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1549~1587, 나주 )
임제(1549~1587, 나주 )
아래는 ‘유림천하(儒林天下)의 열혈아(熱血兒)’라는 제목의 이남천의 글이다.
[“상감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이 주청 드리옵니다. 요 며칠 전에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제수하여 임지(任地)로 향한 임제라 하는 젊은 선비가 있아온 즉 그 거취가 크게 해괴한 까닭에 망극한 말씀을 아뢰옵나이다. 그의 부임 행렬이 송도 고을을 지날 무렵 임제는 그 고을의 명기인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잔을 부어 놓고 평조를 읊었다 하옵니다. 도사(都事)라 하는 직책이 각 도(道)에 일인밖에 없으며, 지방 관리의 불법을 규찰하고 과시(科試)까지 맡아 보는 중책으로서 지방 관아와 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聖恩)을 저 버린 죄, 중벌로 치죄함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통촉하옵소서.”
늙은 대사간(大司諫)의 목소리가 대전(大殿)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대사간의 주청을 듣는 동안 선조 대왕의 용안에 순간적인 고뇌의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진사시와 생원시를 거치고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젊은 선비 백호(白湖) 임제(任悌), 선조 임금은 대사간의 주청을 듣는 지금도 재기 넘치고 준수하며, 평안 도사를 제수하는 자리에서도 전혀 주눅 듦이 없이 호기롭기만 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에 있는 그가 사사로운 정리에 이끌려 조정 중신들의 주청을 물리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것은 군왕으로서 스스로 국기(國紀)를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까닭에서다. 결국 백호는 임지에 도착도 하기 전에 도사 직에서 해임되었으나, 머지않아 다시 예조 정랑을 제수하게 된다.
그러나 조정의 중신들이 동서 양당으로 나뉘어 서로를 비방하면서, 피비린내까지 풍기는 환해풍파(宦海風波)를 목격한 그는 마침내 벼슬자리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마치게 되니, 그의 로맨티스트(Romantist)로서의 삶은 이에서 비롯되며, 그 이후 평양은 그에게 있어서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의 고장이 된다.
과연 평안도사 부임길에 송도 고을을 지나던 백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호걸은 호걸을 알아보고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또 예로부터 영웅호걸은 미색(美色)을 탐한다고 했던가? 송도 명기(名妓)인 황진이, 일컬어 진랑(眞嫏), 그녀는 오래 전부터 백호에게 있어서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당대 최고의 풍류가였던 백호는 송도 고을을 지나면서 황진이를 수소문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백호가 마음속에 담고 있던 황진이는 이미 세달 전에 39년의 짧은 삶을 마감하였고, 따라서 그들의 조우(遭遇)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백호가 과연 누구이던가? 그는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는 홀로 진랑의 무덤을 찾는다. 황진이는 임종을 앞두고 유언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송도의 대로변에 자기를 묻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유언대로 대로변의 산기슭에 그녀를 장례하였다. 따라서 어렵지 않게 그녀의 무덤을 찾은 그는 그녀의 무덤가에 앉아 평조 한 가락으로 이루지 못한 인연을 탄식하면서 진랑의 넋을 위로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느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그는 창뿐만이 아니라 퉁소에도 신기(神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그의 창과 퉁소 소리가 산기슭을 굴러 멀리까지 퍼졌으며, 그 가락은 다시 풍문이 되어 조정 중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결국은 대사간의 상소(上訴)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과연 그는 진랑의 무덤을 찾으면서 그의 앞길에 닥칠 풍파를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한낱 우부(愚夫)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겠다. 모든 사람들이 신분 상승을 위하여 해바라기의 삶을 살던 그 시절, 그러나 백호는 벼슬을 초개와 같이 여겼으며, 그리하여 평안도사라는 관직을 한 기녀(妓女)의 위령제(慰靈祭)와 맞바꿀 수 있는 용기의 소유자였으니, 이에서 백호의 멋스러움과 호걸스러움을 함께 찾을 수 있다.
관직을 떠난 이후 그의 유랑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김삿갓의 팔도 유랑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 팔도을 유랑하면서 수많은 기녀들의 가슴을 두방망이질하게 만들고 또 눈물짓게 했으니, 백호야말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풍류인이자 자유분방한 시인의 대명사였다.
백호는 그토록 뜨거운 열혈아(熱血兒)였기에 또한 얼음처럼 차거운 여인의 가슴도 봄눈 녹이듯 할 수 있었던가 보다. 평양의 명기로 한우(寒雨)라는 여인이 있었다. 한우는 황진이 못지않은 재색을 겸비하고 시서음률에 뛰어난 명창이었다. 그러나 이름 그대로 차갑기 이를 데 없어 어지간한 사내에게는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는 여인이었지만, 백호의 평조 한 자락 앞에서 그녀의 빙설(氷雪)은 춘풍에 봄눈 녹듯 파도에 모래성 무너지듯 한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세인들이 일컫기를 ‘한우가(寒雨歌)’라 하는 이 노래는 시적 기교 면에서 은유와 중의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과연 현대의 내로라하는 어떤 시인이 있어 이처럼 빼어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찬비의 한자말은 곧 한우(寒雨)이니 그 원관념은 곧 기생 한우이겠다. ‘얼다’ 라는 말은 남녀의 육체적 결합을 뜻하는 고어로서, 어른(<얼운)은 곧 ‘언 사람’을 뜻하는 바, 이 시는 ‘얼어 자다’라는 하나의 시어에 두 가지 의미를 중첩시키는 시적 기교를 선택하고 있다. 한우가 비록 얼음처럼 차가운 여인이겠으나, 그리하여 여느 남정네에게 눈길 한 번 주어 본 적이 없겠으나, 이 한 수의 시조 앞에 어찌 무심할 수 있었을까? 가야금의 명인이기도 했던 한우는 곧 열두 줄 가야금을 타면서 백호를 향한 연모의 정을 그 즉석에서 토로한다.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어이하여 찬 이불 속에서 무엇 때문에 혼자 주무십니까?
원앙이 노니는 베개와 비취가 반짝이는 이불을 어이하고 혼자 주무십니까?
차가운 비 맞았으니 언 몸을 따스하게 녹이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 아닐런지요?
과연 백호의 ‘한우가’에 대한 화답시(和答詩)로서 손색이 없이 빼어난 노래이다.
기생 한우의 꽁꽁 언 가슴 속에 잠자고 있는 연정(戀情))과 풍류를 자극하여 용광로와 같은 사랑을 불태우게 했던 백호, 그리하여 풀잎의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지만 짧았던 그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백호를 기다리며 일생을 마쳤다는 한우, 그들은 진정한 풍류가객이며 풍류가인임에 틀림이 없겠으니, 물질의 위력 앞에 향기 잃은 사랑이 만연하고, 노트북의 위력이 낭만의 멋을 앗아가 버린 오늘의 우리에게 두 사람의 로맨스는 숱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백호 임제를 논의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여인이 또 있으니, 그녀가 바로 일지매(一枝梅)인 바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 방영된 TV 연속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평양은 예로부터 색향으로 소문난 고장이거니와 일지매 또한 평양의 명기였다. 빼어난 용모에 시서가무(詩書歌舞)가 뛰어난 일지매는 그런 만큼 성품 또한 도도하여 어떤 부(富)나 권력으로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었다. 어느 해 여름이던가? 백호는 평양감사로부터 한 통의 전갈(傳喝)을 받는다.
‘일지매라는 기생이 있는데 내 아무리 수청을 들게 하려 해도 실패했거늘, 자네가 와서 한 번 그녀의 콧대를 꺾어 보길 바라네.’
감사의 전갈 앞에서 백호는 마침내 끼가 발동한다. 그는 그의 시재(詩才)를 동원하여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생선 장수로 변장한 그는 그녀의 집 문전에서 그녀의 몸종과 생선 흥정을 하다가 날이 저문 것을 빌미로 하여 문간방에서 하루 저녁을 유하게 된다. 자고(自古)로 천재와 미인은 외로운 법이다. 밤이 깊어지자 엄습하는 고독감을 견딜 수 없었던 일지매는 거문고로 외로움을 달랜다. 그때, 퉁소의 달인이기도 했던 백호는 퉁소를 불어 거문고 소리에 화답한다. 깜짝 놀란 그녀는 심금을 울리는 퉁소 소리에 이끌려 담장 밖을 기웃거려 보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장탄식과 함께 터져 나온 일지매의 독백 왈
“원앙금을 누구와 함께 잘까?”
다시 화답의 말이 들려온다.
“나그네의 베갯머리 한 끝이 비었는데......”
퉁소 소리와 화답의 말이 들려 온 곳은 바로 생선 장수가 머무는 문간방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틀림없는 생선 장수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녀는 문간방으로 다가가면서 다시 말을 잇는다.
“어인 호한(好漢)이 마음 약한 아녀자의 간장을 녹이는고?”
잠시 후 일지매의 거실 안, 새 옷을 갈아입은 풍류한량과 술상을 사이로 한 일지매, 밤 가는 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정담과 화창(話唱)에 밤하늘의 별들도 시샘의 가녀린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그렇게 일생을 보낸 백호도 황진이가 요절한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그의 삶처럼 남다른 것이었다. 임종을 지키면서 슬피 우는 자식들에게 그는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해 꾸지람을 내린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황제’를 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오로지 우리나라만 예부터 ‘전하(殿下)’로 일컫는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이 몸이 태어났다가 죽는데, 무엇이 그리 슬프단 말이냐? 내 죽은 뒤에도 결코 곡일랑 하지 말지어다.”
죽기 직전에 유언을 남기는 임 백호의 모습, 이것이 그의 진정이며 참 모습인 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그는 벼슬을 초개처럼 던져 버릴 수 있었다. 속국화한 조선에서의 벼슬을 부끄럽게 여겼던 백호, 그 벼슬을 위해 파당을 만들고 숱한 사화(士禍)를 일으키면서 아귀다툼을 일삼던 당대의 조정 중신들을 바라보면서, 일세의 천재요 영웅호걸이었던 백호가 선택한 길, 그것은 바로 풍류한량의 길이었다. 어찌 보면 여성 편력처럼 비쳐지기도 하는 백호 임제의 짧은 일생, 그러나 그것은 속국화한 조선 백성으로서의 의지처를 찾기 위한 지난한 몸짓이었다. 그것은 조선 팔도를 떠도는 불쌍한 영혼의 모성 의지 본능이자 리비도(Libdo)가 분출한 산물일 수도 있겠다.
따라서 백호 임제야말로 일세를 풍미한 기인(奇人)이요. 정감 넘치는 시인이요. 진정한 의미로서의 우국지사이니,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여 의(義)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백호 임제의 삶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짙은 향수(鄕愁)를 느끼게 한다.]
임제를 기념하는 백호기념관이 그가 태어난 나주시 다시면 회진(會津)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한쪽에는 기념관이 그리고 한쪽에는 운치 있기로 이름난 영모정(永慕亭)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