산나물에 껍질만 벗긴 조밥을 먹어도 괴로워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싫어하였기에, 문을 닫고 앉아있으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환란을 만나면 지조와 행실을 더욱 굳게 지켰고, 귀하고 높은 자리에서는 가득찬 데 따르는 화를 더욱 경계하였다.”

  신흠은 아들 둘과 딸 다섯을 두었다. 장남 익성은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져 부총관에 올랐고, 차남 익전(翊全)은 도승지에 이르렀다. 손자로는 대사간 면(冕), 함경도 도사 최(最), 이조판서 정(晸)이 있어, 후세가 매우 번창했다.

  잘 알려진 시 한 편을 적는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每日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 있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열우신지) 버드나무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